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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저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법무팀에서도 그래요. 그렇게 중요한 계약서를 바로 나한테 줘버리면 어떡해요?”

민예원도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제2차 협상을 곧 시작할 텐데 계약서를 잊어버렸으니 을이 얼마나 비웃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까만 테두리 안경을 쓴 여자가 폭주하더니 사원증을 빼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사원증은 신축성이 좋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기에 너무 세게 패대기치면 오히려 튕겨 올랐다.

미처 피하지 못한 민예원이 허공으로 날아오른 사원증에 얼굴을 긁히고 말았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민예원 씨, 내가 정말 오래 참았거든요? 민예원 씨는 여승재 선생님이 뒤에 서 있으니까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러는 거겠죠. 협상 새내기인 우리는 여승재 선생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꾹 참고 있었어요. 제1차 협상 때 늦잠 자고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뭐라 한 사람 없었다고요.”

복도에 싸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민예원은 지금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아물어버릴지도 모르는 상처를 감싸 쥐고 불쌍한 척 울먹였다. 겉모습만 봐서는 잘못한 사람이 민예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여자는 여전히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 민예원 씨, 내가 봤을 때는 그냥 팀에서 나가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팀 구성원들에게 민폐만 끼칠 바에는 그냥 나가달라고요. 어쩜 능력도 없는 사람이 구성원들 발목 잡을 생각만 하는 거예요? 정말 역겨워서 더는 같이 못 하겠어요.”

원서윤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회의실 옆에 있는 탕비실로 들어가 차를 마시며 휴식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싸움이 잠잠해지면 다시 들어가려 했다. 이젠 그 어떤 시비도 휘말리는 게 싫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참, 민예원 씨. 솔직히 말할게요. 다들 겉으로는 민예원 씨 칭찬하면서 굽신거릴지 몰라도 속으로는 원 선생님을 더 우러러보고 있어요.”

“...”

애꿎은 원서윤이 그렇게 강제로 소환되고 말았다. 민예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여자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흥분했다. 지금까지 떠들었으니 이제 못 떠들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원 선생님 봐봐요. 전문적으로 협상을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느긋한 태도로 상대가 비집고 들어올 엄두조차 못 내게 하잖아요. 민예원 씨는요? 계약서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지워버리질 않나, 잊어버리질 않나... 정말 멍청한 건 답도 없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화풀이가 끝난 여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바닥에 떨어진 사원증을 밟고 밖으로 나갔다. 법무팀의 다른 멤버들도 팀에서 빠지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팀에 소속되어 있던 시청 관리자들이 민예원을 위로했다.

“대표님, 큰 흐름을 보셔야죠. 계약서를 잃어버려도 법무팀만 있으면 일을 해결하기 쉽지만 법무팀이 단체로 팀에서 빠진다면 모양새가 좋지 않아요.”

“황 주임님, 저 사람들이 먼저 나를 모욕했어요. 가면 뭐 어때요. 선생님이 새로운 법무팀 보내주실 거예요.”

민예원은 여전히 제멋대로 나갔다. 시청 관리자들이 그런 민예원을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변을 빙 둘러보던 시청 관리자가 탕비실로 향하는 원서윤을 발견하고는 얼른 큰 소리로 불렀다.

“원 선생님, 여기요. 민 대표님 팀원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거예요?”

원서윤이 강제로 끌려왔다.

민예원은 눈시울을 붉힌 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였다.

“언니, 나는 늘 언니를 믿었어요. 언니가 이 케이스의 총책이 되고 싶다면 선생님께 말씀드렸을 거예요. 하지만 뒤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나 정말 너무 힘들어요.”

“사모님,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죠?”

원서윤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민예원은 여전히 눈물만 흘렸다.

“흑흑... 언니. 권력이 그렇게 갖고 싶었어요? 내가 언니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양어머니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언니는... 언니는...”

민예원은 말끝을 채 맺지도 않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자리를 떠났다.

15분 뒤면 제2차 협상 회의가 시작되는데 이렇게 제멋대로 무책임하게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원서윤에게 던져주고 도망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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