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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원서윤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아들? 그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잖아!]

밤이 깊어지자, 원서윤은 아버지가 늘 경항시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난한 산골 출신이었던 원서윤의 아버지는 경항시에 살면서부터 세상과 연결된 느낌이 든다고 했었다. 그는 이곳에서는 그저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다고 했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살았던 그 시절엔 배부르게 먹는 것도 힘들었다고 하셨었다. 그래서인지 성공하신 후로는 항상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곤 했었다. 그러면서 어린 원서윤을 안고, 빈틈 하나 없이 꽉 찬 냉장고를 가리키며 꽉 찬 그 냉장고가 그에게는 삶에 대한 만족과 현재에 대한 안심을 안겨준다고 말했었다.

원서윤은 아직도 그 시절 아버지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서윤아, 봐봐. 꽉 채워진 이 냉장고는 아빠를 든든하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줘. 경항시에 살면서 가득 찬 냉장고가 있고, 우리 네 식구가 화목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아빠는 더 바랄 게 없어...”

‘아버지... 저도 지금 경항시에 살고 있고, 제 냉장고도 이렇게 가득 차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이 도시가 정 없게 느껴질까요? 왜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것만 같죠?’

원서윤은 냉장고 문을 모두 열어둔 채 그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

낡은 병원 기숙사라 전기 용량이 부족한 듯, 냉장고가 과부하로 돌아가며 플러그 쪽에서 탄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원서윤은 멍하니 추억여행에 잠겨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쾅쾅쾅!”

광고지로 도배된 현관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렸다. 발길질 소리도 함께 들렸다. 원서윤은 찡그리며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자, 여승재가 문턱에 서 있는 원서윤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 그는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전원을 내려 냉장고가 과부하로 타오르는 것을 막았다.

“쾅! 쾅! 쾅!”

여승재는 냉장고가 덜컹거릴 정도로 힘을 주어 냉장고 문을 하나씩 닫았다.

원서윤은 살짝 미소 지으며 문에 기대어 말했다.

“날 찾아온 건 생각이 바꿨어요? 원씨 가문 본가 저택을 팔기로 결심했나요?”

“원서윤, 내 앞에서 웃지 마! 보기만 해도 역겨워!”

여승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모습에 원서윤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집을 돌려... 팔아주세요. 그러면 우린 다시는 얽히지 않을 거예요.”

“마치 지난 5년 동안 네가 사라졌던 것처럼, 다시 인연을 끊겠다고?”

오늘의 여승재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지? 네가 그렇게 날 싫어하고, 혐오한다며? 그렇다면 내가 불에 타서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거 아닌가?’

여승재는 그녀가 무엇을 의아해하는지 알아차린 듯 잠시 멈칫하다가, 목을 가다듬고 건조하게 말했다.

“성원그룹이 너희 병원의 제약 회사 협상 프로젝트를 맡게 됐어. 국민건강보험과의 협업인데, 예원이도 오늘부터 프로젝트팀에 합류해. 바로 너 위층에 살게 될 거야.”

‘역시... 그런 이유였구나.’

원서윤은 입가에 냉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집을 팔아주세요. 그러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날게요. 당신의 아내를 ‘방해할’ 일도 없을 겁니다.”

원서윤은 ‘방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비꼬는 말은 그녀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여승재는 짜증이 난 듯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원서윤이 감기 기운으로 두어 번 기침을 하자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원서윤은 감기에 걸려 고생 중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여승재는 결국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원이가 임신한 뒤로 담배를 끊었어.”

“그래요.”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임신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녀는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여 대표님, 그 집은...”

“원서윤, 나랑 얘기할 때 집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어?”

“네.”

원서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승재는 주먹을 꽉 쥐며 속에 원망이 맺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 왜 이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여승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와 예원이는 같은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야. 예원이는 갓 대학을 졸업해서 경험이 부족해. 보조 역할이 필요할 것 같아. 네가 적임자야. 이번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면 집 매매 건을 고려해 볼게.”

“국민건강보험과 협업하는 건데, 여 대표님은 참여하지 않으시나요?”

원서윤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승재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원이가 성원그룹에서 빠르게 고위직에 올라가려면 직접 큰 프로젝트를 맡아야 해.”

다시 말해, 이번 협상은 여승재가 원칙을 무시하고 예원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마련한 특별한 기회였다. 겉으로는 예원의 보조이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책임을 떠안아야 할 위치였다.

여승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거래할래? 말래?”

“여 대표님,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렇게까지 원칙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군요.”

원서윤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요. 제안 수락할게요. 이제 돌아가세요.”

여승재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만약 언젠가 민예원의 가족이 여승재에게 적이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까? 나를 대했던 것처럼 그들을 무너뜨릴까? 아니, 그럴 리 없을 거야.’

원서윤은 그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희생할 거라고 믿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음 날 아침.

원서윤이 병원에 도착하자 병원장에게 불려 갔다.

상급 기관의 지침에 따라, 이번 해외 제약 회사와의 협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직원들은 모두 하루 내로 맡은 업무를 정리하고 지정된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이는 부정 방지를 위한 조치였다.

원서윤은 빠르게 일 처리를 끝냈다. 점심이 되기 전, 담당 환자들의 케이스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병원장은 감탄하며 말했다.

“원 선생, 피라드에서의 성과가 눈에 띄는군요. 이번 국민건강보험 협업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부원장 자리는 원 선생이 거의 확정일 겁니다.”

부원장 승진 소식은 병원장이 오늘 아침 알려준 것이었다. 기존 부원장이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두 명의 임시 후보가 올라왔다. 한 명은 50대의 경력은 많지만 능력은 평범한 심장내과 과장이었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원서윤이었다.

병원장은 원서윤을 지지했지만, 병원 내부의 의견은 달랐다. 많은 이들이 원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나이가 너무 어려 반발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원 선생, 이번 기회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기회죠. 여 대표님이 추천해 준 덕에 프로젝트팀에 들어갔으니, 나이 문제도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병원장은 원서윤을 직접 배웅했다. 그는 이야기를 돌리며 은근히 물었다.

“원 선생, 나를 병원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족이라 생각해 봐요. 내가 할아버지라면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죠? 우리 원 선생과 여 대표님은 꽤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아니요. 전혀 친하지 않습니다.”

원서윤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지만,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겉으로는 온화하고 친근해 보였지만, 자세히 겪어보면 그녀의 일상은 늘 단조롭고, 열정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병원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여 대표님이 부원장 자리를 위해 원 선생을 도와준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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