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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언니, 설마 다 들은 거예요?”

민예원이 가장 먼저 원서윤을 발견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하얀 얼굴에는 긴장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여승재의 손을 꼭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괜찮아요. 오빠는 저랑 아기를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이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고요?”

원서윤은 마치 언제나 웃고 있는 인형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되물었다.

여승재는 민예원이 잡고 있던 손을 살짝 움츠렸다. 그러자 민예원은 그의 손을 더 꽉 쥐며 또박또박 말했다.

“사소한 일 맞아요. 그냥 잠깐 늦잠 잤을 뿐이잖아요. 다 오빠가 어젯밤에 절 못 자게 만든 탓이에요...”

“예원 씨, 본인의 위치와 역할을 제대로 이해 못 하신 것 같네요.”

원서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민예원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민예원은 순간 당황하며 여승재를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여승재는 민예원을 감싸듯 끌어안고, 원서윤을 바라보며 경고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원서윤 씨, 예원이는 서윤 씨와 달라요. 막 대학 졸업한 애한테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나랑 다르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여승재는 원서윤을 마치 더럽혀진 세상에 태어난 악마처럼, 어떻게 상처받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민예원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순수하고 깨끗한 천사였다는 듯이 말했다.

원서윤은 그저 민예원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될 운명이었다.

민예원은 겁에 질린 듯 여승재의 허리띠를 꼭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미안해요. 오빠 대신 사과드릴게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네? 언니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예원 씨, 사과할 것 없어요. 저는 예원 씨 덕분에 팀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화낼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고맙죠.”

원서윤이 덤덤하게 말하자, 여승재의 눈빛도 따라서 복잡해졌다. 그는 다시 경고하듯 말했다.

“원서윤 씨, 그만해요.”

원서윤은 민예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원 씨, 예원 씨도 협상 전문가로서 첫 협상의 중요성을 잘 알 텐데... 시간 관리를 못 해서 큰 실수를 저지른 건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도착하고 열렸다. 원서윤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민예원은 울먹이며 여승재에게 말했다.

“오빠, 정말 서윤 언니 말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사람인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여승재는 한없이 부드럽게 민예원을 안아주었다. 그 모든 로맨틱한 감정은 오로지 민예원에게만 쏟아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원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아릿한 이마를 문질렀다.

‘정말 춥네...'

경항시는 이미 여름이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한없이 춥게 느껴졌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움, 그 차가움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하지만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 비밀 유지 협약에 따라 주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호텔을 벗어날 수 없었다.

호텔 1층과 2층은 휴식 구역으로 각종 기본적인 오락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원서윤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조용한 바에 가서 술 한잔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3년 전, 피라드에 있을 때 그녀가 자주 과음하자, 스테판 에레 교수는 그녀를 금주 모임에 데려갔었다.

사람들 앞에서 모임 진행자가 그녀에게 이렇게 젊고 예쁜데 왜 술로 스스로를 괴롭히냐고 질문하자, 원서윤은 이 세계가 당신을 배신한다면, 맑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냐고 되물었었다.

결국 원서윤은 금주에 성공했지만, 그 대신 ‘미소’라는 가면을 쓰게 되었다.

스테판 에레 교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서윤아, 5년 동안 네가 잃어버렸던 건 바로 너 자신이었구나...”

바 안은 화려한 조명 아래 젊은이들이 활기차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원서윤은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너무도 술이 그리웠다. 한 번에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석 잔을 위스키와 섞어 마셨다.

술기운에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원서윤은 정말 예쁜 이목구비를 가졌던 터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첫 생리를 했을 때부터 끊임없이 당부하셨다.

“우리 서윤이는 이렇게 예쁜데 절대 나쁜 남자에게 속으면 안 돼. 알겠지? 아빠는 너 하나뿐이야.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도 못 살 거야.”

아버지는 늘 그녀가 잘못되면 자신과 엄마의 인생도 끝난다고 하셨다. 그럴 때마다 여승재는 그저 거만하게 웃으며‘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하...”

원서윤은 약간 취한 듯 바에 엎드려 있었다. 술집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매혹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멀지 않은 카우치 자리에서 정원준은 술집 여직원을 안고 기분이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직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정 대표님, 여기 포도 하나 드셔보세요.”

그녀는 입으로 포도를 물고 정원준에게 건넸다.

그때, 바 옆에서 원서윤이 취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데려가려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자 원서윤은 가차 없이 과일 접시에 있던 과일칼을 집어 남자의 팔에 깊숙이 찔렀다. 순식간에 피가 솟구쳤다.

정원준은 그 모습을 보고 욕을 내뱉으며 달려가, 남자가 신고하기 전에 사람들을 불러 그를 제압하고 원서윤을 끌어냈다.

2층, VIP룸에서 원서윤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움직이지 않고 부드러운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취할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정원준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했다면서요? 남편은 어디 있어요? 이렇게 술에 취해도 밖에 혼자 두는 남편을 만난 건가요?”

정책상 프로젝트 스텝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가족들은 가끔 생활용품을 들고 올 수 있었다.

원서윤은 정원준을 무시했다. 그녀는 여승재의 친구인 정원준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너무 직설적이고 입이 거칠다고 생각했었다.

정원준은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안 들려요? 아니면 정곡이 찔린 거예요? 내 생각엔 서윤 씨 남편도 분명 이혼을 원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정원준 씨 말처럼 저와 이혼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지훈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녀는 도망쳐 나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소파 등받이를 향해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조금 졸려졌다. 하지만 정원준은 끝없이 떠들었다.

“원서윤 씨. 죽은 척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예원 씨랑 승재는 진짜 천생연분이라고요. 승재는 예원 씨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요. 원서윤 씨와 만났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요. 이번에는 정말 모든 걸 걸었다고요.”

그는 계속해서 여승재와 민예원의 사랑을 얘기하고 있었다.

“승재가 매운 거엔 입도 못 댔던 거 기억해요? 하지만 예원 씨가 매운 걸 좋아한다고 하니 승재는 아내를 위해 억지로라도 매운 걸 먹게 됐어요.”

원서윤도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여승재는 나도 매운 음식을 좋아했던 걸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승재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아기돼지 캐릭터인 것도 알아요? 그거 예원 씨가 골라준 거예요. 참, 알고 있을 리가 없겠네요. 승재가 원서윤 씨의 카톡을 추가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기돼지 캐릭터?'

그건 원서윤이 유치원 때부터 좋아했던 캐릭터였다. 그녀는 심지어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 캐릭터와 결혼하고 싶다고 장난치기도 했었다.

“원서윤 씨!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본 적 없어요? 예전에 가난하단 이유로 무시당하였던 승재가 국제적인 경제 매거진에 이름을 올리는 부자가 될 줄 상상이라도 해본 적 있냐고요!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어요. 예원 씨는 승재의 가치를 알아봐 준 현명한 여자인 거고... 서윤 씨는 아마 별 볼 일 없는 멍청한 남자와 결혼했겠죠.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계속 숨기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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