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박한빈은 결국 성유리를 별장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길가에 내려주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떠났다.검은색 포르쉐는 성유리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더 이상 저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밖에 나온 김에 성유리는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원유진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박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신가?”원유진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는 네가 사람들 틈에서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줄 알았는데, 쇼핑도 하러 나오네.”원유진은 성유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유리를 앙숙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다른 사람들은 성유리가 박한빈과 결혼한 이후, 그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바꾸었지만, 원유진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모님 자리가 성유정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성유리는 그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원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막아섰다.“어딜 가려고? 보아하니 혼자 있네. 같이 다니는 게 어때?”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불편해.”“뭐가 불편해? 누군가를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니지?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성유리는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유진 씨, 교육은 제대로 받은 거지?”“무슨 소리야? 당연히 받았지!”“그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고 있지?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 없어?”성유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정확하게 원유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듯 얼굴이 굳었다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언니!”성유정은 급히 다가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언니... 화난 거야? 엄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야...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곧 집에서 나갈 거니까. 더 이상 언니랑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게...”“응. 그래.”성유리는 아주 간단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고, 성유정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반응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갈게.”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성유정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떠났다.성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 어쩌죠? 언니가 저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아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그래. 맞아. 난 널 싫어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충동을 억제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아마 윤청하의 뺨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그들이 왜 자신보다 성유정을 편애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녀가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은 그들에게 수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까지 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딸은 성유정처럼 지적이고 품위 있어야 했다. 성유리는 그들에게 실패작에 불과했다.집에 돌아온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성유정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성유리는 당연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숙자 아주머니는 연신 궁금한 듯 말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유정 씨가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나요?”그 질문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성유리는 원고 마감이 늦어져 몇 날 며칠을 끌었기
성유리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옷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녀는 곧바로 문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박한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가 아니라, 서로를 겨냥한 적과 같은 분위기로 대치했다.“별일 없으면 나가줘. 나 자야 해.”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내일 점심시간은 비워둬.”“무슨 일인데?”성유리는 무심코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성유정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거라면 절대 안 가.”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반응은 성유리의 추측이 맞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성유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박한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 유정이는 네 동생이야.”“난 동생 없어. 그리고 성유정은 스스로 넘어진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성유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네가 잘한 건 뭐지?”박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싸운 게 잘한 행동이야? 네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긴 해?”“내 위치? 내가 뭐야? 시골에서 데려온 들러리일 뿐이잖아.”성유리도 비웃었다.“맞아. 10년 동안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교양 없을 거야. 너희가 원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어쨌든, 당신의 아이는 나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 안 되잖아.”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어차피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창피하다면...”“성유리, 그만해. 생각 좀 하고 말해.”박한빈은 거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
성유리는 고민 끝에 이혼합의서를 집어넣고는 이튿날 박한빈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성씨 집안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금성 시내와 교외의 접점 지역에 있었는데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아주 호화로운 별장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때 가사 도우미 하나가 성유리를 보았지만 달려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마찬가지로 가사 도우미를 본 성유리는 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알아서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래도 사과하러 오는 거라고 성의라도 보이기 위해 성유리는 특별히 건강식품을 이것저것 챙기고는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아가씨, 오셨어요?”성유리가 집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아까 봤던 그 도우미였다.그에 성유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성유리를 불러왔다.“언니!”언제 인기척을 들은 것인지 내려온 성유정이었다.새하얀 원피스에 검은색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순진무구한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미모였다.언니를 부르며 달려오던 성유정은 성유리 뒤를 빤히 보더니 혼자 온 것 같은 성유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언니, 설마 혼자 운전해서 온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보며 물었다.“너 상처는 좀 어때?”“괜찮아...”성유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밝은 척을 하며 말을 돌렸다.“엄마는 위에 있어, 근데... 아직도 화나 보여. 언니가 올라가서 봐봐.”“응.”성유리가 너무 흔쾌히 대답해서 성유정이 의외라고 여기고 있던 사이, 성유리는 빠르게 성유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 시각 성씨 집안 안주인은 2층에서 꽃꽂이를 하며 성유리가 부르는 엄마 소리에도 코웃음을 쳤다.“내가 챙겨온 거 1층에 뒀어요.”성유리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지 바로 말을 꺼냈다.“어제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그때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미 사람 보내서 CCTV 확인하라고 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어.”잘못했다고 말하는 딸의 모습을 본 윤청하는 마음이 아파와 성유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팔을 다쳤으니 망정이지 얼굴이라도 다쳐서 흉지면 어쩌려고.”“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언니가 원유진이랑 싸우게 둘 수는 없잖아요...”고개를 젓는 성유정을 본 윤청하는 무언가 떠오른 듯 책망 어린 눈길로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봐봐, 네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언니씩이나 돼서 유정이가 이렇게까지 널 도와야겠어? 부끄럽지도 않니?”“난 유정이 도움 필요 없어요.”성유리의 대답에 윤청하의 안색은 다시 어두워졌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유정이가 나서서 막지 않으면 넌 어떻게 했을 건데? 그게 공공장소라는 건 생각 안 하니? 누가 찍어서 올리기라도 하면 우리 성씨 집안의 얼굴은 뭐가 되고 박 씨 집안에선 널 뭐라고 생각하겠니.”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윤청하에게 자신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그에 윤청하는 화가 나 몸을 떨며 소리쳤다.“너 지금 그게 무슨 눈빛이야, 인정 못 하겠다는 거야? 당장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윤청하의 호통에도 움직이지 않는 성유리를 보더니 성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그만 화내요. 언니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넌 신경 쓰지 마.”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을 끊고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왜,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지?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거지?”“그때 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윤청하가 이 말을 내뱉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에 윤청하도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홧김에 마음속에만 담아두던 말을 뱉어버린 본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그 사이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너...”윤청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성유리는 거실로 걸어가더니 거실 중앙에 얌전히 꿇어앉았다.그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윤청하가 미간을 찌푸리자 성유정이 그런 엄마를 보며 애
성유정의 마지막 말에 주먹을 꽉 쥔 성유리가 마침내 성유정을 바라보자 성유정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 웃어 보였다.그 크고 동그란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성유리 역시 한번 웃어 보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잡종.”누구에게나 건드리면 안 될 역린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성유정의 역린은 바로 잡종이라는 두 글자였다.그에 표정이 썩어들어간 성유정은 아무 생각 없이 화가 나는 대로 손을 휘둘러 성유리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갑자기 타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집어 삼켜져 빚어진 정말로 무의식적에 나온 행동이었다.성유정 본인이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그때 인기척을 듣고 나온 윤청하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에 재빨리 몸을 돌린 성유정이 뭐라 해명하려 했지만 윤청하는 빠르게 그녀를 지나쳐 성유리에게로 향했다.그 잠깐 새에 성유리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나지막이 말했다.“전 괜찮아요.”그 모습은 평소의 성유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성유리 얼굴에 성유정을 향한 비웃음이 가득해졌을 뿐이었다.하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윤청하는 성유정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엄마, 그게 아니라요...”성유리가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아래층에서 사람이 올라오더니 그들 모녀를 향해 말했다.“사모님, 한빈 도련님이 오셨습니다.”그 순간 가사 도우미를 따라 올라오던 박한빈이 마침 눈물을 떨어트리는 성유정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됐어, 얼른 눈물부터 닦아.”윤청하는 박한빈을 보며 성유정을 다그쳤다.“한빈이 왔어?”“여사님, 안녕하셨어요?”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친 박한빈이 좀전의 일에 대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별일 아니야, 그냥 유리가 잘못하다 넘어진 것뿐이야.”아직도 성유정을 감싸고 도는 윤청하에 성유리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엄마, 제가 잘못해서 넘어진 거예요?”“그래.”너무나도 단호한 윤청하의 말투에 성유리는 제 아이가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
연정우가 성유리와 약속한 시간은 11시였다. 하지만 12시가 다 되어서도 연락 없는 연정우를 성유리는 뜬눈으로 기다렸다.“하늘이 잠들었어?”12시가 넘은 자정이 되어서야 연정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응. 지금 자.”성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거실 발코니로 향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원래는 10시쯤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또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바빴어.”“괜찮아. 나도 아직 안 자고 있었어.”연신 사과를 하는 연정우에게 성유리는 거듭 괜찮다고 강조했고 둘 사이엔 빠르게 적막이 찾아왔다.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금세 감지한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도 그렇게 바빠?”“응. 그렇지 뭐. 그냥 투자자들이 제일 중요한 문제야. 너도 알잖아. 아직 회사는 제대로 파산 신청도 안 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 같이 발을 빼버리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나...”연정우는 말하다 문득 목이 막히는지 뚝 멈추더니 이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봐.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뭣하러 하겠어. 사실 별거 아니야. 그저 그런 평범한 과정일 뿐이지.”“요즘 너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조용히 연정우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인데?”이번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잠시 후, 성유리가 대답했다.“아무 일도 없어. 그냥... 갑자기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든 것 같아서.”연정우는 대답이 없었다.“만약 나만 아니었다면 너도 아마...”성유리는 두 손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고 그때, 연정우가 뭔가 눈치 차린 듯 물었다.“우리 엄마가 너한테 찾아갔었어?”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들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그녀에게 발생한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너와 함께하기를 선택했어. 그러니 성유리, 너희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내 아들이 끊임없이 참고 양보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너는 정우를 위해 뭘 했지?”금미라는 마지막 말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녀의 마지막 말은 전에 말보다 악독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성유리의 가슴을 세게 내려친 것처럼 가슴 속에서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걱정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아까 그 사람이 아저씨의 엄마야?”하늘이가 물었다.“근데 왜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성유리는 하늘이에게 굳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엄마로서의 본능이야. 마치 엄마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나쁜 사람을 다 쫓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분도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하지만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하늘이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지 않을까?’성유리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스스로를 또 다른 의문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연정우가 그 삶에 지쳤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금미라가 말한 것처럼 연정우가 성유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했는데 정작 그녀는 연정우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심지어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준 감정적인 보답조차도 너무나 미미했다.“모든 일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성유리는 결국 하늘이에게 이런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네가 크다 보면 자연스레 다 알게 될 거야.”그러나 성유리의 이런 대답은 하늘이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뭐든 다 커야지만 알 수 있는 거야? 도
금미라의 말이 다 끝나자 성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긴 침묵에 잠겼다.“그러니까 너도 결국 네가 정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금미라는 그런 성유리를 쳐다보며 그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더 크게 지었다.“그럼 사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데요?”그때,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 당연히 정우 옆에서 떠나야지!”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사모님, 연정우는 이제 성인이에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죠. 더군다나... 저희는 이미 약속을 했어요. 정우가 떠나지 않기로 했는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정우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버린다고?”금미라는 더더욱 성유리를 조롱하듯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상황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정우 회사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말이야. 그게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아?”“바로 성유리 너 때문이잖아! 너를 만난 뒤로 정우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매번 너 때문에 하던 일마저 다 잘못되고 있잖아! 심지어 그전에도! 정우의 외할아버지가 왜 돈세탁에 연루됐다고 고발당했을까? 그 일이 박한빈이랑 관련돼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일만 없었어도 정우는 그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 가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이제 겨우 정우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네가 다시 나타나 버린 거야. 도대체 정우한테 힘든 시간을 얼마나 더 버텨 달라고 하려는 거지? 유리 넌 결국 정우가 죽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니?”금미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그런데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정우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데? 너만 아니었다면 정우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있겠어? 정우는 원래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다 유리 너 때문에 틀려버렸다고!”금미라는 성유리 앞에서 차마 울음을 터뜨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