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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원서윤이 마음 상해한다고?”

페이스톡은 갑자기 스피커폰으로 바뀌었다.

문이 아무리 방음이 된다고 해도 모든 소리를 걸러낼 수는 없었기에 방 안에 있는 원서윤은 여승재가 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민예원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맞아요. 서윤 언니가 축 처진 게 안색도 별로 안 좋더라고요. 선생님, 나와 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신경 쓰는 거 아는데 서윤 언니 진짜 나쁜 사람 아니에요.”

민예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확 높아졌다.

핸드폰 너머에 있는 여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피커로 책을 펼치는 소리와 토론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여승재는 회의하면서도 민예원이 보고 싶어 페이스톡을 걸며 사랑꾼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승재는 전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5년 전의 여승재는 일을 위해서라면 몇 주든 몇 달이든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서윤은 여승재가 너무 보고 싶어 못 참을 정도가 되어야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내 여승재의 근황을 물어봤다.

하지만 여승재의 대답은 영원히 그 한마디밖에 없었다.

[바쁘니까 귀찮게 하지 마.]

“선생님, 아니면 내가 언니 불러올게요. 나와 아이를 봐서라도 좋은 말 좀 해주면 안 돼요? 그래야 언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요.”

민예원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원서윤도 감탄할 정도였다.

여승재가 코웃음 쳤다.

“원서윤이 그래 달래?”

여승재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민예원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

“그렇다면요? 들어줄 거예요?”

“원서윤한테 직접 말하라 그래.”

여승재가 도도하게 말했다. 민예원에게 보이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원서윤이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는 비단결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아무렇게나 등 뒤로 풀어헤친 모습이 나른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거기다 깃이 넓은 태양 모를 썼는데 T 브랜드 한정판이었다. 모자 깃에 디자이너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봐서는 싼 가격이 아닌 것 같았고 돈이 있다고 바로 살 수 있는 제품도 아닌 것 같았다.

민예원이 그런 원시윤을 보고 잠깐 넋을 잃었다. 눈동자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난감함이 보였다.

“언니, 기분은 좀 좋아졌어요?”

민예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원서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언제 기분이 안 좋다 그랬어요? 무료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아주 솔직하고 담백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게다가 화장하지 않은 예쁘장한 얼굴에 숙취가 조금 가시자 얼굴에 윤기가 도는 것 같으면서도 건강해 보였다.

이번에는 원서윤이 민예원에게 물었다.

“혹시 사모님은 내가 기분이 나빠서 축 처져있기를 바라나요?”

민예원은 난감해 죽을 지경이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언니, 나는 늘 언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도 제일 좋은 친구요.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다행이네요. 그 말 꼭 지키길 바라요.”

원서윤이 싱긋 웃었다. 타고난 침착함과 우아함이 다소 애티 나는 민예원을 압도적으로 이겼다.

민예원이 애써 웃어 보였다.

현관까지 걸어간 원서윤이 문을 열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설마 방주인이 나간 다음에도 계속 이 방에 남아서 남편과 통화할 건 아니죠?”

오늘은 주말이었다. 이틀 뒤로 예정되었던 협상은 을에서 대표를 임시로 바꾸는 바람에 다음 주 수요일까지 미뤄지고 말았다. 그렇게 조정한 뒤로 휴식 시간도 넉넉해졌다.

원서윤은 호텔에서 따로 운영하는 바닷가로 나가 일광욕을 즐길 생각이었다. 원서윤이 방에서 나가는데 뒤에서 민예원이 원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언니 설마 나 미워하는 거 아니겠죠? 어떡해요? 나는 언니가 정말 너무 좋은데. 우리 아이의 양어머니가 되어달라고 할 생각도 있단 말이에요.”

앞에서 걸어가던 원서윤이 걸음을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더니 1층으로 향했다.

붕.

핸드폰이 진동했다. 카톡 친구 요청이었다. 프사는 귀염뽀짝한 꿀꿀이였다.

원서윤이 프사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로 내려보니 이런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야.]

여승재였다.

원서윤은 바로 지워버리려 했지만 화면을 클릭하기도 전에 생각을 바꾸고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아빠가 남긴 별장을 위해서라면 현 소유주인 여승재에게 밉보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친구를 추가한 원서윤은 호칭을 [집주인]으로 바꿨다. 원서윤에게 그 집은 여승재와 엮이게 된 유일한 이유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별장의 소유권을 양도받으면 여승재와 철저히 연을 끊어내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붕.

여승재가 문자를 보내왔다.

[예원이한테 잘해. 너라는 친구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원서윤이 카운터로 가서 바닷가로 들어가는 출입증을 받느라 답장이 조금 늦었다.

[사모님의 환심을 샀다니 정말 황송하네요.]

핸드폰이 잠깐 조용해졌다.

여승재의 송금 문자가 떴다. 확인해 보니 무려 2,000만 원이었다. 인터넷으로 송금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보낸 것 같았다.

[예원이 아직 어리잖아. 임신까지 했는데 기분 잡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지금 돈으로 원서윤을 고용해 민예원과 놀아주며 좋은 친구가 되어 민예원을 기쁘게 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원서윤은 여승재의 카톡을 추가한 걸 후회할 정도였지만 여승재가 보내온 돈을 다시 돌려주지는 않았다.

[통도 크시네요. 근데 사모님이 고작 2,000만 원밖에 안 돼요?]

원서윤이 답장했다.

[얼마를 원하는데?]

여승재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원씨 가문 별장밖에 없어요. 바로 소유권 양도할 수 있어요?]

여승재는 더는 답장하지 않았다. 원서윤도 그제야 조금 조용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2,000만 원을 벌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원서윤은 요가를 마치고 점심에 보스턴 킹크랩 세트에 송로 버섯을 곁들어 만든 디저트를 시켜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원서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 3시가 채 되기도 전에 원장이 연속으로 걸어온 전화가 숨통을 조여왔다.

“원 선생, 지금 당장 짐부터 정리해요. 그쪽에 사람 보낼 테니까 그 사람들과 함께 경항시에서 열리는 의학계 소개팅에 좀 나가줘요.”

의학계 소개팅은 일 년에 두 번씩 열렸다.

상급 부서에서 꼭 달성하라고 지시한 지표였기에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일단 제쳐두고 소개팅하러 가야 했다.

원장도 불만이 많아 보였다.

“이번에 우리 병원에서 보내려고 했던 여자 의사는 심장외과의 조 선생님이었는데 혼전 임신해 버렸지 뭐에요. 그것도 짜증 나는데 임신 사실을 숨기려다가 오늘 유산 조짐이 보여서 들킨 거예요. 아니면 정말 우리 병원 체면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다니까요.”

다른 의사로 바꾸기엔 다들 수술 일정이 잡혀있어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원장의 머릿속에 잠시 한가해진 원서윤이 떠올랐다.

원서윤은 거절할 여지도 없이 상황에 쫓겨 소개팅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최고급 스위트룸.

민예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침대에 올려둔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다.

[민예원 씨. 행정과 주임 선생님과 외도한 사실은 숨겨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주임 선생님이 뱃속의 아이를 인정하게 해줄 거죠? 나도 이제 서른다섯인데 언제까지 내연녀로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한 시간 후.

원서윤은 프로젝트팀의 감사 인원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원 선생님,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희는 원 선생님에 대한 신임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프로젝트팀에서 잘리게 될 거예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원서윤은 감사 인원이 떠나는 걸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원장이 보내온 번호판을 찾으며 같이 소개팅에 참석할 남자 간호사를 찾아다녔다.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3, 4미터 떨어진 곳에 한 할머니가 바닥에 엎드린 채 이리저리 뒹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보였다.

“아이고 아파. 아이고 아파. 사람을 차로 치었으면 돈을 줘야지. 지금 당장 돈 주지 않으면 신고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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