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언니!”성유정은 급히 다가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언니... 화난 거야? 엄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야...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곧 집에서 나갈 거니까. 더 이상 언니랑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게...”“응. 그래.”성유리는 아주 간단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고, 성유정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반응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갈게.”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성유정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떠났다.성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 어쩌죠? 언니가 저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아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그래. 맞아. 난 널 싫어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충동을 억제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아마 윤청하의 뺨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그들이 왜 자신보다 성유정을 편애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녀가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은 그들에게 수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까지 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딸은 성유정처럼 지적이고 품위 있어야 했다. 성유리는 그들에게 실패작에 불과했다.집에 돌아온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성유정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성유리는 당연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숙자 아주머니는 연신 궁금한 듯 말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유정 씨가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나요?”그 질문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성유리는 원고 마감이 늦어져 몇 날 며칠을 끌었기
성유리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옷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녀는 곧바로 문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박한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가 아니라, 서로를 겨냥한 적과 같은 분위기로 대치했다.“별일 없으면 나가줘. 나 자야 해.”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내일 점심시간은 비워둬.”“무슨 일인데?”성유리는 무심코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성유정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거라면 절대 안 가.”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반응은 성유리의 추측이 맞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성유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박한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 유정이는 네 동생이야.”“난 동생 없어. 그리고 성유정은 스스로 넘어진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성유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네가 잘한 건 뭐지?”박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싸운 게 잘한 행동이야? 네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긴 해?”“내 위치? 내가 뭐야? 시골에서 데려온 들러리일 뿐이잖아.”성유리도 비웃었다.“맞아. 10년 동안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교양 없을 거야. 너희가 원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어쨌든, 당신의 아이는 나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 안 되잖아.”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어차피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창피하다면...”“성유리, 그만해. 생각 좀 하고 말해.”박한빈은 거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
성유리는 고민 끝에 이혼합의서를 집어넣고는 이튿날 박한빈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성씨 집안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금성 시내와 교외의 접점 지역에 있었는데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아주 호화로운 별장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때 가사 도우미 하나가 성유리를 보았지만 달려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마찬가지로 가사 도우미를 본 성유리는 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알아서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래도 사과하러 오는 거라고 성의라도 보이기 위해 성유리는 특별히 건강식품을 이것저것 챙기고는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아가씨, 오셨어요?”성유리가 집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아까 봤던 그 도우미였다.그에 성유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성유리를 불러왔다.“언니!”언제 인기척을 들은 것인지 내려온 성유정이었다.새하얀 원피스에 검은색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순진무구한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미모였다.언니를 부르며 달려오던 성유정은 성유리 뒤를 빤히 보더니 혼자 온 것 같은 성유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언니, 설마 혼자 운전해서 온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보며 물었다.“너 상처는 좀 어때?”“괜찮아...”성유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밝은 척을 하며 말을 돌렸다.“엄마는 위에 있어, 근데... 아직도 화나 보여. 언니가 올라가서 봐봐.”“응.”성유리가 너무 흔쾌히 대답해서 성유정이 의외라고 여기고 있던 사이, 성유리는 빠르게 성유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 시각 성씨 집안 안주인은 2층에서 꽃꽂이를 하며 성유리가 부르는 엄마 소리에도 코웃음을 쳤다.“내가 챙겨온 거 1층에 뒀어요.”성유리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지 바로 말을 꺼냈다.“어제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그때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미 사람 보내서 CCTV 확인하라고 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어.”잘못했다고 말하는 딸의 모습을 본 윤청하는 마음이 아파와 성유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팔을 다쳤으니 망정이지 얼굴이라도 다쳐서 흉지면 어쩌려고.”“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언니가 원유진이랑 싸우게 둘 수는 없잖아요...”고개를 젓는 성유정을 본 윤청하는 무언가 떠오른 듯 책망 어린 눈길로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봐봐, 네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언니씩이나 돼서 유정이가 이렇게까지 널 도와야겠어? 부끄럽지도 않니?”“난 유정이 도움 필요 없어요.”성유리의 대답에 윤청하의 안색은 다시 어두워졌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유정이가 나서서 막지 않으면 넌 어떻게 했을 건데? 그게 공공장소라는 건 생각 안 하니? 누가 찍어서 올리기라도 하면 우리 성씨 집안의 얼굴은 뭐가 되고 박 씨 집안에선 널 뭐라고 생각하겠니.”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윤청하에게 자신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그에 윤청하는 화가 나 몸을 떨며 소리쳤다.“너 지금 그게 무슨 눈빛이야, 인정 못 하겠다는 거야? 당장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윤청하의 호통에도 움직이지 않는 성유리를 보더니 성유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그만 화내요. 언니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넌 신경 쓰지 마.”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을 끊고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왜,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지?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거지?”“그때 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윤청하가 이 말을 내뱉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에 윤청하도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홧김에 마음속에만 담아두던 말을 뱉어버린 본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그 사이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너...”윤청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성유리는 거실로 걸어가더니 거실 중앙에 얌전히 꿇어앉았다.그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윤청하가 미간을 찌푸리자 성유정이 그런 엄마를 보며 애
성유정의 마지막 말에 주먹을 꽉 쥔 성유리가 마침내 성유정을 바라보자 성유정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 웃어 보였다.그 크고 동그란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성유리 역시 한번 웃어 보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잡종.”누구에게나 건드리면 안 될 역린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성유정의 역린은 바로 잡종이라는 두 글자였다.그에 표정이 썩어들어간 성유정은 아무 생각 없이 화가 나는 대로 손을 휘둘러 성유리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갑자기 타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집어 삼켜져 빚어진 정말로 무의식적에 나온 행동이었다.성유정 본인이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그때 인기척을 듣고 나온 윤청하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에 재빨리 몸을 돌린 성유정이 뭐라 해명하려 했지만 윤청하는 빠르게 그녀를 지나쳐 성유리에게로 향했다.그 잠깐 새에 성유리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나지막이 말했다.“전 괜찮아요.”그 모습은 평소의 성유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성유리 얼굴에 성유정을 향한 비웃음이 가득해졌을 뿐이었다.하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윤청하는 성유정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엄마, 그게 아니라요...”성유리가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아래층에서 사람이 올라오더니 그들 모녀를 향해 말했다.“사모님, 한빈 도련님이 오셨습니다.”그 순간 가사 도우미를 따라 올라오던 박한빈이 마침 눈물을 떨어트리는 성유정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됐어, 얼른 눈물부터 닦아.”윤청하는 박한빈을 보며 성유정을 다그쳤다.“한빈이 왔어?”“여사님, 안녕하셨어요?”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친 박한빈이 좀전의 일에 대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별일 아니야, 그냥 유리가 잘못하다 넘어진 것뿐이야.”아직도 성유정을 감싸고 도는 윤청하에 성유리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엄마, 제가 잘못해서 넘어진 거예요?”“그래.”너무나도 단호한 윤청하의 말투에 성유리는 제 아이가
도우미의 말과 성유정의 억울한 모양새까지 더 해지니 윤청하는 이미 마음속으로 잘잘못을 다 따지고는 성유리를 향해 소리쳤다.“성유리!”박한빈이 없었다면 윤청하는 바로 성유리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유정이는 네 동생이고 우리 성씨 집안에서 인정한 둘째야, 근데 네가 뭐라고 나서서 그런 말을 해! 감히 우리 성씨 집안 전체를 무시하는 거야?!”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범벅인 성유정을 한 번, 그리고 차가운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성유리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제 아내가 이런 교양 없는 말을 했다는 게 불만이고 또 제 귀여운 동생이 이딴 평가를 들었단 게 불만이겠지.하지만 성유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성유정에 대한 박한빈의 믿음, 성유정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한테 손대지 않는다던 그 말 한마디였다.성유정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제 성유리가 원유진과 싸웠을 때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었다.아마도 관심할 필요가 없어서겠지.박한빈은 그 앞에서 성유리를 지켜주지도 않았다.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성유리를 데려다 성유정한테 사과를 시키는 것뿐이었다.생각을 마친 성유리는 헛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네,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했다.“근데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성유리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고 윤청하는 화가 나 몸을 벌벌 떨었다.그때 묵직한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보지 않고 성유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쟤는 그냥 엄마랑 집안사람들이 입양한 잡종이잖아요. 알아요, 나보다 쟤가 더 성씨 집안 아가씨 같다는 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성씨 집안 피가 흐르는 건 저예요.”성유리는 아직 할 말이 많았지만 박한빈이 그 앞을 막아서며 성유리를 차갑게 내려다봤다.“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헛소리 아니야. 내가 틀린 말 했어?”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
성유리의 말이 끝나도 가만히 있던 박한빈은 서유리를 한번 보고 마침내 그 이혼합의서를 받아들었다.이혼합의서의 마지막 페이지부터 들추어본 박한빈은 이미 사인이 되어있는 성유리의 이름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성유리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혼서류를 반으로 찢어버렸다.그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성유리였지만 그녀는 애써 평온한 척하며 물었다.“이 서류가 맘에 안 들면 다시 인출해서 줄게.”박한빈은 여전히 말없이 찢어진 서류를 쓰레기통에 던져놓고는 성유리를 향해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낯빛이 변한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그렇게 성유리의 등은 빠르게 뒤에 있던 테이블에 닿았고 원래도 상처가 있던 등에 딱딱한 테이블이 닿으니 느껴지는 통증에 성유리가 신음을 흘려댔다.“이혼?”박한빈은 아파하는 성유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아님 밀당하는 건가.”“너의 이런 치졸한 수법들이 난 매번 역겨워.”남편이 아내에 대한 평가가 역겹다라니.성유리는 아까 성유정 앞에서 박한빈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박한빈은 그 순간에 성유정을 보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에게 혐오를 드러내고 있었다.지금껏 참 많이도 실망했던 성유리였지만 심장은 아직도 이런 말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왔다.성유리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한 느낌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아이러니한 건 이 와중에 웃음이 난다는 것이다.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은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협박 아니고 진심이야.”눈을 가늘게 뜨는 박한빈에 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우리 결혼을 더 지속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그럼 너한테 뭐가 의미 있는 건데? 아, 진씨 집안 그 혼외자?”박한빈이 진무열을 언급할 줄 몰랐던 성유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그 눈도 따라서 커졌다.하지만 박한빈
성유리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으나 연정우는 바로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우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왜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어떻게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정말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그를 미워해야 한다!그런데 왜 성유리는 단 한 점의 미움의 감정도, 원망도 없는 것일까. 혹시 연정우는 미움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의 표정은 조금씩 사라졌고 안색도 매우 안 좋아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래서 그녀는 연정우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그럼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연정우는 그제야 그들이 어느새 병원 입구에 다 왔음을 알아챘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마치는 즉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제자리에 남겨진 연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괴이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유리의 모습이 연정우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떠나갔다.한편, 성유리는 곧바로 병실로 돌아왔고 이때 병실은 아주 조용헀다.류수미는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깎고 있었으며 사민혁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하지만 텔레비전의 소리는 너무도 작았기에 성유리는 단번에 그의 주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정우는 정말 좋은 애인 것 같아요”그러던 와중, 갑작스러운 류수미의 한 마디.그 한마디에 사민혁은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쳐다봤고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러나 류수미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했다.“만약 가능하다면... 하나가 돌아온다면 난 반드시 정우와 결혼시킬 거예요.”“왜 또 그런 말을
연정우는 성유리가 할 대답을 쭉 생각해 봤었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게다가 지금 성유리의 눈빛을 보니 일부러 연정우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사뭇 진지하고 진심인 것 같았다.‘정말 진지하게 나한테 묻네.’연정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우린 헤어지지 않았나? 게다가 우리 둘이 만날 때 나도 박한빈 씨랑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난 이 방면에선 깨끗해. 그래서 너한테 잘못한 적은 없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너 지금... 나를 돌려 까는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있다 이내 대답하려고 입을 뻥끗거렸다.그러나 연정우가 먼저 말했다.“나도 알아. 이런 일엔... 나도 확실히 문제가 좀 있었지. 근데 유리야, 네 생각엔 그때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그를 쳐다보다 되물었다.“그러니까 그때 넌 날 속이고 있었던 거네? 맞아?”“뭐?”“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아무것도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이 네가 가진 것들을 다 뺏어가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 말들... 다 거짓말이었어?”“아니야.”연정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아마 스스로도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정우는 다른 변명을 더 하려고 했다.그러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젠 알겠네.”“뭘... 알겠다는 거야?”“그때 네가 날 선택한 이유가 사실 그냥...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던 거란 걸.”성유리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당시 네 회사는 이미 절벽 끝까지 밀려났었지. 그래서 박한빈 씨와 겨룰 자격도, 그럴 실력도 없었고. 너는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를 선택한 거야. 그런 김에 나한테서 너에 대한 호감이나 죄책감도 얻고. 맞지?”“나중에 유효정 씨가 찾아왔을 땐 너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민혁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이제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님은...”“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이젠 괜찮다고.”대답하는 류수미의 태도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내내 정우가 있어서 별로 큰일도 안 생겼고.”“저도 딱히 한 건 없는걸요. 그래도 다행히 아버님께서 잘 이겨내셨어요. 근데 꼭 무리하면 안 되고 잘 휴식해야 한다고 했으니 명심하십시오.”“그래요. 정우 말이 맞아요.”류수미는 연정우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제가 그랬잖아요. 회사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저흰 이제 나이도 있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 하시려고요?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남겨줄 수도...”말하던 류수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봤다.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던 성유리는 류수미의 말을 들은 어느 한순간, 두 주먹을 꽉 쥐었다.분위기가 얼어붙으려고 하던 그때, 연정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류수미도 얼른 대답해 줬다.“그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니? 돌아가서 푹 쉬어,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성유리는 연정우가 언제부터 사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졌는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들이 연정우를 보는 눈빛을 관찰하니 다들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세 사람의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유효정.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국내에선 아무도 유효정의 사망 소식을 신경 쓰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하기야 유씨 가문은 이미 타락한 상태고 그녀의 부모님 또한 세상을 떠났다.그러니 유효정의 사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유리야, 네가 나 좀 바래다줄래?”연정우가 묻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다시
“누가 아픈데요? 중요한 사람인가 보죠? 박한빈 씨가 야밤에 직접 병원에 다녀오는 걸 보면.”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뚫어져라 보며 계속 물었다.그 눈빛을 본 박한빈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이젠 유리한테도 대충 얼버무리면 안 될 것 같네.’이런 원인에서인지 박한빈은 가끔 다른 사람들이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그러나 그건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하지만 자신감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박한빈에게는 그런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 그냥 꽤 중요한 협업 파트너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나 봐. 상황이 되게 위급했다던데...”“근데 내가 갔을 땐 구조가 됐었어. 그래서 나도 오래 남지 않은 거고.”태연하게 말하는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하지만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아마 알지 않을까? 나도 모르겠는데.”박한빈은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다른 말을 꺼냈다.“지금까지 나를 기다린 게 고작 이런 걸 물어보려는 거였어?”성유리는 너무도 느긋한 박한빈의 태도에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으니까.”박한빈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먼저 자. 난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이번에 성유리는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렇지만 박한빈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잠이 안 와?”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박한빈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그럼 뭐라도 좀 할까?”성유리는 대답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을 꼭 끌어안았다.오랫동안 알고 지낸 두 사람이었기에 박한빈은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 수 있었고 지금 성유리가 할 기분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그저 말없이 성유리의 등을 토닥여줬고
돌아온 연정우는 박한빈과 눈을 맞추다 이내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도 아버님께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연정우 씨,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지?”박한빈은 연정우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리고 연정우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혐오와 경계의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박 대표님, 지금 그게...”연정우는 박한빈의 시선에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재산을 위해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죽은 친구의 부모는 잘 챙기십니다?”박한빈은 콧방귀를 끼며 계속 물었다.“그쪽 생각엔 제가 이걸 믿을 것 같습니까?”“사람을 죽인다고요? 박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요?”“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제일 잘 알 겁니다.”연정우는 말 없이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어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이제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하지만 전 이미 어머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아니면 지금 다시 전화해 볼까요? 제가 여기 남는 걸 동의하시는지 안 하시는지?”진지한 얼굴로 묻는 연정우를 박한빈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런데도 연정우는 미소 띤 얼굴로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박 대표님, 설마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여기 남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그 말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저랑 사하나 씨는 전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은요? 유리 때문에 사씨 가문 사람들을 챙기려는 겁니까? 설마 그 사람들이 당신을 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사하나 씨의 죽음은 이제 두 분이 받아들이고 괜찮아지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 믿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일은 잊고 싶어 한다는 걸요. 그러니까... 박
박한빈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하지만 응급실 앞에 서 있는 연정우를 보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췄고 표정을 굳혔다.류수미는 의자에 앉아 연정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마치 그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박 대표님, 오셨습니까?”연정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류수미에게 물었다.“사 회장님은 어떠십니까?”“의사들이 아직 구조 중이에요.”류수미는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요즘 안색이 말이 아니었고 아침에도 심장이 아프다고 했거든요. 월말에 건강검진 받으러 가기로 해서 그때까지 놔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괜찮으실 겁니다.”박한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연정우가 먼저 류수미에게 대답해 줬다.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오늘 네가 우리 보러 오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몰랐을 거야.”“별말씀을요. 저랑 사하나 씨는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두 분을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죠.”연정우는 마치 자상한 사람인 척하며 류수미를 달랬고 그 순간, 응급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환자분 생명에는 이제 위협이 없습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류수미는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사민혁의 아내인 류수미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지만 연정우가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괜찮다고 하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박한빈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아닙니다. 전 여기 남겠어요.”류수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박한빈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 연정우가 먼저 말
사실 박한빈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그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손에서 놀아나는 장난감 같았으니까.하지만 성유리가 그 ‘장난감’들을 놀기로 결정했으니 박한빈은 그녀에게 무대를 내어주기로 결심했다.‘장난감’들의 결말이 어떻든 박한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맹정태의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일부로 목소리를 깔고 멋져 보이려고 애쓴 맹정태의 음성 메시지를 듣자 박한빈은 화가 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연정우도 마찬가지다. 박한빈이 보기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와 만남을 가졌었다.그러니 박한빈은 연정우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매력이 존재할 거라고 여겼다.‘맹정태는 또 뭐야?’‘고작 저딴 놈도 유리한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가? 정말 우습군.’그래서 박한빈은 생각을 바꿨다. 성유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재밌는 ‘놀이’를 하기로.마침 그도 홍지은이라는 사람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기에 그들이 이 도시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박한빈 씨.”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금세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왜 그래?”“아직 저한테 말 안 해주셨어요. 제 핸드폰은 왜 보신 거예요?”“아, 스팸 전화가 와서 그거 받아주다가 우연히 본 거야.”“맹정태 씨 문자는 제일 밑에 있었고 제가 차단까지 했는데 우연히 보셨다고요?”박한빈은 차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리고 순간, 너무 똑똑한 여자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박한빈 씨 핸드폰도 주세요.”한참을 박한빈만 뚫어져라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그러자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박한빈의 핸드폰을 ‘탐험’하기 시작했다.박한빈의 핸드폰 속 문자 내용들은 거의 다 업무에 관한 것이었고 연락처에도 같은 업계 사람들뿐이었다.게다가 문자를 나눈 사람도 몇 없었다.“전에 미리 지우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물었다.“내가 뭘 지우는데?”박한빈은 오히려 웃음
박한빈은 성유리가 건네는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물었다.“안 보세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급한 일 아니잖아. 일단 네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어.”“아, 제가 이미 공장 가서 검사해 봤어요. 지금 맹씨 가문 소유의 공장은 맹정태 씨 매형이 보고 있었어요. 직원은 500명 정도 있고 기간은 25일로 정했대요. 그리고... 만약 재료들이 충분하게 준비됐다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근데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효율이 좋지 않대요. 맹정태 씨 매형도 도박꾼이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요. 그래서 사실 공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료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짧은 시간 내에 필요로 하는 수량을 만들어내려면 그 사람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성유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고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로잡혀 멍해졌다.심지어 어느 한순간,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다.성유리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박한빈의 시선을 발견했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 듣고는 계세요?”“응. 듣고 있어.”박한빈은 그제야 대답하며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래서? 넌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지?”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손가락으로 성유리의 손바닥을 계속 만지작대고 있었다.그 탓에 간지러워진 성유리가 손을 빼내려 하자 박한빈은 힘을 더 세게 주며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맹정태 씨 매형 도박꾼이라고요! 사실 공장에 있던 재료들 다 그 사람이 가져다가 팔았어요. 혼자서 성 씨가 다른 도박꾼이니 만약 이 일이 맹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마어마한 후과를 치러야겠죠.”“그러니까 매형이라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꼭 찾아낼 거예요. 자기 때문에 텅 빈
홍지은은 떠나가려는 성유리를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봤고 그녀는 자신의 침을 챙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룸의 문이 스르르 닫힐 때, 성유리는 남아있는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그 시각 홍지은은 새로 생긴 자신의 팔찌를 감상하고 있었다.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성유리를 의심할 때와 180도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성유리는 홍지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필경 홍지은이 말한 것처럼 박한빈을 무너뜨리려는 성유리의 생각이 누구한테나 이상하게 들릴 테니까.제일 먼저 박한빈의 지금 위치와 수법으로 보자면 절대 감정만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론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한 마음이다.이런 상황에 그 아무도 성유리가 박한빈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담보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홍지은이 잔뜩 경계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성유리가 방금 한 행동들은 다... 홍지은이 자신을 철석같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만약 가능했다면 성유리는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홍지은을 속이기 싫었다.그러나 지금 홍지은에게 바로 지나간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한다면 그녀는 무조건 경계심과 의심을 버리지 않을 게 뻔했다.그래서 성유리가 찾은 변명이자 핑계가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어떻게 됐든... 일은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성유리가 맹정태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박한빈에게 가져다주려고 할 무렵, 캐톡으로 누군가가 성유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왔다.[안녕하십니까. 맹정태입니다.]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성유리는 친구신청을 수락했고 일 분도 채 안 되어 맹정태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보내왔다.[이번 일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성유리는 맹정태가 감사 인사를 하려고 특별히 친구 추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다.그러자 맹정태가 이내 또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과 박 대표님 사이 일은 홍지은에게서 들었습니다.][사모님의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