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윤의 어머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크든 작든,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집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원서윤의 아버지는 당시 100만 원을 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발전이 덜 된 한면도에서 경항시로 올라와 사업을 시작했다.때마침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고, 두 분 모두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덕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첫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그 시절에는 집값도 비싸지 않아서 몇천만 원이면 송주에 땅을 사고 번듯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집값도 함께 치솟았다.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부동산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거품이 꺼지면서 큰 폭으로 내려갔다.덕분에 원서윤은 원씨 가문의 집을 다시 사들여 경항시에 뿌리를 내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그런데...“여기서 뭐 하는 거야?”본가 마당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원서윤은 익숙한 키 큰 실루엣을 발견했다. 마당 구석에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직접 심었던 복숭아나무는 이제 말라 죽어 있었다.달빛이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들이 뒤엉킨 사이로 여승재의 몸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여승재의 손가락 끝에 빨간 담뱃불이 번졌다. 봄바람이 불어오자, 여승재가 툭툭 털어버린 담뱃재가 바람에 흩날렸다.그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진료실에서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이었다.원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오빠... 아니지... 여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오랜만이에요.”“5년이 지났어... 원서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담배 연기를 뚫고 나온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거친 감정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원서윤이 기억하는 소년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실망이겠지만,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있어서 미안해요.”원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마치 정말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시간 속에서 스쳐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태연하고 무덤덤했다.두 사람 사이의 침묵 속에서 마른 나뭇가
그동안 원서윤은 분명 결혼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혼으로 끝났다.“쾅!”페라리 문이 거칠게 닫히고, 여승재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네 바퀴가 일으킨 먼지가 그녀의 얼굴에 흩날렸다. 원서윤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부동산 중개인은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며칠 후, 중개인이 원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원서윤 씨, 정말 죄송합니다. 송주 쪽의 그 빌라 지역은 전부 여 대표님께서 매입하셨습니다. 경항시 내에서 다른 빌라를 찾으시는 게 어떨까요?”원서윤은 거절했다.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어머니가 입원한 정신병원에 있었다. 담당 의사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원서윤 씨, 환자분의 마음에 나신 병은 마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저희 전문가 의견으로는, 가능하다면 환자분이 예전에 지내시던 곳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입니다.”“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 집에서 안 좋은 일이 많았던 터라, 어머니가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이는 원서윤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걱정이었다.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환경이 가장 중요합니다. 환자분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발작하실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니, 그곳이 병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원서윤은 병원을 나와 차를 몰고 순환 대교를 몇 번이나 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성원그룹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오빠, 나 그냥 KFC 먹고 싶어. 같이 가자. 오늘 오픈 행사라 할인도 있잖아!”민예원이 여승재의 팔짱을 끼고 정문에서 나왔다. 밝은 미소를 띤 그녀는 무언가를 여승재에게 보여주고 있었고, 여승재는 다정한 미소로 응대하고 있었다.차 안에서 원서윤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봤다.여승재는 잠시 그녀의 방향을 흘끗 본 듯했다. 그러고는 민예원과의 거리를 더 좁히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기를 가진 몸인데, 건강식으로 먹자.”“오빠가 해산물 파스타 해주면 안
원서윤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아들? 그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잖아!]밤이 깊어지자, 원서윤은 아버지가 늘 경항시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가난한 산골 출신이었던 원서윤의 아버지는 경항시에 살면서부터 세상과 연결된 느낌이 든다고 했었다. 그는 이곳에서는 그저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다고 했었다.가난한 시골에서 살았던 그 시절엔 배부르게 먹는 것도 힘들었다고 하셨었다. 그래서인지 성공하신 후로는 항상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곤 했었다. 그러면서 어린 원서윤을 안고, 빈틈 하나 없이 꽉 찬 냉장고를 가리키며 꽉 찬 그 냉장고가 그에게는 삶에 대한 만족과 현재에 대한 안심을 안겨준다고 말했었다.원서윤은 아직도 그 시절 아버지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서윤아, 봐봐. 꽉 채워진 이 냉장고는 아빠를 든든하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줘. 경항시에 살면서 가득 찬 냉장고가 있고, 우리 네 식구가 화목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아빠는 더 바랄 게 없어...”‘아버지... 저도 지금 경항시에 살고 있고, 제 냉장고도 이렇게 가득 차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이 도시가 정 없게 느껴질까요? 왜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것만 같죠?’원서윤은 냉장고 문을 모두 열어둔 채 그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낡은 병원 기숙사라 전기 용량이 부족한 듯, 냉장고가 과부하로 돌아가며 플러그 쪽에서 탄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원서윤은 멍하니 추억여행에 잠겨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쾅쾅쾅!”광고지로 도배된 현관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렸다. 발길질 소리도 함께 들렸다. 원서윤은 찡그리며 정신을 차렸다.문을 열자, 여승재가 문턱에 서 있는 원서윤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 그는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전원을 내려 냉장고가 과부하로 타오르는 것을 막았다.“쾅! 쾅! 쾅!”여승재는 냉장고가 덜컹거릴 정도로 힘을 주어 냉장고 문을 하나씩 닫았다
“저는 프로젝트팀에서 실무자예요. 그저 한 명의 스텝에 불과한 거죠.”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자, 밖에는 검은색 비즈니스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프로젝트팀의 총괄 담당자는 민예원 씨입니다. 그녀는 여 대표님의 아내고, 현재 임신 중이에요.”마지막에 덧붙인 ‘임신 중’이라는 말에 병원장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원서윤을 차에 태워주려던 병원장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엉성하게 회진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떠났다.원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혼자 미소 지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세상을 마주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병원장은 그녀가 여승재와 은밀한 관계라도 있는 줄 알고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이었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원서윤은 부원장 승진을 바로 앞둔 셈이었다.‘이게 뭐지? 뜻밖의 행운이라도 누리는 셈인가?’차에 올라탄 원서윤은 피곤한 이마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차가 움직이자, 졸음이 쏟아졌다.도착한 곳은 시청에서 마련한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 수십 명이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어떤 이들은 문에 기대 있었고, 어떤 이들은 계단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피라드에서 의료계에서 꽤 이름을 알렸던 원서윤이었지만, 경항시로 돌아온 그녀는 어린 나이 탓에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나 이곳처럼 경력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물결 속에 묻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였다.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몇몇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이 스쳐 갔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원서윤도 개의치 않고, 휴대폰을 꺼내 피라드에 있는 스승님과 연락했다. 이름은 ‘스테판 에레’로 저장돼 있었다.마침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탄식하며 말했다.“스테판 에레 교수님이 곧 은퇴하신다던데, 정말 아쉬운 일이야. 그분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럴 기회가 없겠군.”옆에 있던 조금 젊은 여자 의사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저도 그래요!
민예원은 여승재를 보자, 부드러운 얼굴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두어 걸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걱정하지 말라니까. 언니가 나랑 아기를 잘 챙겨주고 있어. 일 때문에 바쁜 거 알아.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때마침 지나가던 프로젝트팀의 핵심 인원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는 반가운 듯 웃으며 여승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여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하는데, 너무 잘 됐습니다.”여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별말씀을요. 예원이도 이번에 처음으로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됐으니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여승재는 협상 계에서 20대에 이름을 알린 유일한 전문가답게,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위엄을 드러냈다. 그가 예의상 건넨 한마디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했다.원서윤은 옆에서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아랫배의 통증이 극심해지며 입술이 떨렸지만, 그녀는 여승재가 사업적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프로젝트팀의 핵심 인원들조차도, 여승재의 앞에 서는 그들의 노련한 언변 기술이 무색해진 듯 아무 말도 못했다.“네. 여 대표님, 예원 씨가 총괄하시는 프로젝트인 만큼, 저희 선배들이 성심껏 돕겠습니다.”팀 내 지위가 가장 높은 중년 남성이 거듭 말했다.그러자 여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고맙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아닙니다. 별말씀을요. 하하...”그들은 웃음과 함께 땀을 훔치며 자리를 떠났다.민예원은 여승재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 정말 고마워.”민예원이 애교를 부리자, 공기 중에 달콤한 향기가 퍼지는 듯했다.원서윤은 생리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발끝까지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여 대표님, 그리고... 예원 씨, 저는...”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여승재가 먼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민예원의 뺨을 쓰다듬으
“원서윤 씨, 정말 원서윤 씨 맞아요?”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정원준이 원서윤을 붙잡았다. 그녀는 피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차가운 엘리베이터 벽에 부딪혔다.그녀의 손에서 약봉지가 떨어졌다. 정원준은 바닥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 비웃듯이 말했다.“원서윤 씨, 5년 전에 그렇게 무정하게 떠나버리더니, 이제 와서 왜 돌아온 거예요? 돌아온 의도가 뭐냐고 묻는 거예요! 외국에서 일이 잘 안 풀렸던 건가요? 승재에게 도움이라도 받으려고 온 거예요?”정원준은 여승재와 친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원서윤 씨, 승재는 원서윤 씨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함부로 다룰 사람이 아니에요. 5년 전엔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이제는 더는 원씨 가문이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원서윤 씨가 떠나면서 말 한마디 안 남긴 게, 그게 승재에게 얼마나...”“거기까지만 하세요. 지금은 아주 행복해 보이더군요. 제가 직접 봤어요.”원서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정원준 씨, 저도 결혼했어요. 아들도 있고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로서 축하 인사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원서윤 씨...”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진 정 대표가 그녀의 말에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화가 났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황하며 두 사람을 지켜봤지만, 원서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녀는 정원준의 손을 뿌리치고 떨어진 약 봉투를 줍지도 않고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정원준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원서윤 씨, 당신 가족이 승재에게 진 빚은 평생 갚을 수 없을 거예요!”원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여승재가 제게 진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허망하게 잃어버린 아버지의 목숨, 어머니의 건강, 그리고 생사조차 모르는 동생까지... 이 모든 것을 여승재가 갚을 수 있을까?’원서윤은 호텔을 나와 시청 담당자와 함께 약국으로 향했다. 정
원서윤은 밤새 깊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부모님은 매년 그녀의 생일을 두 번씩 챙겨주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음력과 양력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소원의 나무’를 선물해 주셨다. 그녀의 동생은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원서윤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아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그럴 때마다 엄마는 동생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의 동생에게 언니를 낳을 때 원플러스원 행사처럼 덤으로 낳은 거라며 장난쳤었다.그리고 원서윤의 아빠는 원서윤을 안으며 나중에 엄마 아빠가 나이 들면 원서윤을 잘 지켜줘야 한다고 당부했었다.원서윤은 부모님의 장난에도 동생이 작은 가슴을 내밀고 주먹을 꼭 쥐며 큰 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누나가 제일 좋아! 나중에 누가 누나를 괴롭히면 내가 그 사람 가만 안 둘 거야!”돌이켜보니 그 장면은 모두가 웃음 지었던 행복한 순간이었다.원서윤은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주삿바늘을 통해 그녀의 체내로 들어온 약물이 체온을 낮추고 소염작용을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 나오는 아픔과 서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홍수가 그녀를 잠식하려는 것처럼 말이다.“너무 추운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조차 차가웠다.원서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난 5년 동안 그녀를 옥죄었던 차가움이 갑작스러운 온기로 인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그녀를 품에 안아주는 듯한 따뜻함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너무 오래 혼자여서 잊고 지냈던 그 감각이었다.그녀는 무심코 그 따뜻함에 몸을 기댔다. 졸린 눈을 반쯤 감으며 흐릿하게 말했다.“오빠, 내일 아침에 꼭 깨워줘야 해. 고3은 진짜 힘들어...”번개와 천둥이 경항시의 네온사인을 가르며 요란한 빗속에 도시를 삼켰다.다음 날 아침, 간호사가 들어와 원서윤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 하자, 원서윤이 물었다.“어제 저를 여기에 데려다준 분이 누구죠? 밤새 함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여승재가 지켜보고 있어도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없었다.게다가 여승재 앞에서 민예원을 겨냥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원서윤을 향해 비아냥과 조롱을 퍼부었다.객석에 앉아 있는 여승재는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아델레이드는 한층 더 도발적으로 나섰다.“의사 선생님, 민예원 총괄을 이 자리로 데려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본인이 나서는 게 어때요?”명백한 도발이었다. 시작도 되지 않은 첫 협상의 기 싸움이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원서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응수했다.“아델레이드 님, 경항시에 처음 오셨군요. 손님이라면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끝까지 지켜주세요. 저희가 사과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상대측 제약사는 해외에서 들어온 대규모 기업으로, 그들의 대표 아델레이드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원서윤 씨, 저도 당신네 나라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특히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고 하던데요.”아델레이드는 난소 낭종 제거 특효약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약사의 대표였다. 그는 이번 협상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그들을 찾아온 상황이라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며, 궁지에 몰린 것은 그들이 아니란 뜻으로 대놓고 이 상황을 비꼬았다.국민건강보험공단의 몇몇 임원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팀 내에서도 부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임원이 조용히 속삭였다.“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하다가, 민 총괄님이 오시기 전에 큰일나는 거 아니야? 민 총괄님은 여 대표님이 직접 키운 제자고, 협상 전문가잖아. 괜히 나서서 일을 그르치면 어쩌려고!”“맞아! 민 총괄님이 일부러 늦게 오시는 것도 전략의 일환일 텐데, 의사 선생님이 뭘 안다고! 이번 협상이 실패하면 다 그녀 책임이야!”“정말이지! 의료 쪽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업계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거 아닌가?”원서윤은 마치 덫에 걸린 듯했다.한발 물러서면 아델레이드가 약점을 잡고 문제 삼을 것이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민예원이 져야 할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