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기억 속에서 성유리는 언제나 우울하고, 고지식하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혼 후에야 그는 전 아내가 사실은 온화하고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성유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박한빈 씨, 우리 이미 끝난 사이잖아.”
Lihat lebih banyak더군다나 박한빈은 지금 자신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렸고 앞으로는 감옥에 가야 할 수도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다시금 고개를 뚝 떨궜다.그러다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섭습니까?”그 물음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손가락이... 계속해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성유리는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무섭지는 않아요.”“제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때쯤, 두 사람은 이미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방 키가 들려 있었다.지금 박한빈은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기에 방금까지 잡고 있던 성유리의 손도 이제는 놓아졌다.그러므로 성유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돌아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박한빈의 손짓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런 성유리를 바라보다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그 순간, 성유리는 그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렇게 문이 닫혀버렸다.박한빈은 방 키를 꽂지도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툭 던졌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에 키스했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졌다.하지만 박한빈의 입맞춤이 마치 달래듯 부드럽게 이어지자 그녀도 긴장이 점점 풀렸다.그러다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과 혀를 천천히 훑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의 거친 숨소리와 몸을 맞댄 채 점점 뜨거워지는 체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몇 번이고 그는 더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주었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남아 있는 흔적을 닦아 주었다.성유리는 방금 전부터 숨
박한빈의 눈은 계속해서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그러다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하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걱정하시는 겁니까?”“네. 그 사람들이 혹시라도 괴롭히지는 않겠죠?”성유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물었다.“제가 증언해 드릴게요. 그때는... 염우섭이 먼저 손을 댔어요. 그리고 당신은 저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잖아요.”박한빈은 말하는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괴롭히지 않을 리가 없죠. 게다가 염우섭 씨는 아직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마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저는 지금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앞으로 재판을 받아야 할 수도 있고요. 어쩌면...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박한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성유리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요?”“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그녀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으며 박한빈은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 그 감정을 눌러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성유리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제가 감옥에 가면 성유리 씨는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기다릴게요.”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는데 그렇게 단호한 말에 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왜죠?”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거기에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어 더욱 애틋해 보였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며 문득 자신이 너무 잔인한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이제라도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한빈 씨의 아내잖아요. 아니에요?”그녀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했다.박한빈은 성유리와 눈을 맞추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마치 엄청난 좋은 소식을 들은 것처럼 정말 행복하고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표현숙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급하게 문을 지탱하고 있던 삽을 치웠다. 이윽고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박 선생님, 걱정 마세요. 이 일은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윤도준은 사실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박한빈 같은 큰 인물이 여기 오고부터 사건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래도 윤도준은 그저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염우섭 씨는 어떻게 처리될 겁니까?”박한빈이 되묻자 윤도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사건은 저희가 이미 다 파악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를 반드시 엄중히 처리하겠습니다.”“엄중히 처리한다는 건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죠?”박한빈이 다시 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박한빈의 눈빛에 윤도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염우섭 씨가 시도한 건 성추행입니다. 형법에 따라...”“성추행?”박한빈이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혹시 오해가 있으신 거 아닙니까? 그때 염우섭 씨는 성유리를 강간하려고 했고 심지어 살인까지 시도했습니다.”“살인이요?”“네. 살인.”박한빈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윤도준은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그래서 윤도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박 선생님, 그 사람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 말씀처럼 처벌을 한다면...”“만약 그때 제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염우섭 씨는 계획에 성공했을 겁니다. 그때 결과가 어땠을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그...”“걱정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변호사와 함께 해결하겠습니다.”박한빈은 벌떡 일어나며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이런 쓰레기는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그의 말에 윤도준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고 박한빈의 시선이 느껴져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렇죠. 박 선생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너희들 눈이 있으면 좀 봐! 그놈이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내 아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 내가 그놈을 감옥에 집어넣을 거야, 감옥에서 평생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평온하게 의자에 앉아 뜨거운 물 한 잔을 손에 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표현숙은 그녀 옆에 앉아 있었고 안색은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게다가 밖에서는 여전히 염우섭의 엄마가 욕을 퍼붓고 있었다.“그년은 원래부터 여우였어.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년이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얼굴이 그렇게 예쁘면 누구라도 꼬실 수 있을 텐데. 우리 우섭이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년이 꼬시지도 못하니까 그 뭣 같은 남자랑 손잡고 우리 아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 거야!”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고 분노에 찬 욕설들이 마구 쏟아졌다.그때, 듣다 못 한 표현숙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밖에서 여자의 소리가 멈추었다.표현숙은 손에 호미를 쥐고 잔뜩 힘을 줘서 문을 열었는데 그 모습은 정말 위협적이었다.“꺼져!”표현숙이 문을 열며 딱 한 마디 하자 여자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이미 그 여자가 멈춰선 걸 보고 표현숙은 호미를 들고 달려들려고 했지만 염우섭 엄마는 깜짝 놀라 급히 뒤돌아 뛰어갔다.하지만 주위에는 그들을 원숭이 보듯 구경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표현숙은 그냥 옆에 있는 물통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쪽으로 확 뿌렸다.“다들 꺼지라고!”“이 할망구가 지금 뭐 하는 거야?”“그러니까! 누가 보면 이 병원이 할머니 병원인 줄 알겠네?”사람들은 저마다 욕하고 조롱했고 표현숙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결국, 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그러자 표현숙은 문을 힘차게 닫고 돌아섰다.뒤돌아서니 언제 옆으로 온 건지도 모르
하지만 그 전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할 때만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이 자신을 봤을 때는 어땠었나!차갑고 경멸적인 표정,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돈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는 결국 그 돈을 받았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박한빈이 자신을 경멸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성유리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설렘과 그때 그동안 그녀에게 쏟았던 감정을 떠올리며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불만이 치밀었다.“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염우섭은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염우섭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말했다.“답은 간단해. 네가 나랑 한 번만 자면 돼.”“뭐라고?”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염우섭은 금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시*, 진짜 순진한 척하지 마. *같으니까!”“진즉에 더럽혀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침에 그 남자가 너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참 대단하다. 엄마 몰래 그런 짓이나 하고.”“정 그렇게 욕망을 못 참겠다면 내가 도와줄게.”염우섭은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와 성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그만둬. 이거 놔!”성유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염우섭은 그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 그녀를 잡아끌며 쓰러뜨렸다.“소리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정하라고. 곧 너도 소리칠 때가 올 거니까.”염우섭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넌 이미 내 아내였을 텐데. 그때 너랑 만날 때는 내 입술조차 대지 못하게 해서 되게 깨끗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냥 남들 발에 밟히는 더러운 존재였어. 오늘 내가 너 무조건 먹...”남자의
성유리는 결국 먼저 방을 나섰는데 방을 나서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표현숙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은 왜 닫는 거야?”“아, 그냥 습관이에요.”성유리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표현숙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표현숙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표현숙은 뒷산으로 약초를 채취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성유리는 어차피 표현숙을 어떻게든 멀리할 생각이었기에 이때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랑 같이 가.”표현숙이 제안하자 성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예전에도 여러 번 같이 갔던 일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물 두 병만 가져가요.”하지만 나가기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말없이 문을 확인하며 말했다.“문은 제가 닫을게요.”그 말은 생각보다 꽤 크게 나와서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었다.표현숙은 그런 성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구한테 말하는 거야?”“그... 그게... 엄마한테요.”“내가 여기 옆에 있는데 왜 그래? 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성유리는 옅게 웃으면서도 곧바로 표현숙의 팔을 잡고 함께 나갔다.“가요, 빨리 다녀오자고요.”표현숙은 딸의 이상한 행동에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성유리의 친근한 모습에 금세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얘, 이제 결혼도 할 나이가 다 됐는데 아직도 애처럼 왜 이래?”성유리는 그냥 웃어 보였다.표현숙이 말한 뒷산은 사실 마을의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숲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면 작은 시냇가도 여러 개 나왔다.시냇가에는 가재나 작은 게도 잡을 수 있었다.성유리는 약초를 알지 못했기에 표현숙은 성유리에게 바구니를 들게 하고 작은 시냇가 옆에서 게나 달팽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표현숙의 말대로 성유리가 열심히 주워 모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엄마, 봐요. 제가 또 이
“저 밤새 못 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 쉴 수 있을까요?”“그럼 왜 당신 방에서 자지 않으세요?”“당신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어서요.”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성유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호흡이 금세 고르고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평소 깔끔했던 턱선에 작은 수염도 보였다. 성유리는 그의 손을 밀쳐내려던 생각을 접고 손을 천천히 내렸다.박한빈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잠이 들 줄은 몰랐다.성유리를 찾았지만 사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자지 못했었다. 자주 깨어나거나, 이곳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성유리의 방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비록 여전히 낮고 습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성유리의 향기와 햇볕에 말린 이불의 냄새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성유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박한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녀의 잠이 달아났지만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성유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설아, 왜 아직 안 일어났어? 아픈 거 아니야?”성유리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로 눈을 떴다.순간 박한빈 또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려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민설아?”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행여나 박한빈이 말을 할까 봐 걱정되어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그리고는 급히 대답했다.“저... 금방 일어날게요.”“괜찮아? 몸이 아픈 거 아니지?”“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오래 잔 것뿐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성유리는 손발이 바빠지며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다친 손을 우연히 건드렸다.강한 고통에 박한빈은 즉시 움찔하며 신음을 했고 성유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입을 다시 막았다.평소 큰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
박한빈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이곳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일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앨범을 반복해서 보며 문밖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성유리가 실종되었던 그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진들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몇 번을 넘기던 박한빈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자기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진짜로 성유리를 찾으러 벽을 넘으려고 했다.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한 쪽 팔에 아직 보호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이 몸으로 높은 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결국 박한빈은 벽 밖에 서서 문만 응시했다.성유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한빈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갔다.동이 틀 무렵, 마침내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바로 할머니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간 것이었다.박한빈은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에 그 흔한 도둑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성유리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창문은 훨씬 낮았다.그 덕에 박한빈은 힘들지 않게 창을 넘어 들어갔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성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손을 내리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살짝 대었다.그 차가운 느낌에 성유리는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자신의 침대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박한빈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저예요.”성유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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