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절벽 끝에 몰린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성유리의 반응은 박한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직접 옷을 갈아입혔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결국 성유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도련님, 사모님...”숙자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자신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순순히 따랐다.차에 오른 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병원은 안 가도 돼. 어머님께는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바쁘잖아. 그냥 아무 데나 내려줘.”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었기에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2년이 넘게 되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박한빈은 분명 그녀가 왜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인 성유리에게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성유리는 한때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박한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아이가 생기면 비로소 그녀에게도 진정한 가정이 생길 수 있을 거
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박한빈은 결국 성유리를 별장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길가에 내려주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떠났다.검은색 포르쉐는 성유리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더 이상 저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밖에 나온 김에 성유리는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원유진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박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신가?”원유진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는 네가 사람들 틈에서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줄 알았는데, 쇼핑도 하러 나오네.”원유진은 성유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유리를 앙숙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다른 사람들은 성유리가 박한빈과 결혼한 이후, 그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바꾸었지만, 원유진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모님 자리가 성유정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성유리는 그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원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막아섰다.“어딜 가려고? 보아하니 혼자 있네. 같이 다니는 게 어때?”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불편해.”“뭐가 불편해? 누군가를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니지?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성유리는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유진 씨, 교육은 제대로 받은 거지?”“무슨 소리야? 당연히 받았지!”“그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고 있지?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 없어?”성유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정확하게 원유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듯 얼굴이 굳었다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언니!”성유정은 급히 다가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언니... 화난 거야? 엄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야...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곧 집에서 나갈 거니까. 더 이상 언니랑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게...”“응. 그래.”성유리는 아주 간단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고, 성유정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반응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갈게.”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성유정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떠났다.성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 어쩌죠? 언니가 저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아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그래. 맞아. 난 널 싫어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충동을 억제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아마 윤청하의 뺨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그들이 왜 자신보다 성유정을 편애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녀가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은 그들에게 수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까지 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딸은 성유정처럼 지적이고 품위 있어야 했다. 성유리는 그들에게 실패작에 불과했다.집에 돌아온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성유정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성유리는 당연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숙자 아주머니는 연신 궁금한 듯 말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유정 씨가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나요?”그 질문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성유리는 원고 마감이 늦어져 몇 날 며칠을 끌었기
성유리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옷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녀는 곧바로 문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박한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가 아니라, 서로를 겨냥한 적과 같은 분위기로 대치했다.“별일 없으면 나가줘. 나 자야 해.”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내일 점심시간은 비워둬.”“무슨 일인데?”성유리는 무심코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성유정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거라면 절대 안 가.”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반응은 성유리의 추측이 맞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성유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박한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 유정이는 네 동생이야.”“난 동생 없어. 그리고 성유정은 스스로 넘어진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성유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네가 잘한 건 뭐지?”박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싸운 게 잘한 행동이야? 네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긴 해?”“내 위치? 내가 뭐야? 시골에서 데려온 들러리일 뿐이잖아.”성유리도 비웃었다.“맞아. 10년 동안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교양 없을 거야. 너희가 원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어쨌든, 당신의 아이는 나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 안 되잖아.”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어차피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창피하다면...”“성유리, 그만해. 생각 좀 하고 말해.”박한빈은 거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
성유리는 고민 끝에 이혼합의서를 집어넣고는 이튿날 박한빈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성씨 집안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금성 시내와 교외의 접점 지역에 있었는데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아주 호화로운 별장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때 가사 도우미 하나가 성유리를 보았지만 달려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마찬가지로 가사 도우미를 본 성유리는 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알아서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래도 사과하러 오는 거라고 성의라도 보이기 위해 성유리는 특별히 건강식품을 이것저것 챙기고는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아가씨, 오셨어요?”성유리가 집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아까 봤던 그 도우미였다.그에 성유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성유리를 불러왔다.“언니!”언제 인기척을 들은 것인지 내려온 성유정이었다.새하얀 원피스에 검은색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순진무구한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미모였다.언니를 부르며 달려오던 성유정은 성유리 뒤를 빤히 보더니 혼자 온 것 같은 성유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언니, 설마 혼자 운전해서 온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보며 물었다.“너 상처는 좀 어때?”“괜찮아...”성유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밝은 척을 하며 말을 돌렸다.“엄마는 위에 있어, 근데... 아직도 화나 보여. 언니가 올라가서 봐봐.”“응.”성유리가 너무 흔쾌히 대답해서 성유정이 의외라고 여기고 있던 사이, 성유리는 빠르게 성유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 시각 성씨 집안 안주인은 2층에서 꽃꽂이를 하며 성유리가 부르는 엄마 소리에도 코웃음을 쳤다.“내가 챙겨온 거 1층에 뒀어요.”성유리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지 바로 말을 꺼냈다.“어제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그때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미 사람 보내서 CCTV 확인하라고 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어.”잘못했다고 말하는 딸의 모습을 본 윤청하는 마음이 아파와 성유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팔을 다쳤으니 망정이지 얼굴이라도 다쳐서 흉지면 어쩌려고.”“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언니가 원유진이랑 싸우게 둘 수는 없잖아요...”고개를 젓는 성유정을 본 윤청하는 무언가 떠오른 듯 책망 어린 눈길로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봐봐, 네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언니씩이나 돼서 유정이가 이렇게까지 널 도와야겠어? 부끄럽지도 않니?”“난 유정이 도움 필요 없어요.”성유리의 대답에 윤청하의 안색은 다시 어두워졌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유정이가 나서서 막지 않으면 넌 어떻게 했을 건데? 그게 공공장소라는 건 생각 안 하니? 누가 찍어서 올리기라도 하면 우리 성씨 집안의 얼굴은 뭐가 되고 박 씨 집안에선 널 뭐라고 생각하겠니.”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윤청하에게 자신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그에 윤청하는 화가 나 몸을 떨며 소리쳤다.“너 지금 그게 무슨 눈빛이야, 인정 못 하겠다는 거야? 당장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윤청하의 호통에도 움직이지 않는 성유리를 보더니 성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그만 화내요. 언니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넌 신경 쓰지 마.”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을 끊고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왜,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지?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거지?”“그때 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윤청하가 이 말을 내뱉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에 윤청하도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홧김에 마음속에만 담아두던 말을 뱉어버린 본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그 사이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너...”윤청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성유리는 거실로 걸어가더니 거실 중앙에 얌전히 꿇어앉았다.그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윤청하가 미간을 찌푸리자 성유정이 그런 엄마를 보며 애
박한빈은 빠르게 에릭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이내 두 사람의 술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 화기애애함에 알리는 심지어 뭔가 불편함을 느꼈다.박한빈의 말을 듣던 알리는 처음에 두 사람이 싸울 거라 예상했었고 이미 구경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그런데 에릭은 그렇게 모든 걸 가볍게 넘겨버렸다.평소와 다른 형의 모습에 알리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고 뭔가 불만을 토로할까 했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알리의 가슴이 한순간 뜨거워졌다.그러나 알리는 금방 고개를 치켜들며 박한빈과 눈을 맞췄다.“오늘 일 다 들었습니다.”박한빈이 천천히 말했다.“제 아내가 부끄러워해서...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것 같네요. 실례했습니다. 죄송해요.”박한빈의 말에는 진심이 느껴졌으나 알리는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게 사과인가? 아니, 이건 자랑하는 거 아니야?’더 큰 문제는 알리가 화를 낼 수도, 그럴 자격도 없다는 것이었다.결국 알리는 일방적으로 고백한 거였고 성유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였으니 알 리가 여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 오히려 마치 광대처럼 보였다.그래서 알리는 술잔을 꽉 쥐고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박한빈은 알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그렇게 저녁 식사는 평온하고 화기애애하게 끝났고 박한빈은 기사에게 그들을 호텔로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차 문을 닫기 전에 박한빈은 에릭에게 한마디 했다.“네가 라온시로 돌아가면 다시 연락하자.”에릭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알리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박한빈이 차 문을 닫고 나서야 알리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에릭을 향해 돌아앉았다.“형한텐 분명히 다른 계획이 있을 거야. 그렇지? 저 사람이 형 약혼녀를 빼앗았는데 이걸 그냥 참을 수 있어?”“두 사람이 몇 년 동안 협력했으니까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알고 있을 거야. 맞지?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유리가 그날 단호하게 거절한 이유는 사실 나랑 네 사이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야.”“유리는 나랑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나를 잘 알잖아. 그래서 내가 주변에 두고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 웃긴 이야기지만 사실 유리가 나보다 너라는 친구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게다가 친구일 뿐 아니라 우리는 긴밀한 파트너 관계이기도 하고.”“유리는 이 일로 우리가 적이 될까 봐 걱정했어. 내가 그로 인해 더 많은 걸 잃을까 봐... 그렇지만 아라 씨는 유리에게 거절당한 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어.”“왜냐하면 유리는 아라 씨랑 네가 맞지 않는 걸 알고 있었고 아라 씨가 그 결혼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떤 압박을 받을지 잘 이해했거든.”“어쩌면 유리 자신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래서 그 며칠 동안 유리도 그렇게 행복해하지 않았어.”“내가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해. 나는 유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유리는 나 때문에 아라 씨 부탁을 거절한 거잖아. 그럼 나는 유리를 대신해서 아라 씨를 도와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알기로 그게 바로 유리가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이고.”박한빈은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내뱉었고 그동안 에릭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에릭은 박한빈의 말을 비웃었을 것이고 그들의 서로에게 희생하는 관계가 역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에릭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박한빈이 한 행동에 대한 분노도, 원망도 다 사라졌다. 이 순간, 그는 박한빈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예전의 에릭에게 여자는 단지 기분 전환용 존재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정신적으로 투자하는 것보다, 그냥 돈을 주는 게 훨씬 더 간단했고 그렇게만 해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그리고 그들은 에릭이 원하는 ‘감정’도 주었지만 에릭은 그것이 모두 가짜라는 걸 알았다.애릭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가난한 사람이라
“응.”“그럼 그 여자... 안 찾을 거야?”에릭은 옷을 짐 가방에 던져 넣으며 대답했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응. 안 찾을 거야.”너무도 담담한 에릭의 모습에 알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그를 쳐다보았다.“오늘 밤 로얀이랑 저녁 약속이 있는데 시간 있으면 오던가.”“난 뭐 하러 가?”알리는 에릭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사람한테 나를 조롱할 기회라도 주겠다는 거야?”“로얀의 아내도 올 거야.”“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말했잖아, 내가 얼마 전에 호르몬 때문에 눈이 멀었던 거라고. 오늘은 확실히 성유리라는 여자를 알게 됐어. 이제 더 이상 그 여자 안 좋아해!”알리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밤이 되자 결국 에릭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자존심까지 걸었지만 그날 식사 장소에 성유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알리는 극심한 실망감을 느꼈다.박한빈은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왔어?”그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알리는 박한빈이 오늘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러니 지금 박한빈이 자신을 조롱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알리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치켜들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에릭은 알리를 빠르게 제어시켰다.“오늘 일은 내가 얘한테 시킨 거야. 사실 그냥 네 아내한테 장난을 치려고 했을 뿐이야.”“알아.”박한빈은 자연스럽게 에릭의 말을 받아들였다.“걱정 마. 나는 신경 안 쓰니까.”두 사람의 대화에 알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에릭은 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박한빈에게 다시 말했다.“나 라온시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 예약했어.”“오? 언제 가는데?”“내일.”“내일... 아마 나는 너를 데려다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아.”“괜찮아, 나 혼자 갈게.”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어 올려 살짝 부딪혔다. 그들의
“언니! 앞에 있는 오빠가 언니에게 전하라고 했어요.”성유리가 지하철역을 나서자 한 소녀가 말을 걸었다.“누가?”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물었다.하지만 소녀는 성유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성유리에게 앞으로 가면 알게 될 거라고만 말했다.결국 성유리는 소녀가 가리킨 방향대로 걸어갔다.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꽃 한 송이를 건넸고 역시 앞의 사람이 주었다고 말했다.성유리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원래는 그냥 가려고 했지만 앞에는 몇십 명이 꽃을 들고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갔다. 아마 박한빈이 이런 일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하며.최근 박한빈은 알리에게 자극을 받은 듯 보였다. 며칠 전에는 성유리를 억지로 결혼사진을 새로 찍게 하더니 수제 팔찌까지 만들어주었고 이번에는 또 이런 일까지 벌였다.다른 것들은 괜찮았다. 크게 소란스럽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지만 오늘은 달랐다.길을 걸어온 동안, 성유리는 이미 백 명이 넘는 사람을 봤고 주변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하고 있었다.성유리의 머리는 점점 더 새하얘졌고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그만하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장미 꽃잎으로 만든 아치형 문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그리고 그 앞에는 알리가 서 있었다....“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오늘 나한테 이런 망신을 줘?”알리는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릭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분노로 코가 휘어질 지경이었고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에릭은 알리에게 여자들은 극단적인 로맨스와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고 하며 지난번 술 취해 고백한 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거라며 조언해 줬다.그러면서 알리에게 다시 계획을 세우라고 했었다. 인터넷에서 가장 유행하는 꽃을 보내고 고백하는 방법으로 성유리가 감동받게 하라고.순진한 알리는 정말로 에릭의 말을 믿고 그대로 실행했다.결과는 성유리가 알리를 본 순간, 마치 유령을 본
“저번에 다 말했잖아요. 뭘 더 원하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저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성유리는 그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전 하늘이랑 집에 있을게요.”비록 전에 아라가 거절했었지만 지금 그들이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게 성유리에게는 좀 찝찝하게 느껴졌다.마치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드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되지.”박한빈은 아라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고 대답했다.“나도 얼굴만 비추고 금방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우리 다 같이 놀러 가자.”“어디로요?”“어디든. 뭐... 쇼핑몰 가도 좋고.”성유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박한빈에게 외투를 입혀주고 발끝을 들고 넥타이를 묶어주었다.박한빈은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마친 상태였는데 오늘 바른 립스틱은 광이 도는 빨간색이었다.그 촉촉한 질감이 그녀의 입술을 더욱 풍성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잠시 응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을 정말 물어버렸다.성유리는 아프다고 신음하며 그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그러자 박한빈은 금방 그녀를 풀어주었지만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박한빈이 미소에 성유리는 화가 나서 다시 때리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립스틱도 발랐잖아. 낭비하면 아까운 거 아냐?”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중독되면 어쩌시려고요?”“괜찮아.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모두 네 거야. 손해 볼 거 없어.”성유리는 더 이상 박한빈과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고 잠시 대치한 후, 결국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빨리 가세요.”“그럼 집에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선물.”“뭔데요?”“직접 열어봐.”그
“병신같은 놈.”그 말과 함께 차가운 물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내리자 알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처음에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위장에서 큰 움직임이 느껴졌다.알리는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저 눈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마구 달려갔다.그리고 그곳에서 내장까지 토해낼 듯 구토를 했다.박한빈이 알리에게 먹인 술은 그가 이전에 마셨던 것들과는 달랐다.지금 알리는 위장이 타는 듯이 불에 달아오르고 머리가 마치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다.“독을 탄 게 분명해.”알리가 정신을 차린 후, 에릭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그 인간이 술에 독을 탔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에릭은 알리의 모습을 보고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 비웃음에 알리는 불쾌감을 느꼈다.“그건 무슨 뜻이지?”“네가 남의 땅에서 남의 아내를 탐내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널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에릭이 계속 말했다.“나는 너 같은 어리석은 동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형이 뭘 알아?”알리가 반박했다.“그리고 이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 형 그 인간이랑 절교했다고 하지 않았어?”“난 그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너 성유리 씨를 좋아한다고? 너 전에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나는 결혼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그냥 유리 씨랑 연애하고 싶을 뿐이야!”“술집에서 했던 멍청한 고백 다시 말해줄까?”에릭은 동생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며 물었다.“정말 창피할 지경이야.”“내가 아무리 창피한 짓을 해도 형보단 낫잖아.”“상대방이 형을 좋아하지 않는 거 알면서 결혼하려고 했잖아. 그런 형이 나보다 뭐가 나은데?”“뭐라고?”“내가 틀린 말 했어? 형은 지금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성유리 씨한테까지 찾아갔어. 1억 좀 빌려달라고.”알리의 말에 에릭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그래서? 성유리 씨가 빌려줬어?”“당연히 안 빌려줬지. 아무 사이도 아니니
알리의 했던 말을 박한빈은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유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박한빈의 얼굴은 이미 몹시 창백하고 괴로워 보였다.성유리는 재빠르게,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알리를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다.그리하여 박한빈 옆에 다다를 때 성유리는 손목과 손등에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곧장 박한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그녀가 그의 손을 잡자마자 자연스럽게 손을 되돌려 잡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심지어 성유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알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술을 마신 박한빈의 얼굴엔 본래 생기조차 없었는데 이때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성유리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조금 멈칫한 후, 그는 바로 성유리를 끌어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따라오던 직원은 알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싸늘하게 식은 박한빈의 눈빛에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순간, 매니저가 달려와 직원을 뒤로 밀어내며 박한빈에게 사과했다.“박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직원교육을 잘 못시켰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교육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한 마디도 새지 않게 하겠습니다!”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에게 끌려 나갔고 이내 차에 올라탔다.운전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이 말을 꺼낼 적당한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그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 올라타던 성유리는 머리를 차 상단에 부딪혔다.큰 고통에 그녀는 곧바로 신음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박한빈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지만 그 소리에 바로 성유리의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그 기회를 이용해 그를 꽉 끌어안았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안 놔요.
박한빈은 오늘 밤 술을 꽤 많이 마셨다.원래 사업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고 가끔 있는 술자리에서도 과하게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자비 따윈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잘 안다.그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체질이고 오히려 마실수록 더 창백해지는 스타일이다.지금 박한빈의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니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반면, 맞은편에 앉은 알리는 정반대였다.고량주를 반병 이상 마신 뒤, 알리의 얼굴은 피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성유리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말리려는 찰나, 박한빈이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그런데 알리는 이번에 잔을 받기는커녕 입을 틀어막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성유리는 힘들어 보이는 알리를 쫓아가는 대신 박한빈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도대체 왜 그 사람하고 술을 이렇게 마시는 거예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물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부축에 따라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그러곤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고 얼굴을 그녀의 가슴팍에 묻었다.박한빈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고 호흡은 차분했다.성유리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설마 지금 주무시는 거예요? 잘 거면 집에 가서 자야죠. 여기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아까 나가신 손님분 일행 맞죠? 지금 복도에 토하셨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요.”직원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이내 박한빈을 잠시 맡아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한 뒤, 성유리는 곧장 복도로 나갔다.그곳은 이미 꽤 시끄러워져 있었다.그 고귀하고 차가운 인상으로 처음 봤던 알리는 지금 쓰레기통을 붙잡고 마구 토하고 있었다.“구급차 부를까요?”옆에 있던 누군
“하늘이가 안 자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으려고?”박한빈의 그럴싸한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이거 한빈 씨가 하늘이한테 가르친 거죠? 박한빈 씨, 제발 딸한테 좀 제대로 된 걸 가르쳐줘요.”“난 지금도 하늘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뭐 하시려고요?”“알리 씨한테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하려고.”“왜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성유리가 당황한 듯 물었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리야, 우리 내기 한번 해볼래?”이 말에 성유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난 아직 뭘 걸고 하는지도 말 안 했는데?”“뭔지는 몰라도 싫어요. 전 당신이랑 내기하면 항상 지니까. 한빈 씨도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거잖아요!”성유리는 온몸으로 박한빈을 밀어내며 반항했지만 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은 자신의 팔을 더 꽉 조였다.“안 돼. 이번엔 무조건 해야 돼.”“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 하며 외쳤다.“매번 한빈 씨랑 내기하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이거 지금 사람 협박하는 거예요. 강매라고! 강매!”“아까 너 분석 잘하더라?”박한빈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면 네 선택이 맞을 거라고 믿는 거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말문이 막혔다.그 사이 박한빈은 알리의 연락처를 찾아 바로 전화하려고 했다.그런데 성유리가 그의 손을 꾹 잡고는 강제로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내기라는 게... 알리 씨가 밥 먹자는 제안을 받아줄지 말지 보는 건가요?”“응.”“그럼 전 알리 씨가 받아들인다는 것에 투표.”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왜요? 내기라면서요? 선택권은 먼저 말하는 쪽에 있는 거 아닌가?”박한빈은 한동안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요즘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