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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원서윤은 원래 있던 사무실로 돌아가 개인 물품을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인부들이 사무실에서 상자 몇 개를 꺼내 아무렇게나 복도에 던지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문에 걸린 팻말을 바꿨다.

전에 붙어있던 팻말은 [산부인과: 원서윤]이었는데 지금은 [행정 부원장: 민예원]으로 바뀌었다. 인부가 원서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두 동강으로 부시더니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원서윤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를 방관했다.

‘경항시로 돌아오면서 모든 걸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

붕붕.

핸드폰이 울렸다.

[집주인]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원서윤, 아니면 와서 빌어볼래?]

여승재는 이제 원서윤을 대놓고 면박을 주고 있었다. 민예원을 위해 모든 체면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마치 그때 원서윤이 여승재를 위해 온갖 우스운 일을 자청했던 것처럼 말이다. 도서관에서 봐둔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 싫어 아예 막무가내로 책상에 드러누운 적도 있었다.

여승재가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시험에 날 문제를 귀신같이 맞힌다는 학원 강사를 만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그 강사를 따라다니며 여승재에게 강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다 학원 강사가 스토킹으로 신고하는 바람에 구치소에서 15날을 감금해 있었다.

돌이켜보니 정말 너무 우스웠다. 여승재가 지금 다른 여자를 위해 간과 쓸개를 빼주는 모습이 어쩌면 그때의 그녀와 똑 닮아 있었다.

[대표님, 대표님에게서 다른 사람이 보여요.]

원서윤이 답장했다.

1분 후.

[?]

[내가 보여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서윤은 여승재를 차단했다.

수요일이 되자 협상 프로젝트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2차 협상의 목적은 초보적으로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들에 대해 협의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가격 외에 후속 구매 및 공급 방안, 그리고 비용 납부 루트 등도 결정해야 했다.

이 부분은 당연히 법무팀에서 연속 3일의 낮과 밤을 고군분투한 끝에 작성한 것이었다.

“허, 원서윤 씨,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맞네요.”

원서윤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수면 부족으로 구석에 기대 목캔디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정원준이 보였다. 비즈니스 협상 전문가로 밥벌이하려면 성대가 매우 중요했다.

원서윤이 가볍게 웃었다.

“대표님 케이스는 잘 안 풀리나 봐요?”

“원서윤 씨, 지금 초 치는 거예요?”

정원준은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원서윤은 하행선을 그리고 있는 빨간 숫자들을 보며 아무 뜻 아니라는 듯 말했다.

“대표님, 프로젝트가 왜 계속 을 쪽에 걸려있는지 생각해 봤어요? 위위구조라는 사자성어 들어봤죠? 포위군의 근거지를 공격해 포위당한 우군을 구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엘리베이터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정원준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열림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

“이런 젠장.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빌어먹을 놈들. 검은 속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게 나를 이용해 다른 사람과 흥정하는 쪽일 줄은 몰랐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원서윤은 한 손을 스키니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속이 텅 비어 있어 차갑기만 했다.

정원준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런 원서윤을 경계했다.

“원서윤 씨가 왜 나를 돕는 거죠?”

원서윤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게 돕는 걸로 보여요? 나는 그냥 나의 총명함으로 정 대표님의 무능함을 일깨워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원서윤 씨...”

원서윤이 닫힘 버튼을 눌러 잔뜩 약이 오른 정원준이 퍼부은 욕설을 차단했다.

그렇게 3층 회의실로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절망에 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테두리 안경을 쓴 여자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민 대표님, 팀 관리자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계약서는 법무팀에서 꼬박 3일을 밤새워서 만든 거예요. 그런 계약서를 잊어버렸다고 하면 책임은 누가 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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