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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끝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끝에서 시작된다
작가: 과일주스

제1화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지성과 헤어진 지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를 만나게 된 곳이 회사 부서 내 팀 빌딩 자리일 줄은 몰랐다.

우리 회사에서 내가 속한 부서는 매달 팀 빌딩을 한다. 이번에는 부장님이 각자 배우자나 연인을 데려와서 커플로 참석하라고 했다. 결혼한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를, 연인이 있는 사람은 연인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문지성은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타고난 냉정하고 고귀한 기운이 그의 모든 행동에 묻어 났다. 그가 나타난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50대 중반인 부장 유미선은 문지성을 보며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치며 크게 외쳤다.

“유나 씨! 저분, 유나 씨 남자친구 맞죠? 전에 제가 유나 씨 핸드폰에서 사진으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부장님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온 사무실이 고요해졌다.

“저, 그게...”

문지성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자, 숨이 턱 막혔다.

...

“그만 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네 가족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니까.”

헤어질 때 문지성이 남긴 경고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문지성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나를 에워쌌다.

동료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부서에 백 명이 넘는 직원 중에 나만 오래도록 ‘노처녀’로 남아 있었으니까.

마음속의 씁쓸함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급히 해명했다.

“아니에요, 저분은 제 남자친구 아니에요. 부장님, 착각하신 거예요...”

“어? 그럼...”

그때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진윤아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

“죄송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저 사람은 제 남자친구예요. MS그룹의 CEO예요. 평소 인터뷰나 뉴스에 자주 나와서 부장님이 낯이 익으신 거죠.”

진윤아는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인턴이었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반짝이는 큰 눈망울과 귀여운 얼굴에, 웃을 때마다 양쪽 입가에 패이는 보조개가 참 사랑스러웠다.

‘아, 문지성은 이런 타입을 좋아하는구나.’

“어머, 실수했네요. 오해할 뻔했어요. 벌주 마실게요!”

분위기는 다시 유미선 부장 덕분에 밝아졌다.

유미선은 나를 힐끗 보며 화제를 돌렸다.

“윤아 씨 남자친구가 이렇게 멋있으면, 주위에 다른 젊고 유능한 사람들도 많겠죠? 기회 되면 우리 유나 씨에게도 남자친구 좀 소개해줘요.”

오랜 동료들답게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장단을 맞췄다.

“맞아, 유나 씨는 우리 부서에서 최고 미녀잖아요!”

“유나 씨는 뭐든 다 갖췄는데, 딱 하나 남자친구만 없다고요! 당연히 소개해줘야죠!”

진윤아는 내 쪽을 보며 문지성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웃었다.

“오빠, 친구들 많잖아요! 인색하게 굴지 말고 유나 언니한테 소개 좀 해주세요.”

“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안하는데도 문지성은 말이 없다가, 진윤아가 한마디 하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역시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내 마음은 무척 쓸쓸해졌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나는 진심을 다해 문지성을 사랑했다. 이 차가운 남자의 마음을 간신히 녹였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 둘 사이에서는 매사에 늘 내가 문지성에게 맞춰야만 했다.

그리고 연인관계도 너무나 비참하게 끝났다.

연인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고 서로 대등해야 건강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나는 마치 애완견이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문지성에게 맞추다가 결국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개처럼 비위 맞추며 애써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방 안의 분위기는 계속 달아올랐지만, 나는 가능한 한 존재감을 감추며 조용히 빠져나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진윤아가 술잔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언니, 아까 부장님이 저를 언니에게 맡긴다고 하셨잖아요. 전 아직 회사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지성이 다가와 진윤아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는 나를 보며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왔다.

“윤아 술을 못 마셔요. 내가 흑기사 할게요.”

‘흥, 문지성도 태생이 냉혈한은 아니네. 그저 나에게만 매정했을 뿐.’

문지성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평온한 척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윤아 씨 잘 챙길 거니까.”

나는 예의상 술잔을 들어 함께 마신 후,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문지성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말했다.

“정말 유감이네요. 문 대표님이 직접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상습 도박꾼이었고, 빚쟁이들은 집 앞부터 큰길까지 줄을 설 정도였다.

그 당시 문지성의 집안은 한마디만 하면 그 빚쟁이들이 우리 아버지의 빚을 탕감해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우리 집안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지금도... 문지성은 한마디만 하면 그 빚쟁이들이 다시 우리 집 문 앞에 찾아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고, 이 남자는 내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아는 순진한 애야. 윤아에게 손대지 마.”

문지성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그가 연기를 내뿜자 내 얼굴 쪽으로 연기가 몰려왔다.

나는 매캐한 연기에 기침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몸을 구부리며 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걸 보자, 문지성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피우던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발밑에 던져버렸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절대 윤아에게 말하지 마.”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도 낮고 어두운 톤으로 나에게 명령하는 듯했다.

문지성이 당장 우리 회사에서 나를 쫓아내지 않은 것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걱정 마세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

문지성이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설 틈도 없었다.

그는 차가운 손으로 내 턱을 꽉 쥐었다.

“하유나, 너 같은 사람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어?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문지성은 힘을 꽉 주었고, 그의 손에 잡힌 턱뼈가 부서질 듯 아파왔다.

이 순간 내 육체적인 고통도 컸지만, 그보다 심적 고통이 더 컸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꾹 참으며 최대한 평온한 척했다.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진윤아 씨가 의심할지도 몰라요.”

문지성은 정말 진윤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돌아섰다.

그의 강인한 등줄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견디지 못하고 결국 두 줄기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무려 6년이었다.

처음 3년은 내가 온 세상의 비웃음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문지성의 뒤를 쫓아다녔고, 그다음 3년은 문지성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청춘과 나 자신을 온전히 문지성이라는 남자에게 바쳤다.

하지만 내 결말은...

진윤아를 대할 때, 문지성의 눈빛엔 사랑이 담겨 있었고, 말투와 행동에서조차 따뜻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비교해보니, 지난날 내가 보낸 6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한바탕 웃음거리 같았다.

“여기 서서 얼어 죽지 말고, 밖에 추워.”

언제 온 건지 모르겠지만, 안석현이 내 뒤에 와서 자신의 외투를 내 어깨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차 타.”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 우리 집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안석현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

안석현은 나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대학 동창이었다.

오늘 저녁 그렇게 많은 사람 중, 나와 문지성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안석현뿐이었다.

안석현은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그럼 앞으로는...”

“진윤아 씨랑 같이 일하는 거지, 문지성과 일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안석현은 망설이며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회사가 MS그룹과 함께 리조트 사업을 추진한다고 들었어. 그 사업은 MS그룹이 주도하고, 우리 2팀이 전담해서 협력할 거라는데.”

‘MS그룹... D시의 부동산 업계 거물... CEO... 문지성...’

내 마음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래서 앞으로 문지성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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