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성은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외투를 벗어 내 머리 위로 던지듯 얹었다. “입어.” 옷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꼭 쥔 손가락 마디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마워요.” 문지성은 말없이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려다 그가 갑자기 멈춰 서자 얼떨결에 멈췄다. 하지만 문지성이 왜 멈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안석현이랑 얽힌 거야?” ‘얽힌다’는 단어가 너무 불쾌하게 들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문지성의 추궁에 대답하지 않았다. 문지성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내 턱을 살짝 잡았다. 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안석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상류 사회로 올라가려는 또 다른 동아줄을 잡으려는 거야? 하유나, 정말 자존심도 없는 거야?” 그는 내 턱을 놓고, 손가락을 옷에 비비며 닦았다. 마치 내가 더럽다는 듯. 내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가슴속은 마치 뭔가에 세게 물린 듯 아파왔다. “이건, 문 대표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 같은데요.” 문지성의 눈빛은 금세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문 대표님께서 이렇게 직원의 사생활까지 신경 써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데요. 하지만 안석현 씨가 어떤 사람이든 그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고, 제가 위로 올라가는 ‘동아줄’을 잡든 말든 그건 문 대표님이 걱정하실 일이 아닌 것 같네요.” 내 속에 쌓인 답답함은 어디에도 풀 곳이 없었다. 이성은 내가 문지성의 부하 직원으로 있는 이상 절대 고개를 들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내 전 남자친구일 뿐만 아니라, 현재 내 상사이기도 했다. 하
진윤아가 갑자기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는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사진 한 장이 내 눈앞에 들어왔다.그 순간, 진윤아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그 사진 속 문지성과 진윤아는 나란히 서 있었고, 문지성은 고개를 살짝 돌려 진윤아를 바라보는 듯했다. 아니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햇빛 때문인지, 문지성의 눈빛은 유난히 부드럽게 보였다. 그리고 이 사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뒤에 이어지는 사진들도 하나같이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가끔 진윤아가 혼자 찍힌 사진도 있었고,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진윤아는 갑자기 가볍게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도 이거랑 똑같은 게 있어서... 제가 잘못 가져왔네요. 언니, 미안해요.”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나에게 간절하게 사과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자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다. 목소리가 잠겼지만 겨우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가져가요.” “사실 상관없어요. 이 카메라도 꽤 잘 찍히니까, 언니도 써봐요. 나중에 우리 사진만 따로 모아두면 헷갈리지 않을 거예요.” 진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보기가 너무도 괴로웠다. “아니에요. 이건 유나 씨와 남자친구의 추억이잖아요. 그냥 가져가는 게 좋겠어요.” “언니, 저한테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요. 그냥 써도 돼요!” 진윤아는 손을 흔들며 문지성에게 기대어, 자신만만하고도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이건 바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태도였다. 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의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방에 급히 넣고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자리를 떴다. “석현 씨 좀 보고 올게요.”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등 뒤로 느껴지던 시선이 나를 놓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 시선이 사라진 듯했다. 그 순간 나도 안석현과 마주쳤다.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홍조는 어느 정도 사라졌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차 안의 나머지 세 사람도 깜짝 놀랐다. 문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운전 제대로 하는 거 맞아?” 내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이미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른 상태였는데,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쏘아붙이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셈이었다. 나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럼 문 대표님이 직접 운전하실래요?” 내 말을 듣고 나서 문지성도 한동안 딱히 대꾸하지 못했다. 다만 진윤아를 조심스레 끌어당기며 제자리에 앉혔다. 이 일이 있고 나서야 진윤아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안석현이 손을 뻗어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안석현에게 미소를 지었다. 차 안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 무의식적으로 백미러를 보니, 진윤아는 여전히 문지성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고, 문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먼저 안석현의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석현은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 차로 돌아갔다. 이때 내 귀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얘기하고 싶으면 밤새도록 얘기하지 그래? 그러면 바로 출근할 수 있겠네.” 나는 백미러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문지성과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문지성의 말 속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액셀을 밟자 차는 빠르게 움직였다. 뒤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빨리 이 차에서 내려놓고 싶었다. 20분 걸릴 거리를 10분 만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 아저씨가 나와 우리를 확인했다. 이곳의 보안은 매우 철저했기 때문에 입주자 확인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비록 나는 더 이상 이곳의 거주자가 아니지만, 한때는 그랬으니 경비 아저씨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 문지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방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벤틀리 차 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꺼내 진윤아에게 문자를 작성했다. [갈게요...] 그러나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진윤아가 방에서 나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언니, 아직 안 갔네요!”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언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뭘 도와줘요?” 진윤아는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문 대표님에게 무슨 일 생긴 거예요?” 내 마음속에 걱정하고 있긴 하지만, 가능한 한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옷자락을 쥐고 잠시 망설이더니, 아주 천천히 잘 접힌 종이를 내게 건넸다. “이건 뭐예요?” 진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은 부끄러워서 빨개졌고, “이거 가지고 나가면 알 거예요. 저는 지금 나갈 수가 없어서... 부탁해요.” 말을 마친 진윤아는 방을 슬쩍 바라보며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이상하네...’ 나는 의심하면서 핸드폰을 보았는데, 택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1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았다. 아래층에 있는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 오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폰을 쥐고 밖으로 나섰다. 마트에 도착해 종이를 펼쳤을 때, 그 위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수치심이 밀려왔다. ‘진윤아는... 어떻게... 나한테...’ ‘그러니까 오늘 밤, 둘이 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것도 모자라, 나한테 피임도구까지 사 오라고 한 거야?!’ 나는 종이를 꼭 쥐었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내 가슴속은 마치 누군가가 세게 움켜쥐고 있는 듯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 결국 나는 마트를 빠져나와 길가에 섰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느
나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다시 나왔을 때, 뜨거웠던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식어 있었다.불만이든, 원망이든, 변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과거는, 끝난 것이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지성과 진윤아의 모습도 다 잊고, 나는 서재로 향했다.지금 나는 빨리 PPT를 준비해야 했다. 모레가 바로 고객과 업무 협상을 직접 해야 하는 날이라, 이 PPT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원래는 오늘 끝냈어야 했지만, 그 알 수 없는 파티 때문에 나도 밤늦게까지 미루고서야 비로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내가 일에 몰두하니 방금까지의 고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그저 지나간 실패한 감정에 불과하고, 무슨 생각을 할 필요가 있겠어?’‘일이 중요하고, 돈 버는 게 중요하지!’나는 마치 에너지를 얻은 듯 이 일에 몰두했고, 그렇게 한참을 바쁘게 일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미완성된 PPT가 아직 3분의 1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분량을 회사에 가서 마저 하기로 하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안석현을 만났다.그가 내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곧 고객과 협상하러 간다고 해서, 이거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어.”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고객 회사에 대한 모든 자료였고, 굉장히 자세했다.이건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도움이었다.“고마워!”“뭘, 얼른 가서 바쁘게 일 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약간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유나야,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을까?”“그래.”자료를 받은 덕분에 기분이 좋아 한 번에 대답해버렸다.잠시 멈춘 뒤, 나는 덧붙였다.“내가 살게.”안석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좋아.”나는 뒤돌아 엘리베이터에 들어갔지만, 눈가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바로 문지성과 진윤아였다. 진윤아는 무언가 말이 있는 듯 발걸음을 재촉하여 나를 향해 걸어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지성과 헤어진 지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를 만나게 된 곳이 회사 부서 내 팀 빌딩 자리일 줄은 몰랐다.우리 회사에서 내가 속한 부서는 매달 팀 빌딩을 한다. 이번에는 부장님이 각자 배우자나 연인을 데려와서 커플로 참석하라고 했다. 결혼한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를, 연인이 있는 사람은 연인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문지성은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타고난 냉정하고 고귀한 기운이 그의 모든 행동에 묻어 났다. 그가 나타난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50대 중반인 부장 유미선은 문지성을 보며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치며 크게 외쳤다. “유나 씨! 저분, 유나 씨 남자친구 맞죠? 전에 제가 유나 씨 핸드폰에서 사진으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부장님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온 사무실이 고요해졌다.“저, 그게...”문지성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자, 숨이 턱 막혔다....“그만 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네 가족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니까.”헤어질 때 문지성이 남긴 경고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문지성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나를 에워쌌다. 동료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부서에 백 명이 넘는 직원 중에 나만 오래도록 ‘노처녀’로 남아 있었으니까.마음속의 씁쓸함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급히 해명했다.“아니에요, 저분은 제 남자친구 아니에요. 부장님, 착각하신 거예요...”“어? 그럼...”그때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진윤아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죄송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저 사람은 제 남자친구예요. MS그룹의 CEO예요. 평소 인터뷰나 뉴스에 자주 나와서 부장님이 낯이 익으신 거죠.”진윤아는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인턴이었고, 일을 시
‘그러니까... 앞으로 문지성과 진윤아가 내 눈앞에서 벌이는 애정행각도 자주 보게 된다는 뜻?’그런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내 가슴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내가 부장님께 얘기해서 이 사업을 1팀으로 넘기게 할까?”“공과 사는... 나도 잘 구분할 수 있어.”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버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어머니, 병상에 누워 비싼 약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외할머니, 그리고 매달 몇십만원씩 나가는 집세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돈을 포기할 여유 따위는 내게는 사치였다.안석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온종일 일해서 온몸이 피곤했지만,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날카로운 잘생긴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고, 급박한 전화벨 소리에 겨우 잠에서 깼다. 안석현이었다.[지금 어디야? 문지성이 직접 MS그룹 대표로 우리 회사에 왔어.]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일어나서 서둘러 회사로 달려갔다.회의실에 도착하고 나서 문을 열자마자 문지성이 날카롭게 나에게 한 마디 던졌다.“이번 사업 책임자인 팀장이 출근 시간도 못 지키세요?”지금 우리 회사 대표, 상무, 부장, 그리고 우리 팀 직원들 모두가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지금 문지성의 말은 분명 나를 향해, 내가 책임자로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였다.“문 대표님이 농담도 하시네요. 정시에 출근하는 건 우리 회사의 기본 원칙입니다.”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서 그에게 보여주었다.“현재 8시 30분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이번에는 문지성이 예상 외로 더 이상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참석한 사람들에게 사업 계획서를 나누어 주었고, 나 역시 한 부를 받았다.“이번 사업 책임자가 누구시죠?”모두들 문서를 진지하게 보고 있던 중, 문지성의 질문에 순간 멈추고 나를
문지성은 부드러운 눈길로 품 안의 진윤아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네, 그렇게 하시죠.”예상했던 대답이었다.문지성은 원래 사람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지만, 진윤아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회사의 내부 모임까지 참석할 수도 있는데, 이 남자...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한 대표님, 문 대표님, 저는 업무가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문지성과 진윤아의 애정 넘치는 모습이 너무 눈꼴셨다.그 자리를 피하려고 사람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자, 진윤아가 급히 나를 뒤쫓아왔다.“언니, 잠시만요. 저 일과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그 후로 하루 종일 진윤아는 나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나는 리조트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퇴근할 때쯤 나는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안석현이 내 피곤한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오늘 저녁 회식은 그냥 핑계 대고 빠지는 게 어때?”나도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문지성은 지금 회사의 ‘갑’이고, 나에게 회의 시간 엄수조차 꼬집었던 그에게 괜히 눈에 띄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회식 장소는 회사 맞은편의 ‘운향재’였다.안석현과 나는 약속 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대부분 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언니!”진윤아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하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언니랑 안 대리님은 항상 붙어 다니시네요. 혹시 두 분 연애 중이신 거 아니죠?”진윤아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동료들도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요. 둘 다 싱글인데, 완벽한 조합이네.”“석현아, 남자니까 먼저 고백해야지. 설마 유나 씨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회사 분위기는 언제나 그랬다. 일할 땐 진지하고, 퇴근 후엔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나는 별생각 없이 변명하려 했는데, 안석현이 먼저 나서서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