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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저는 프로젝트팀에서 실무자예요. 그저 한 명의 스텝에 불과한 거죠.”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자, 밖에는 검은색 비즈니스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젝트팀의 총괄 담당자는 민예원 씨입니다. 그녀는 여 대표님의 아내고, 현재 임신 중이에요.”

마지막에 덧붙인 ‘임신 중’이라는 말에 병원장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원서윤을 차에 태워주려던 병원장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엉성하게 회진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떠났다.

원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혼자 미소 지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세상을 마주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원장은 그녀가 여승재와 은밀한 관계라도 있는 줄 알고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이었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원서윤은 부원장 승진을 바로 앞둔 셈이었다.

‘이게 뭐지? 뜻밖의 행운이라도 누리는 셈인가?’

차에 올라탄 원서윤은 피곤한 이마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차가 움직이자, 졸음이 쏟아졌다.

도착한 곳은 시청에서 마련한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 수십 명이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어떤 이들은 문에 기대 있었고, 어떤 이들은 계단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피라드에서 의료계에서 꽤 이름을 알렸던 원서윤이었지만, 경항시로 돌아온 그녀는 어린 나이 탓에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나 이곳처럼 경력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물결 속에 묻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였다.

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몇몇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이 스쳐 갔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원서윤도 개의치 않고, 휴대폰을 꺼내 피라드에 있는 스승님과 연락했다. 이름은 ‘스테판 에레’로 저장돼 있었다.

마침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탄식하며 말했다.

“스테판 에레 교수님이 곧 은퇴하신다던데, 정말 아쉬운 일이야. 그분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럴 기회가 없겠군.”

옆에 있던 조금 젊은 여자 의사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런데 들으셨나요? 스테판 에레 교수님의 비밀 제자가 경항시에 왔다고 하던데요. 만약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정말 큰 행운일 거예요.”

중년 남성은 더욱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자는 정말 전설이지. 스테판 에레 교수님조차 인터뷰에서 그 제자를 의학계의 기적이라고 했으니까. 타고난 의사라고 할 만큼 재능이 뛰어난 분이라던데, 나이가 적어도 40대는 될 거라던데요?”

여자 의사는 손가락으로 나이를 짐작하며 말했다.

원서윤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웃음이 나서 스승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스승님, 사람들이 저를 마흔 살 정도는 될 거라고 추측하네요?]

몇 분 뒤, 스승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유지훈이 나를 찾았었어. 서윤아,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유지훈’이라는 이름을 보자, 원서윤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손에 힘을 주어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며 웅성거림이 일었다.

민예원이 차에서 내렸다. 스무 살 갓 넘은 그녀는 의료계에서 국보급 대접을 받으며 온갖 칭송과 찬사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호텔 매니저도 그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의 체크인을 미뤄둔 상태였다.

이유는 단 하나, 민예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모두가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원서윤은 그런 분위기가 싫었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먼저 프런트로 가서 체크인하려 했지만, 민예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의사 선생님! 저랑 같이 지내면 안 될까요? 제가 어두운 게 무서워서요. 오빠가 제게 최고급 스위트를 잡아줬는데, 오빠도 바빠서 항상 함께 있진 못하잖아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네?”

‘애교도 많은 여자였네...’

원서윤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여승재의 ‘공주’가 삐쳐서 여승재에게 불평이라도 한다면, 그 집을 되찾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질 터였다.

“언니, 제발요!”

민예원은 그녀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하얗고 앳된 얼굴로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원서윤도 잠시 흔들렸다.

“좋아요. 예원 씨, 저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네!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면 금방 친해질 거예요!”

점심을 먹고 나자 모두가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오후에는 프로젝트팀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원서윤은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민예원이 여승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바람에 쉬기는커녕 졸음조차 깨졌다.

문밖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민예원의 웃음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오빠, 이 드레스 어때? 간담회 때 입고 가려고 하는데.”

“잘 어울리네.”

여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여운이 남았다.

민예원은 계속해서 오늘의 착장을 고민하며 말했다.

“아닌 것 같아. 이 드레스는 좀 나이 들어 보이고, 혹시 배가 드러나진 않을까?”

“걱정하지 마. 아직 임신 3주차잖아.”

여승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 인내심 넘치게 민예원을 달래며 칭찬했다. 그는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그녀에게 집중하는 듯했다.

원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대학 시절, 그녀가 급한 일로 여승재에게 전화를 걸어도 제대로 받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받더라도 짧게 몇 마디만 하고 곧바로 끊었던 그였다.

갑자기 생리통이 찾아와 원서윤의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화장실에 가려 했지만, 그녀가 묵는 방은 스위트룸의 작은 방이라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거실을 지나 민예원의 시야에 들어가야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문을 열려던 찰나, 민예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내가 누구랑 함께 지내게 됐는지 맞혀봐!”

원서윤은 손을 문고리에 얹은 채 멈칫했다.

민예원이 웃으며 말했다.

“원서윤 선생님이랑 함께 지내게 됐어! 내가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어!”

말에 묘한 여운이 섞여 있었다.

원서윤은 생리통에 아랫배가 계속 아프고, 이미 바지에까지 피가 번진 상태였다.

여승재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네가 먼저 같이 지내자고 한 거 맞아?”

‘역시나...’

원서윤은 등을 굽힌 채 아픈 배를 부여잡고, 차가운 문에 이마를 댔다. 그녀는 생리통이 심해서 생리 기간마다 고생하는 편이었다.

민예원은 즐겁게 말했다.

“당연하지! 오빠도 알다시피 난 어두운 걸 무서워하잖아. 내가 졸라서 같이 지내게 된 거니까 괜히 의심하지 마!”

“그래?”

여승재는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듯했다.

더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원서윤은 결국 문을 열고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

순간 영상 통화 화면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쾅!”

화장실 문을 닫자, 여승재는 비웃듯 말했다.

“딴 속셈이 있겠지...”

“오빠, 언니한테 그런 말 하지 마!”

민예원은 애교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여승재는 부드럽게 답했다.

“알았어. 이제 회의하러 가야 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어도 될까?”

통화를 끊는 것조차 미안한 티를 내며 민예원의 감정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마무리했다.

원서윤은 자신을 비웃었다. 예전에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 때, 늘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한 사람이 바로 원서윤 자신이었다.

간담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원서윤의 생리통은 여전히 심했다. 호텔에서는 생리대 같은 기본 물품은 갖춰져 있었지만, 진통제는 외부 약국에 가서 사야 했다.

원서윤은 민예원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알리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회사에 있을 줄 알았던 여승재가 약국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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