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윤은 밤새 깊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부모님은 매년 그녀의 생일을 두 번씩 챙겨주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음력과 양력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소원의 나무’를 선물해 주셨다. 그녀의 동생은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원서윤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그럴 때마다 엄마는 동생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의 동생에게 언니를 낳을 때 원플러스원 행사처럼 덤으로 낳은 거라며 장난쳤었다.그리고 원서윤의 아빠는 원서윤을 안으며 나중에 엄마 아빠가 나이 들면 원서윤을 잘 지켜줘야 한다고 당부했었다.원서윤은 부모님의 장난에도 동생이 작은 가슴을 내밀고 주먹을 꼭 쥐며 큰 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누나가 제일 좋아! 나중에 누가 누나를 괴롭히면 내가 그 사람 가만 안 둘 거야!”돌이켜보니 그 장면은 모두가 웃음 지었던 행복한 순간이었다.원서윤은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주삿바늘을 통해 그녀의 체내로 들어온 약물이 체온을 낮추고 소염작용을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 나오는 아픔과 서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홍수가 그녀를 잠식하려는 것처럼 말이다.“너무 추운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조차 차가웠다.원서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난 5년 동안 그녀를 옥죄었던 차가움이 갑작스러운 온기로 인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그녀를 품에 안아주는 듯한 따뜻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너무 오래 혼자여서 잊고 지냈던 그 감각이었다.그녀는 무심코 그 따뜻함에 몸을 기댔다. 졸린 눈을 반쯤 감으며 흐릿하게 말했다.“오빠, 내일 아침에 꼭 깨워줘야 해. 고3은 진짜 힘들어...”번개와 천둥이 경항시의 네온사인을 가르며 요란한 빗속에 도시를 삼켰다.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들어와 원서윤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 하자, 원서윤이 물었다.“어제 저를 여기에 데려다준 분이 누구죠? 밤새 함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여승재가 지켜보고 있어도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없었다.게다가 여승재 앞에서 민예원을 겨냥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원서윤을 향해 비아냥과 조롱을 퍼부었다.객석에 앉아 있는 여승재는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델레이드는 한층 더 도발적으로 나섰다.“의사 선생님, 민예원 총괄을 이 자리로 데려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본인이 나서는 게 어때요?”명백한 도발이었다. 시작도 되지 않은 첫 협상의 기 싸움이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원서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응수했다.“아델레이드 님, 경항시에 처음 오셨군요. 손님이라면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끝까지 지켜주세요. 저희가 사과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상대측 제약사는 해외에서 들어온 대규모 기업으로, 그들의 대표 아델레이드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원서윤 씨, 저도 당신네 나라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특히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고 하던데요.”아델레이드는 난소 낭종 제거 특효약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약사의 대표였다. 그는 이번 협상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그들을 찾아온 상황이라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며, 궁지에 몰린 것은 그들이 아니란 뜻으로 대놓고 이 상황을 비꼬았다.국민건강보험공단의 몇몇 임원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팀 내에서도 부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임원이 조용히 속삭였다.“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하다가, 민 총괄님이 오시기 전에 큰일나는 거 아니야? 민 총괄님은 여 대표님이 직접 키운 제자고, 협상 전문가잖아. 괜히 나서서 일을 그르치면 어쩌려고!”“맞아! 민 총괄님이 일부러 늦게 오시는 것도 전략의 일환일 텐데, 의사 선생님이 뭘 안다고! 이번 협상이 실패하면 다 그녀 책임이야!”“정말이지! 의료 쪽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업계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거 아닌가?”원서윤은 마치 덫에 걸린 듯했다.한발 물러서면 아델레이드가 약점을 잡고 문제 삼을 것이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민예원이 져야 할 책임
“언니, 설마 다 들은 거예요?”민예원이 가장 먼저 원서윤을 발견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하얀 얼굴에는 긴장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여승재의 손을 꼭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괜찮아요. 오빠는 저랑 아기를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이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거예요.”“사소한 일이라고요?”원서윤은 마치 언제나 웃고 있는 인형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되물었다.여승재는 민예원이 잡고 있던 손을 살짝 움츠렸다. 그러자 민예원은 그의 손을 더 꽉 쥐며 또박또박 말했다.“사소한 일 맞아요. 그냥 잠깐 늦잠 잤을 뿐이잖아요. 다 오빠가 어젯밤에 절 못 자게 만든 탓이에요...”“예원 씨, 본인의 위치와 역할을 제대로 이해 못 하신 것 같네요.”원서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민예원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민예원은 순간 당황하며 여승재를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오빠...”여승재는 민예원을 감싸듯 끌어안고, 원서윤을 바라보며 경고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원서윤 씨, 예원이는 서윤 씨와 달라요. 막 대학 졸업한 애한테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나랑 다르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여승재는 원서윤을 마치 더럽혀진 세상에 태어난 악마처럼, 어떻게 상처받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민예원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순수하고 깨끗한 천사였다는 듯이 말했다.원서윤은 그저 민예원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될 운명이었다.민예원은 겁에 질린 듯 여승재의 허리띠를 꼭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언니, 미안해요. 오빠 대신 사과드릴게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네? 언니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예원 씨, 사과할 것 없어요. 저는 예원 씨 덕분에 팀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화낼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고맙죠.”원서윤이 덤덤하게 말하자, 여승재의 눈빛도 따라서 복잡해졌다. 그는 다시 경고하듯 말했다.“원서윤 씨, 그만해요.”원서윤은 민예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예원 씨, 예원
정원준은 사이다 반박에 원서윤도 감탄했다. 여승재 친구라 그런지 정말 한마음 한뜻으로 여승재의 쉴드를 쳐주고 있었다.원서윤은 위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술기운이 갑자기 확 올라와서 그런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은 원서윤은 가슴에서 전해진 통증을 애써 참아내며 매혹적이지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원준 씨, 원준 씨가 여자였으면 민예원 씨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원서윤이 이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정원준은 원서윤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다시 곱씹었다. 그러더니 잘생긴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정원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원서윤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들며 욕설을 퍼부었다.“원서윤 씨, 한 번도 착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죠? 원씨 가문은 죄다 냉혈한 사람들뿐인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차갑기만 하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정원준이 원서윤의 뺨을 후려쳤다.원서윤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미소를 유지한 채 차가운 눈으로 약이 잔뜩 오른 정원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하지만 이내 누군가 문을 걷어차서 열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원준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원서윤은 주먹의 여파와 알코올의 작용하에 꽉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원서윤은 여자 향수 냄새가 풍기는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원서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역겹다는 듯 밀어냈다.“저리 가요. 나 이 향수 냄새 싫어요. 너무 센데. 우웩...”원서윤은 속에 들었던 걸 왈칵 토해냈다. 그것도 누군가의 몸에 토한 것 같았다. 그러자 냄새가 점점 더 역겨워졌다.원서윤이 거세게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더러워요. 냄새가 너무 더러워요.”“이게 누구때문인데. 원서윤, 좀 얌전히 있어.”여승재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술에 취한 원서윤은 잠깐이나마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 원서윤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
“원서윤이 마음 상해한다고?”페이스톡은 갑자기 스피커폰으로 바뀌었다.문이 아무리 방음이 된다고 해도 모든 소리를 걸러낼 수는 없었기에 방 안에 있는 원서윤은 여승재가 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민예원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맞아요. 서윤 언니가 축 처진 게 안색도 별로 안 좋더라고요. 선생님, 나와 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신경 쓰는 거 아는데 서윤 언니 진짜 나쁜 사람 아니에요.”민예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확 높아졌다.핸드폰 너머에 있는 여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피커로 책을 펼치는 소리와 토론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여승재는 회의하면서도 민예원이 보고 싶어 페이스톡을 걸며 사랑꾼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여승재는 전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5년 전의 여승재는 일을 위해서라면 몇 주든 몇 달이든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원서윤은 여승재가 너무 보고 싶어 못 참을 정도가 되어야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내 여승재의 근황을 물어봤다.하지만 여승재의 대답은 영원히 그 한마디밖에 없었다.[바쁘니까 귀찮게 하지 마.]“선생님, 아니면 내가 언니 불러올게요. 나와 아이를 봐서라도 좋은 말 좀 해주면 안 돼요? 그래야 언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요.”민예원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원서윤도 감탄할 정도였다.여승재가 코웃음 쳤다.“원서윤이 그래 달래?”여승재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민예원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그렇다면요? 들어줄 거예요?”“원서윤한테 직접 말하라 그래.”여승재가 도도하게 말했다. 민예원에게 보이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이때 방문이 열리고 원서윤이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는 비단결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아무렇게나 등 뒤로 풀어헤친 모습이 나른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거기다 깃이 넓은 태양 모를 썼는데 T 브랜드 한정판이었다. 모자 깃에 디자이너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봐서는 싼 가격이 아닌 것 같았고 돈이 있다
“할머니, 얼마를 원하시는데요?”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할머니 옆에 얌전하게 쪼그리고 앉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성숙하다기보다는 활발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젊음에서 나오는 활력인 것 같았다.“내... 내가 원하는 만큼 주겠다는 거야?”차에 치인 척 연기하던 할머니가 이 말에 깜짝 놀랐다.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개하기 시작했다.“할머니, 저는 간호사예요. 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는데 한 달 월급에서 국민건강보험을 빼면 한 90만 원 정도가 남거든요? 근데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한 달에 10만 원에서 12만 원 정도는 모을 수 있어요. 지금 카카오페이에 200만 원 정도 있는데 다 드릴까요?”“다... 다 가져도 돼?”할머니가 오히려 주춤했다.젊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으면 여기서 기다려줄래요? 월세방 빼면 몇십만 원은 더 나올 거예요.”“어디, 어디 사는데?”할머니가 젊은 남자를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젊은 남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숙소에서 지내죠. 가끔은 병원 바닥에서 자면 하룻밤은 대충 때울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아이고, 딱해라.”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더니 자애로운 눈빛으로 젊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머니에서 현금다발을 꺼냈다. 20만 원에서 40만 원은 되는 것 같았다.“아이야, 이리 와봐. 이건 할머니가 주는 용돈이야. 내 번호 저장하고. 앞으로 지낼 곳이 없으면 할머니 집으로 와.”“네, 감사합니다. 할머니.”젊은 남자가 할머니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옆에서 구경하던 원서윤은 젊은 남자가 자리를 뜨려는 할머니의 주머니에 받은 돈을 몰래 다시 넣는 걸 봤다.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더니 흩어졌다.원서윤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산부인과 원서윤이에요. 혹시... 방이연 씨?“네, 저 맞아요. 원 선생님 안녕하세요.”방이연이 고개
“사모님은 뭔가 내가 외도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원서윤이 당당한 눈빛으로 민예원을 바라봤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보여야 할 당황함과 부자연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리고 원서윤이 정말 외도 중이라고 해도 민예원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옆에 있던 방이연이 이를 보고 얼른 해명했다.“오해에요. 혹시 누나 친구들인가요? 사실 누나는 원장님 부름을 받고 자리만 채우기 위해서 온 거지 직접 오겠다고 신청한 건 아니에요.”극장은 핑크빛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강한 불빛보다는 따듯한 불빛을 선택했다.여승재와 민예원은 처음 들어왔을 때 원서윤 옆에 선 방이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키가 큰 남학생이 갑자기 나서자 몸이 약한 사모님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민예원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시울을 붉히며 여승재의 품으로 쏙 들어가더니 울먹이며 말했다.“선생님, 내가 너무 놀라니까 우리 아이까지 놀란 것 같아요. 얼른 손 좀 올려줘요. 아이가 무서워하고 있어요.”민예원이 여승재의 손을 잡아다 아직 밋밋한 아랫배에 올렸다.하지만 여승재는 원서윤이 방이연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방이연을 아래위로 훑었다.원서윤이 무의식적으로 방이연을 등 뒤로 당겨오더니 별다른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덤덤하게 말했다.“여 대표님, 사모님, 여기는 두분이 오실 곳이 아니에요. 별다른 용무가 없으면 먼저 나가시는 게 어떨까요?”여승재라는 이름은 경항시, 그리고 협상이라는 업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여승재의 언행은 막론하고 오늘 어떤 요리에 젓가락이 갔는지까지 주목하고 있었다. 여승재의 젓가락 한 번에 그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름을 날리는 경우도 파다했다.그런 여승재가 와이프를 데리고 의료 협회에서 주최한 소개팅 현장에 나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원서윤은 자신과 방이연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이 남자와 엮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싫었다.원서윤의 말에 여승재가 웃음을 터트렸다.“원서윤 씨가 언제부터
여승재가 얼굴을 원서윤의 머리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자 뜨거운 숨결이 원서윤의 귓가로 전해졌다.여승재의 웃음은 날카로우면서도 음침했다.“원서윤, 날 자극하지 않은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별장을 위해서라도 절대 대표님과 사모님을 욕보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원서윤의 미소는 여전히 눈부셨다.여승재는 짜증이 치밀어올라 표정이 어두워졌다.“원서윤, 너에게 나는 그 별장 말고 다른 용도가 없어?”“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는 남자에게 뭘 더 바랄까요?”원서윤은 이 상황이 정말 너무 우스웠다.5년간 여승재는 원서윤을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고, 쫓으면 털레털레 도망가는 강아지쯤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여승재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원서윤은 자존심과 존엄을 포기했고 그녀를 제일 사랑하고 아껴주던 가족까지 버렸다.하지만 여승재가 모르는 게 있었다. 무한한 열정으로 머릿속에 온통 여승재뿐이었던 원서윤은 5년 전 있었던 화재에서 죽어버렸다는 걸 말이다.지금의 원서윤은 인생에서 여승재라는 사람을 깔끔하게 지우고 다시 태어난, 과거에는 눈곱만치의 미련도 없는 원서윤이었다.“대표님, 비켜주실래요? 친구 데리고 병원 가서 진단서 끊어야 해서요. 만약 친구가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한다면 내가 증인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잘 준비하고 계세요.”원서윤의 말은 하나같이 가시가 돋쳐 있었다.여승재가 콧방귀를 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고작 저 남자 때문에?”“대표님이 사모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손찌검한 것과 같은 맥락이죠. 이연이 내 친구인데 이연이를 전적으로 고려하는 게 맞죠.”원서윤이 앞길을 막은 커다란 체구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방이연 옆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어깨동무하고는 천천히 극장을 빠져나갔다.여승재도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하지만 등 뒤로 민예원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를 위해서 주먹다짐할 생각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