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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원서윤은 밤새 깊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부모님은 매년 그녀의 생일을 두 번씩 챙겨주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음력과 양력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소원의 나무’를 선물해 주셨다. 그녀의 동생은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원서윤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동생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의 동생에게 언니를 낳을 때 원플러스원 행사처럼 덤으로 낳은 거라며 장난쳤었다.

그리고 원서윤의 아빠는 원서윤을 안으며 나중에 엄마 아빠가 나이 들면 원서윤을 잘 지켜줘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원서윤은 부모님의 장난에도 동생이 작은 가슴을 내밀고 주먹을 꼭 쥐며 큰 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나가 제일 좋아! 나중에 누가 누나를 괴롭히면 내가 그 사람 가만 안 둘 거야!”

돌이켜보니 그 장면은 모두가 웃음 지었던 행복한 순간이었다.

원서윤은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주삿바늘을 통해 그녀의 체내로 들어온 약물이 체온을 낮추고 소염작용을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 나오는 아픔과 서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홍수가 그녀를 잠식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추운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조차 차가웠다.

원서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난 5년 동안 그녀를 옥죄었던 차가움이 갑작스러운 온기로 인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를 품에 안아주는 듯한 따뜻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너무 오래 혼자여서 잊고 지냈던 그 감각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그 따뜻함에 몸을 기댔다. 졸린 눈을 반쯤 감으며 흐릿하게 말했다.

“오빠, 내일 아침에 꼭 깨워줘야 해. 고3은 진짜 힘들어...”

번개와 천둥이 경항시의 네온사인을 가르며 요란한 빗속에 도시를 삼켰다.

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들어와 원서윤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 하자, 원서윤이 물었다.

“어제 저를 여기에 데려다준 분이 누구죠? 밤새 함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카페 사장님이십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숙이고 원서윤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원서윤은 간호사의 말을 믿었다. VIP 진료실에서 나온 그녀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1층 카페로 내려갔지만, 사장님이 커피 원두를 구하러 외출 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계를 보니 첫 번째 협상 테이블에 앉기까지 약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원서윤은 바로 최고층 스위트룸으로 돌아가 회의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메이크업했다.준비하는 동안 민예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민예원이 처음 맡는 큰 프로젝트인 만큼 여승재가 아침 일찍부터 그녀를 데리고 가서 팀원들에게 인사시키고, 잘 부탁한다고 공을 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원서윤은 전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자신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편안한 니트 셔츠에 갈색 펜슬 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깔끔하게 틀어 올려 심플한 머리핀으로 고정했다. 귀 옆으로 자연스레 흘러내린 몇 가닥의 잔머리가 그녀를 한층 부드럽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엔 귀걸이를 좋아했지만, 귀가 찢어진 이후로는 더 이상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

예전엔 귀걸이를 좋아했지만, 귀가 찢긴 그 사건 후로는 더 이상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

“원서윤, 조금만 더 참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긴 집을 위해, 그리고 동생을 위해서. 곧 끝날 거야. 아주 곧, 모든 게 끝날 거야!”

그녀는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이때, 거울을 통해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성 속옷과 함께 빨간 카펫 위에 흩어진 몇 개의 콘돔 포장지가 보였다. 그리고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핑크빛 브래지어도 눈에 들어왔다.

평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녀는 떠나기 전 호텔 프런트에 청소 요청을 했다.

3층 회의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여승재가 복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서윤은 시선을 피하며 지나가려 했지만, 그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원서윤, 네가 없는 지난 5년 동안 내 삶은 정말 편안했어.”

그녀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래서?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야? 네가 잘 지내든 말든 관심 없어...’

만약 집 문제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승재와 아예 연을 끊고 살아갔을 것이다.

“예원이는 순수하고 착한 아이야.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고, 언제나 솔직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원서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 대표님, 사적인 얘기는 이쯤까지 하시죠. 아침부터 무슨 자랑인가요?”

‘밤새 너무 달렸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예원의 산부인과 의사로서 프로답게 조언을 덧붙였다.

“여 대표님, 예원 씨는 임신 초기라 과도한 활동은 자제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부부간의 밤 생활 말입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그녀가 아는 여승재는 결코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자기 통제를 잘하는 편이었다.

여승재의 자제력은 그가 원치 않으면 어떤 여자가 옷을 벗고 덤벼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민예원에게는 예외였다.

모든 일에서 여승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민예원을 보며 원서윤은 한때 자신도 그런 대접을 받기를 바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예원이라는 존재 덕분에 이제 그 모든 기대를 깨고 결국 꿈에서 깨어난 셈이었다.

원서윤은 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여승재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제가 한 말 그대로의 뜻인데요? 여 대표님, 제발 자제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팔을 뿌리치고 회의실로 들어가려 했다.‘밤새 너무 격렬하게 달리셨나? 정신머리까지 잃어버렸나 보네!’

“원서윤, 너...”

그는 그녀를 다시 막으려 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다수의 제약 회사 관계자들이 내려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자, 여승재는 곧 그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했다. 원서윤은 그 틈을 타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오전 9시 정각에 시작됐다. 계획에 따라 총괄인 민예원이 먼저 가격 협상에 나설 예정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주요 계약자인 이 협상은 첫 단계에서는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 제약 회사 측의 입장을 지켜보며 심리전을 펼치는 전략을 취했다.

보통 한 건의 사업이 완전히 체결되기까지 최소 열 번의 협상이 필요하며, 첫 회의는 향후 협상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계였다.

누가 심리적으로 우위를 점하느냐가 최종 승리의 열쇠가 될 수 있었다.

원서윤은 예전에 여승재와 함께 공부하며 협상에 관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본 지식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원서윤은 협상에 대해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9시 15분이 되어도 프로젝트 총괄 자리가 비어있자, 기다리던 제약사 대표 아델레이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첫 회의에 총괄이 지각이라니,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군요.”

15분이 지나도 연락이 닿지 않자, 제약사 대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원서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의사 선생님, 여기서는 선생님이 총괄의 비서 같은 역할인가요? 지각하시는 상사를 대변해 핑계라도 대야 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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