공유

제14화

“사모님은 뭔가 내가 외도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

원서윤이 당당한 눈빛으로 민예원을 바라봤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보여야 할 당황함과 부자연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원서윤이 정말 외도 중이라고 해도 민예원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옆에 있던 방이연이 이를 보고 얼른 해명했다.

“오해에요. 혹시 누나 친구들인가요? 사실 누나는 원장님 부름을 받고 자리만 채우기 위해서 온 거지 직접 오겠다고 신청한 건 아니에요.”

극장은 핑크빛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강한 불빛보다는 따듯한 불빛을 선택했다.

여승재와 민예원은 처음 들어왔을 때 원서윤 옆에 선 방이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키가 큰 남학생이 갑자기 나서자 몸이 약한 사모님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민예원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시울을 붉히며 여승재의 품으로 쏙 들어가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내가 너무 놀라니까 우리 아이까지 놀란 것 같아요. 얼른 손 좀 올려줘요. 아이가 무서워하고 있어요.”

민예원이 여승재의 손을 잡아다 아직 밋밋한 아랫배에 올렸다.

하지만 여승재는 원서윤이 방이연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방이연을 아래위로 훑었다.

원서윤이 무의식적으로 방이연을 등 뒤로 당겨오더니 별다른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덤덤하게 말했다.

“여 대표님, 사모님, 여기는 두분이 오실 곳이 아니에요. 별다른 용무가 없으면 먼저 나가시는 게 어떨까요?”

여승재라는 이름은 경항시, 그리고 협상이라는 업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여승재의 언행은 막론하고 오늘 어떤 요리에 젓가락이 갔는지까지 주목하고 있었다. 여승재의 젓가락 한 번에 그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름을 날리는 경우도 파다했다.

그런 여승재가 와이프를 데리고 의료 협회에서 주최한 소개팅 현장에 나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원서윤은 자신과 방이연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이 남자와 엮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원서윤의 말에 여승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원서윤 씨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챙겼다고 그래요?”

여승재의 손을 잡은 민예원은 아까부터 찬밥 신세였다. 기분이 잡친 민예원이 입을 삐쭉거리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생님, 서윤 언니가 소개팅 현장에 나오느라 예쁘게 꾸민 건 아는데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어떡해요? 설마 반하기라도 한 거예요?”

“사모님, 부러우면 부럽다고 그냥 말해요. 하긴 두 사람 다 결혼했는데 아우라와 미모가 천지 차이니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방이연은 무조건 눈치 없이 입바른 소리하는 걸로 큰코다칠 것이다. 원서윤이 방이연의 옷소매를 당기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눈짓했지만 방이연은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이연이 타깃을 여승재에게 돌렸다.

“남자분도 그래요. 누나가 좋은 뜻으로 두 분이 앉을 자리는 없다고 귀띔했을 뿐인데 왜 계속 거기 길 막고 서 있는 거예요?”

“오버하지 마요. 잘생겼다고 모든 여자가 흠뻑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아니니까.”

원서윤은 방이연의 무모함에 감탄했다.

여승재의 여우눈이 순간 위험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뺏긴 동료들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허허 웃었다.

“여기 앉으세요. 저희는 뒤에 서 있으면 돼요.”

“그래요.”

여승재는 늘 그렇듯 오만한 태도였다.

방이연이 콧방귀를 꼈다.

“권력으로 약자를 누르는 건 남자가 아니죠. 누나. 가자. 쪽걸상 가지고 뒤에 가서 앉으면 되지.”

방이연은 마술이라도 하듯 작은 크로스백에서 작지 않은 접이식 의자를 꺼냈다. 방이연의 손은 참으로 따듯했다. 온기가 원서윤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5년 전, 아빠가 자살하고 엄마가 미쳐버린 뒤로 느껴본 적이 없는 온도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동생은 쩍하면 그녀를 찾아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묻곤 했다.

“누나, 부모님은 내가 남자 대장부라는데 도대체 나는 언제 크는 거야? 내가 커야 누나도 지켜주고 부모님도 지켜줄 텐데.”

기억의 조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방이연이 끝도 없이 재잘거렸다.

“누나, 무서워할 것 없어. 누나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수빈아.”

원서윤도 알고 있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에는 방이연과 너무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원서윤도 더는 참기가 힘들어 방이연을 와락 끌어안은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사실 너무 쪽팔렸다.

극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오가며 펑펑 울고 있는 원서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방이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게 사실 누나, 나 누나한테...”

사실 방이연은 원서윤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승재의 주먹이 예고도 없이 방이연에게로 날아들었다.

방이연은 당장에 피를 토해냈다. 원서윤이 깜짝 놀라며 얼른 방이연을 부축했다.

“이연아.”

늘 차분하기만 하던 여승재는 지금 이상하리만치 음침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도 이미지 관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예원도 달려와서 말렸지만 여승재가 민예원을 밀어내더니 자극받은 치타처럼 방이연에게로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려 했다.

원서윤이 두 팔을 벌리고 방이연 앞에 막아서더니 역겨운 티를 팍팍 내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여승재 씨,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도 정도라는 게 있어요. 이연이를 꼭 때려야겠다면 나도 같이 때려요.”

“원서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여승재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주먹을 어찌나 꽉 움켜쥐었는지 우두둑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고 관자놀이가 툭툭 뛰는 게 보였다. 여승재는 입술이 일직선으로 될 정도로 꽉 앙다물었다. 그러자 원래도 강인하던 이목구비에서 말도 함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더 강압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여승재가 원서윤의 팔을 잡아 등 뒤로 확 당겼다.

원서윤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낮게 호통쳤다.

“여승재 씨, 이거 놔요. 이연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민예원 씨를 위해서 이러는 건 알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민예원...”

여승재의 눈동자에 어려있던 살기가 순간 줄어들더니 차갑게 웃으며 원서윤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뭐가 웃기는지 살기가 사라진 자리에 조롱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지나서야 여승재가 이렇게 말했다.

“서윤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원서윤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 대표님, 대표님이 사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경항시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연이는 내 친구예요. 이연이를 다치게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친구야? 그새 목숨을 내걸고 보호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된 거야?”

여승재의 말투에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서윤이 미소를 지었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면 어김없이 쓰는 가면이었다.

“맞아요. 왜 이제 만났나 싶을 정도로 잘 맞더라고요. 대표님, 우리가 사이가 뭐라고 이렇게 내 교우관계까지 간섭하는 거예요?”

“원서윤, 네가 말해봐.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여승재가 원서윤을 등 뒤로 보이는 벽에 바짝 기대게 했다.

극장의 벽에는 방음 조치가 되어 있어 폭신한 편이었다. 안에는 두꺼운 방음 스펀지가 깔려 있지만 등을 대자 여전히 매우 차갑고 딱딱했다.

“우웩.”

좋지 못한 기억이 폭풍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리적인 거부감에 원서윤은 여승재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가슴을 움켜잡고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펑.

그러자 여승재가 마치 그녀를 죽일 것처럼 원서윤의 귓가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