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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할머니,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할머니 옆에 얌전하게 쪼그리고 앉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성숙하다기보다는 활발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젊음에서 나오는 활력인 것 같았다.

“내... 내가 원하는 만큼 주겠다는 거야?”

차에 치인 척 연기하던 할머니가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개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는 간호사예요. 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는데 한 달 월급에서 국민건강보험을 빼면 한 90만 원 정도가 남거든요? 근데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한 달에 10만 원에서 12만 원 정도는 모을 수 있어요. 지금 카카오페이에 200만 원 정도 있는데 다 드릴까요?”

“다... 다 가져도 돼?”

할머니가 오히려 주춤했다.

젊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으면 여기서 기다려줄래요? 월세방 빼면 몇십만 원은 더 나올 거예요.”

“어디, 어디 사는데?”

할머니가 젊은 남자를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젊은 남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숙소에서 지내죠. 가끔은 병원 바닥에서 자면 하룻밤은 대충 때울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딱해라.”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더니 자애로운 눈빛으로 젊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머니에서 현금다발을 꺼냈다. 20만 원에서 40만 원은 되는 것 같았다.

“아이야, 이리 와봐. 이건 할머니가 주는 용돈이야. 내 번호 저장하고. 앞으로 지낼 곳이 없으면 할머니 집으로 와.”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젊은 남자가 할머니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옆에서 구경하던 원서윤은 젊은 남자가 자리를 뜨려는 할머니의 주머니에 받은 돈을 몰래 다시 넣는 걸 봤다.

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더니 흩어졌다.

원서윤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산부인과 원서윤이에요. 혹시... 방이연 씨?

“네, 저 맞아요. 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이연이 고개를 돌리자 활기 넘치는 눈동자가 원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에 원서윤은 심장이 철렁해 멈칫했다.

그 눈이 동생과 너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판박이나 다름없었다.

성격이 대범한 방이연은 눈치 없이 원서윤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방이연의 손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원 선생님, 정말 너무 여신처럼 예쁘게 생겨서 그러는데 앞으로 그냥 누나라고 부르면 안 돼요?”

“누나? 왜요? 왜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요?”

처음 본 남자애였지만 너무 친근해 막 품에 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작 눈매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일까? 5년째 악몽처럼 따라다니지만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그 눈매 말이다.

원서윤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방이연의 손을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방이연이 헤벌쭉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 고아라서요. 보육원에서 자라서 친척이 없거든요. 그러다 큰 병을 앓고 기억을 거의 잃었는데 누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고아에 기억까지... 잃었다고요?”

그 말이 마치 방망이처럼 원서윤의 가슴을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방이연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으니 활기차 보이면서도 상큼했다.

“맞아요. 아, 그리고 18살 때 백혈병에 걸렸는데 어떤 착한 사람의 후원을 받은 것도 모자라 골수까지 기증받았어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뛰어다닐 수 있는 것도 다 그분 덕분이에요. 어때요? 되게 행운스럽지 않아요?”

방이연은 골수를 기증받은 적이 있었다.

골수 기증을 받은 환자는 체내의 유전자 배열이 기증자의 DNA와 일부분 겹치게 된다. 친자 감정하게 되면 결과가 오염될 확률이 거의 매우 높았다.

“그러면 허락한 걸로 알고 누나라고 부릅니다? 가자, 누나. 원장님이 오늘 10시 전에 다시 여기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했으니까 더 지체할 시간 없어.”

방이연은 직업 고등학교 간호학원을 갓 졸업한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청년이었다.

비록 보육원에서 자라긴 했지만 성격이 매우 밝았고 과분할 정도로 착했다.

원서윤은 그렇게 방이연의 손에 이끌려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는 체리 자동차에 올라탔다.

‘체리의 큐티큐? 이 차가 아직도 남아 있어?’

방이연은 체격이 어마어마했지만 성격과 몸매는 반전이었다. 방이연이 운전석에 올라타자 차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원서윤은 살겠다고 약간은 난해한 핑크색 안전벨트를 꽉 움켜잡았다.

방이연이 차에 시동을 걸며 우쭐댔다.

“누나, 꽉 잡아. 내가 오늘 분노의 질주에서 보던 장면을 직접 느끼게 해줄게...”

체리 큐티큐는 시속 30킬로로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한편, 까만색 페라리가 체리 큐티 큐가 비운 자리에 차를 댔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민예원이 차에서 내리려는 여승재를 와락 끌어안았다.

“선생님, 빨리요. 오늘 꼭 서윤 언니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단 말이에요. 헤헤. 너무 재밌겠다.”

소개팅은 옆 상가에 있는 극장에서 열렸다.

어릴 적에 엄마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걸 좋아했지만 아빠는 늘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엄마가 그걸 알아볼 수나 있겠냐며 비아냥댔다.

그러다 엄마는 독학으로 경항시에서 제일 유명한 오페라 극단에 합격했다.

체면이 꺾인 아빠는 경솔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었다.

“우리 딸과 아들이 왜 이렇게 꿋꿋한가 했더니만 당신을 닮아서 그런 거네.”

그건 맞았다. 엄마는 동생은 몰라도 나는 엄마와 똑 닮은 성격을 가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애가 돼서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진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누구도 확정 지어 말할 수 없었다.

“누나, 혹시 오페라 좋아해?”

“그럭저럭. 너는?”

원서윤은 방이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기 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자꾸만 이렇게 외쳤다.

‘저 아이가 맞아. 저 아이가 내 동생이야. 내 동생은 아직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나도 그럭저럭. 전에 보육원에서 사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오페라를 그렇게 좋아했어. 엄마가 오페라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

방이연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극장에 들어가서도 방이연은 이런저런 화제를 찾으며 원서윤과 수다를 떨었다.

원서윤은 방이연이 뭐라 말하는지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그저 꿈에서도 그리던 그 눈매를 한순간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순간 원서윤의 코끝에 위압감이 느껴지는 차가운 박하 향이 감돌았다. 극장의 불빛에 의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원서윤을 가렸다.

원서윤은 불륜 현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내 민예원의 감탄이 들렸다.

“서... 서윤 언니. 결혼... 한 거 아니었어요? 소개팅 현장에는 왜 나타난 거예요? 설마... 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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