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윤아의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금 남자친구랑 사귄 지 4년이 다 되어 가요. 오빠가 저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걸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저를 남자친구 덕에 성공했다고 비웃는 게 싫어요. 제 힘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언니가 보기엔, 제 이런 생각이 잘못된 걸까요?” 사실 진윤아가 그 이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녀가 했던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 남자친구랑 사귄 지 4년이 다 되어 가요.”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였다는 사실. 그런데 나와 문지성이 헤어진 지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이다. 이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 머릿속은 온통 문지성과 함께했던 시간들로 가득 찼다. 그때, 문지성은 정말 나에게 무척 차갑게 대했다.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내 메시지에 답장도 없었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몇 번씩이나 회사에 찾아갔을 때도, 문지성은 나를 문전박대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계속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또다시 문지성에게 돈을 요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가 문지성의 회사에 찾아가 난동을 부렸던 걸까?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해서 문지성을 화나게 했을까? 분명 그 모든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다. 문지성은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지성에게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왜 그때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이 끝없는 냉대에 지쳐 헤어지자고 했을 때, 문지성은 또 왜 그렇게 화를 내며 마치 내가 먼저 자기를 배신한 것처럼 굴었던 걸까?’ ‘사실은 본인이 나를 배신했으면서...’ ‘결국 이 배신자는 오히려 나를 비난하며, 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굴었어!’ 그리
나는 마음속으로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바로 답을 얻게 되었다.공인중개사가 문지성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말씀하신 인테리어 업체들을 알아봤습니다. 각각 스타일이 다르지만, 신혼집을 꾸미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여기입니다.”그 순간, 내 가슴이 조여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나의 문장이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문지성... 곧 결혼하다니...’문지성은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예전에 우리가 결혼 후의 삶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보였던 냉정하고 무관심했던 태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나는 문지성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다 잊고,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억눌린 분노와 억울함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버틸 수 없어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문득 계약서를 한 번 더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이것은 부동산 매매 계약서가 아닌, 담보 대출 계약서였다.서명할 때 문지성의 차가운 표정을 보고 서둘러 사인을 했고,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문지성 같은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잘못된 것이다.“문 대표님, 이 계약서가...”“문제라도 있나?”계약서의 변화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문지성의 차가운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우리가 서명한 건 부동산 매매 계약서여야 하는데, 이건...”문지성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서류를 덮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의 눈빛에는 한층 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내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나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그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이 집을 가리키는 건지, 나를 가리키는 건지 헷갈렸다.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이가 가장 큰 상처를 준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정말 맞았다.우리 사이의 모든 친밀한 기억들은
나는 내가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뭐라고요?”“돈 좀 달라고. 아빠도 병원 가서 치료도 받고 약도 타야 해. 너에게 돈이 있다는 거 알아. 큰 회사에서 그렇게 오래 일했으니, 저축도 꽤 있을 거 아냐.”아버지는 아까까지만 해도 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 그 말투는 이제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변해버렸다. 마치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아버지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아버지가 갚아야 할 돈은 50억이에요, 50원이 아니라고요! 제가 어디서 그 돈을 마련했을까요?”그 집은 190억의 가치가 있었지만, 부동산 매매 계약이 아닌 담보대출 계약이었기에 결국 내 손에 쥔 건 고작 50억여 원뿐이었다.그 돈으로 겨우 빚을 갚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나를 속일 생각 하지 마라. 돈 더 있는 거 알아.”봄날의 따스한 날씨에도, 나는 마치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이게 바로 내 아버지의 본모습이었다. 마치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자연스럽게 나에게 돈을 요구했고, 내가 그 돈을 얼마나 힘들게 벌었는지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없어요. 더 이상 줄 돈 없다고요.”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멍이 들어 파래진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생긴 멍이었는데, 지금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이미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불쌍한 척 연기를 하며 나의 연민을 구하고 있었다.“우리 착한 딸아, 네가 아빠한테 이렇게 무정할 수 있니? 아빠 지금 돈 한 푼 없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 병원 치료받을 돈도 없는데 말이야?”“그건 제 일이 아니에요.”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돈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갑자기 분노에 차서 거실에 남아 있던 유일한 멀쩡한 가구를 발로 걷어찼다.‘쾅’ 하는 소리에 외할머니가 깜짝 놀라 방에서 서둘러 나오며 소리쳤다.“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하재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 일자리는 내게 매우 중요했다. 우리 가족이 살아갈 유일한 경제적 기반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잃을 수 없었다.외할머니에게는 솔직히 말할 수 없어, 난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유미선 부장은 부서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나를 곧장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유미선의 지나치게 심각한 표정을 보고 내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부장님, 회사가 저를 해고하려는 건가요?”유미선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어쩔 수 없이 내 입장을 주장해야 했다.“이전에 지각한 건 제 잘못 맞아요. 변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회사에 가져다준 이익이 얼만데...”‘이렇게 해고당하는 건 정말 억울해!’“누가 유나 씨를 해고한다고 했어요?”“네?”나는 순간 멍해졌다.“유나 씨 지금 무슨 상상을 한 거예요? 유나 씨를 부른 건 좋은 소식이 있어서예요.”유미선은 책상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들어 내게 건넸다.“이건 내가 소동진 팀장에게서 받은 건데, 이 사업은 다시 유나 씨에게 맡겨졌어요!”뜻밖의 전환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그분도 동의한 건가요?”“소 팀장이 동의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건 윗선의 결정이니까, 우리는 그대로 따를 뿐이에요.”유미선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위쪽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첫 인물은 문지성이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문지성이 나를 도울 리가 없지.’“부장님...”나는 더 물어보려 했지만, 유미선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마라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사업이 다시 유나 씨의 손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해내야 해요!”유미선은 나를 위해서 좋은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유미선의 사무실을 나오면서도 전혀 실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내 어깨를 짓눌러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제의 근원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윤아 씨, 할 말 없어요?”진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건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이 계획서와 자료는 회의실로 가져오기 전에 진윤아 씨가 정리한 겁니다. 당시 제가 확인했을 때, 진윤아 씨는 계획서와 자료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나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진윤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계획서와 자료를 진윤아 씨가 잃어버린 겁니까?”도건하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윤아에게 꽂혔다. 진윤아는 더욱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이 사업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했고,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준비했다. 만약 실수로 문제가 생긴다면, 진윤아라고 해서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진윤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연신 저었다.“아, 아니에요... 저는 계획서와 자료를 팀장님께 드렸고, 팀장님에게도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당시 유미선 부장이 회의를 서두르며 우리를 재촉했고, 나는 시간이 촉박해 회의실로 바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계획서와 자료를 다시 확인할 시간이 도저히 없었고, 서로 믿고 회의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진윤아 씨, 제가 계획서와 자료를 확인하는 걸 봤어요?”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진윤아는 겁먹은 듯 고개를 숙이며 확실히 확인했다는 말도 아니고,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실상 인정한 셈이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날카로워졌다. 나는 마치 수백 개의 가시가 내 등에 꽂힌 듯한 느낌이었다.팽팽한 긴장 속에서, 문득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대체 무슨 일인가요?”문지성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의 키는 크고 체격은 당당했으며, 잘생긴 얼굴에는 냉담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
내 피부는 희고 민감해서 한 번 생긴 자국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점 때문에 문지성이 나를 애지중지했지만, 이제는 나조차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한 번 흘깃 보고 지나갈 뿐이었다.내가 카드를 집어 들고, 카드 뒷면에 붙어 있는 메모의 비밀번호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문 대표님, 이 카드에 정말 돈이 들어 있는 거 맞죠?”“내가 하 팀장을 속일 것 같아?”문지성의 표정은 극도로 불쾌해 보였다. 그의 말에 카드 안에 돈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 마음은 마치 누군가가 움켜쥐고 후려친 듯 아팠고,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히 카드를 챙겼다.“문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문지성은 비웃으며 말했다.“참으로... 돈을 위해선 어떤 모욕도 참아내고, 돈을 위해선 어떤 것도 포기하는구나. 정말 탐욕스럽고 역겹네.”나는 무표정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돈이 필요하니, 문지성의 말에 변명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의 모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에 내가 겪은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빚쟁이들 중 누가 나를 쉽게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가.”문지성은 마침내 내 무신경한 태도에 격분한 듯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돌아섰다.문을 나서자마자 간신히 유지했던 강인한 모습과 차가운 태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며 피로와 서러움이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마주친 사람은 안석현이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배려와 걱정이 담겨 있었다.“괜찮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저으기도 했다. 안석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늘 회의실에 있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 프로들의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네 잘못이 아니야.”그것은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가 들은 유일한 따뜻한 말이었다.“날 믿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네.”“널 믿을 이유가 충
뒤를 돌아보니 진윤아가 문가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굳은 미소를 지었다. “문 대표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잠깐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지성의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문지성의 감정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나는 서류를 품에 안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서늘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짧은 순간 강렬했다가 점점 희미해지며 멀어져 갔다.멀어져 가는 내 발걸음 소리 사이로 진윤아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점심에 우리 나가서 파스타 먹을까요?” “그래.”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 속에는 다정함과 애정이 가득했다.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자리하지 않도록, 애써 털어내려 했다.... 하루 종일 진윤아는 나에게 붙어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진윤아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언니, 이따가 제 남자친구가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우리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문지성과 진윤아와 함께 밥을 먹다가는, 나는 먹은 음식 한입도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초대는 고맙지만, 윤아 씨와 남자친구의 달콤한 데이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서둘러 서류를 챙기고, 진윤아가 나를 붙잡기 전에 빠르게 사무실을 나섰다.차를 몰고 가는 중,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잠시 차를 세워 기다렸지만, 전혀 교통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인네, 당신이 우리 마누라를 쳤으니 당연히 돈을 내고 치료비를 내야지. 돈도 안 내고 발뺌할 셈이야?”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그때 들려온 대화가 이러했다.고급차 한 대 앞에서 우아한 차림의 할머님이 서 있었고, 그 앞에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남자가 서서 그녀를
“대체 나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게 무슨 속셈이냐고?”문지성은 나를 바라보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는 의심과 탐색이 가득했고, 그 속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 마치 나를 주먹으로 한 대 세게 후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의 시선은 말없이 나의 미약한 존재를 조롱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길에서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고, 집으로 가자고 하셨어요. 여러 번 거절했지만...”“또 그 말이구나.” 문지성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또’라니? 무슨 말이지?’“하유나, 이게 재밌기라도 하니?”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워 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천천히 내뿜으며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했던 거 기억나지?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이미 나는 너에게 충분히 관대하게 대하는 거야. 더 이상 선 넘지 마.”‘지금 이 사람은 나를 믿지 않는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니, 더 이상의 해명은 아무 의미도 없겠어.’“지금 바로 나갈게요.” 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더 이상 해명하는 건 불필요하다고 느꼈고,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그 순간, 주방에서 할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야, 매운 거 잘 먹지? 할머니가 고추를 좀 더 넣을게!” 할머님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설렘이 묻어 있었다. 내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됐어.” 문지성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약간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여기 있어도 돼. 하지만 명심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잘 구분해. 난 윤아가 너와 나 사이에 어떤 오해도 하지 않길 바라니까.”그때 진윤아가 화장실에서 나와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언니, 오빠, 두 사람...” 문지성은 바로 한발 물러서서 진윤아에게 다가가며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