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다시 만난 잔상 속의 그 남자
다시 만난 잔상 속의 그 남자
작가: 지아

제1화

5년 후.

원서윤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그를 다시 마주했다.

“3주 정도 되셨네요. 아이가 안정될 때까지는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원서윤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여승재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전처럼 설레지도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시간은 그녀에게 그를 잊을 기회를 주었고, 그사이 깊게 새겨진 상처는 흉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끝내 미련은 사라졌다.

진료 침대에 누워 있던 젊은 여자는 아직 어린 나이여서인지 얼굴에 기쁨보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큰 눈에 눈물이 글썽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옆에 서있는 여승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여승재는 여전히 늠름하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190cm가 가까운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는 예전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듯했다.

그 모습에 원서윤은 문득 그 뜨거웠던 여름날을 떠올렸다.여승재가 옥상에 서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그날, 그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 대가로 원서윤은 자신의 소중한 18살의 청춘을 바쳤지만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결국 여승재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여승재는 한때 ‘원서윤, 너랑 관계하는 거랑 너를 사랑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락을 끊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었다.

경항시에 돌아온 원서윤이 만난 여승재는 이미 한 여자를 평생의 동반자로 맞이한 유부남이었다.

그가 평생의 동반자로 맞은 여자는 꽃다운 나이에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소녀에 가까웠다. 언뜻 보면 스무 살 남짓의 나이로 한창 예뻤던 원서윤의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했지만, 다른 부분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승재가 선택한 그 여자는 사랑을 주기보다는 보호받으면서 자란 온실 속의 화초 같았다. 그리고 ... 두 사람은 이제 한 생명을 책임지는 부모가 되었다.

“오빠, 나... 임신했대. 막상 들으니 좀 무섭기도 해...”

그녀는 부드럽게 여승재의 품에 기대며 그의 손을 아직 불러오지 않은 배 위에 올려놓았다.

여승재는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속삭였다.

“무서워할 것 없어. 내가 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뭐라고? 내가 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원서윤은 속눈썹이 살짝 떨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여승재가 마냥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었구나... 나한테만 따뜻한 말을 해주지 않았을 뿐이었을지도...’

그녀는 의사 가운에 가려진 손목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그곳에는 흉터 위로 새겨진 나비 문신이 있었다. 그리고 문신 아래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화상 자국이 숨어 있었다.

여승재는 아내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그런 모습에 그의 아내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오빠, 나 임신한 거지, 폭탄을 안고 있는 건 아니야. 너무 긴장하지 마!”

여승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정말 소중해...”

두 사람은 다정하게 서로에게 기대며 원서윤의 곁을 지나쳐 나갔다. 진료실을 나가기 직전, 여승재의 아내가 걸음을 멈추고 원서윤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혹시 성함 여쭤봐도 될까요? 진료받는 내내 저희가 조금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이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저는...”

원서윤은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여승재가 불친절한 말투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원서윤이 그의 아내를 위협할까 봐 경계하는 태도였다.

“무슨 소리야? 너만큼 예쁘진 않아. 가자.”

“오빠!”

여승재의 말에 그의 아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당돌하게 걸어와 원서윤의 손을 잡았다.

“의사 선생님, 제 이름은 민예원이에요. 좀 흔한 이름이죠? 저희 오빠는 항상 제 이름도 저처럼 귀엽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도 저 좀 예쁘게 봐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름...’

마침 원서윤도 이름에 관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원서윤... 밝을 서, 높을 윤... 정의롭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며? 참 가증스럽다. 너희 집안 모두가 역겨워.'

원서윤은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심장은 이미 무감각해진 듯했다.

사랑이 남긴 건 그저 끝나지 않는 미련과 공허한 상처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마치 언제 어느쪽으로 떨어져 누구에게 상처를 줄지 모르는 날카로운 칼날 아래에 세 사람이 가지런히 서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원서윤은 상처받는 사람이 민예원은 아닐 것이라고 직감했다. 민예원은 여승재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존재였으니까...

원서윤은 침착하게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예원 씨, 출산 준비를 위해 산모 수첩과 같은 여러 가지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필요한 서류로는 신분증과 남편과의 가족관계증명서가 있을 겁니다.”

‘가족관계증명서’라는 단어가 나오자, 민예원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원서윤은 그 모습을 지나친 듯, 진료실 출구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다음 환자분이 기다리고 계시네요.”

그러고는 대기 환자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여승재와 민예원은 서로에게 기대며 진료실을 떠났다.

원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승재는 더 이상 예전에 그녀가 알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경항시는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난 기업가가 되어 있었다. 협상 전문가로서 그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입지를 굳혔다.

3년 전, 그는 단 일주일 만에 경향 시청을 대변해 외국 무역 계약을 유리하게 이끌어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북유럽 거래 상대는 협상 우위에 있다고 믿고 온갖 무리한 요구와 비아냥으로 그를 압박했었다. 심지어 ‘검은 머리 원숭이는 우리의 애완동물일 뿐’이라며 조롱을 던지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처참히 패배했을 때, 여승재는 기자들 앞에서 담담히 말했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패자는 말이 많고, 승자는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죠.”

이 사건으로 여승재는 협상 업계의 전설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원솔루션’을 창립했고, 설립 1년 만에 IPO에 성공하며 ‘성원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 후로는 반도체, AI, 그리고 의료 3D 프린팅과 같은 최신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다.

여승재는 이제 국제적인 경제 매거진 랭킹에도 이름을 올린 신흥 자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여승재에게 원서윤은 단지 과거의 흔적일 뿐이었다.

퇴근 후, 원서윤은 유지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돌아왔다는 소식 들었어. 우리 한번 볼까? 밥 한 번 사고 싶어...]

[너와 나는 다시 만나 밥을 먹기엔 애매한 관계 아닐까? 너희 부모님도 우리가 만나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야.]

잠시 후 유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 사람은 만났어?]

원서윤은 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 차에 탄 후 바로 송주로 향했다.

과거에 원씨 집안은 파산했고, 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고,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은 실종 상태였다. 사람들은 동생이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원서윤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동생의 행방을 찾아왔다.

이번에 경항시에 돌아온 이유도 중 하나는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모은 돈으로 옛집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