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보낸 그 눈빛의 의미를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것은 경고였고 또 혐오였다.겉으로 보면 겸손하고 온화해 보이는 박한빈의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박한빈은 차갑기 그지없는 냉혈한이었다.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 성유리는 눈을 아래로 해 쓰레기통에 꽂힌 반으로 찢긴 이혼서류를 주시했다.백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건넨 서류였건만 박한빈은 그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애초에 성유리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성유리의 감정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정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그로부터 이틀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전해 들은 소식은 공식회의에 박한빈이 참석했다는 것이었다.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박한빈은 코앞에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도 변함없는 미모를 유지했는데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가 있어 마치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그런 기사를 보고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도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성유리는 달갑지 않은 그 얼굴을 더 보지 않고 자신의 홈페이지로 넘어가 연재를 재촉하는 댓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성유리는 만화가였지만 성유리가 속한 상류사회에서는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직업이었다.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미술을 배웠지만 그들이 접하는 건 국화나 유화지 성유리가 그리고 있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만화는 아니었다.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성유리의 만화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유리는 답글을 좀 달다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그런데 핸드폰을 내려놓기 바쁘게 성유리의 핸드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진무열에게서 온 문자 때문이었다.“내일 진씨 집안에서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준대요, 유리 씨도 올래요?”미간을 한번 찌푸린 성유리가 답장하려고 하는데 진무열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올 거죠? 며칠 전에 내가 공항에서 유리 씨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줬는데.”진무열의 말에 타자를 하던 성유리의 손가락이 공중에 머물렀다.이미 데리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거기서 다섯
시선을 아래로 한 성유리는 신문에 나온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참 교양 없고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고 난 성유리는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신문을 줍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출발하세요.”성유리의 높낮이 없는 말이 들렸음에도 기사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창까지 올려버렸다.그러자 박한빈도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성유리는 멀어져가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돌아섬으로 성유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성유리만의 몫이었다.하지만 늘 혼자였던 성유리는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파티장은 생각보다 많이 떠들썩했다.오랜 시간 동안 진씨 집안은 진무열이라는 혼외자를 숨기진 않았지만 그를 냉대하며 외국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해 혼외자에 대한 진씨 집안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었는데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주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진무열이 알려주지 않으니 성유리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그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그렇게 소란스러운 곳에 홀로 떨어진 성유리가 진무열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누구야, 너 진짜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그 사람에 의해 성유리의 팔이 잡혀버렸다.“뭘 그렇게 급해 해? 내 말 못 들었어?”원유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댈 때 원유진과 함께 다니던 동생들은 성유리의 팔이 잡히자마자 그 앞에 나서며 길을 막아버렸다.학교 다닐 때와 다름없는 모습에 성유리는
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그래서 진무열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박한빈의 지금 눈빛은 무언의 경고였다, 더는 성유리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그에 진무열이 옅은 웃음을 흘리자 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성유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차에 탄 박한빈은 “펑”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세게 닫았다.그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기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성유리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든 종잇장들은 어김없이 손을 뻗는 박한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그에 성유리는 동공이 확 작아지며 다급히 외쳤다.“돌려줘!”그건 박한빈이 2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지만 성유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리는 화가 나 털이 곤두선 고양이마냥 달려들어 손가락을 펼치며 박한빈 손에 들린 종잇장들을 빼앗으려 했다.처음에는 그저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박한빈도 성유리의 태도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녀에게 종이를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제 큰 손을 들어 성유리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놓으라고! 그건 내 거야!”박한빈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성유리를 무시하며 종잇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때는 차가 이미 떠난 뒤라 차 안의 어두워진 불빛 때문에 박한빈이 불을 켜려 했다.그런데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 쪽으로 몸을 기울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그 순간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건 박한빈이 기억하건대 성유리가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맞춰온 입이었다.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사람이 원체 보수적인 탓인지 이런 쪽에선 한 번도 주동적인 적이 없던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에 박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벙찐 그 잠깐의 틈을 타 성유리는 손쉽게 스케치북을 앗아갔고 바로 제 등 뒤로 숨겼다.그제야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한빈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꺼내.”“이건 내 거야.”더 이상 성유리와 실랑이를 하기엔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박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성유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지금 도연제에 있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전히 평온한 김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가 대답했다.“네.”“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할머님 아프시단다,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어젯밤 성유정의 인스타를 보니 박한빈과 둘이 같은 곳에 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성유리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이 성유리는 김서영의 제안도 거절하려 했다.괜히 반기지도 않는 곳에 억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김서영 앞에서 거절의 말을 하려니 그것 또한 막막했던 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김서영의 성격은 박한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방금도 그냥 성유리에게 통보를 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성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끊긴 전화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십 분이 지나고 도연제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김서영은 성유리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에 들렸던 걸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내가 사람 시켜서 준비하라고 한 생선 죽이야, 좀 있다가 네가 직접 할머님한테 드려.”“신문에 난 일 할머님도 아셨어. 평소에도 박씨 집안 명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네가 한 일도 너도 다 못마땅하실 거야 지금은. 그러니까 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김서영이 차분히 말을 마치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보며 물었다.“어머님도... 아셨어요?”“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는데 어떻게 모르겠니.”성유리는 김서형의 반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성유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서영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원씨 집안 딸도 어릴 때부터 안하무인이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과했던 게 맞아. 네 신분도 생각했어야지. 좀 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
성유리의 웨딩드레스는 맞춤 제작된 것이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해외 최정상급 디자이너를 초청해 손수 바느질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는 점을 고려해 디자이너는 드레스 허리 부분에 조절 가능한 끈을 추가해 체형에 맞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조명 아래에서 마치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성유리는 마음이 이미 메말라 있는 상태였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본 순간 잠시 멍해졌다. 사진 촬영 외에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성유리가 결혼하는 상대마저 같은 남자였다. 첫 번째로 박한빈에게 다가갔던 날, 성유리의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에 그는 마치 하늘의 밝은 달빛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과 갈망을 숨기기만 했다. 그 감정은 어린 시절 먹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솜사탕을 조심스레 숨기는 마음과 비슷했다. 하지만 박한빈과의 결혼 생활 속에서 그녀의 감정은 모두 소진되어 갔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의 관계가 그때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생활 동안 성유리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에게 거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멈추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사모님, 신랑분이 오셨습니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침대에 앉았다. 그들 둘 다 들러리 없이 식을 올리기로 했기 때문에 오늘은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장난스러운 절차도 없었다. 박한빈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성유리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성유리의 손에는 그가 건넨 부케가 들려 있었는데 연분홍빛 장미에는 투명한 이슬이 맺혀 있어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성유리는 부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앞에서 무릎 꿇
“맞아. 하지만 이게 투자라고? 이건 분명 덫이야! 진무열이 일부러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표정에서 서서히 굳어갔다.“만약 신고를 하신다면 제가 증거 몇 가지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며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성시원에게 건넸다. 성시원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는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모든 걸 알고도 내가 이 함정에 빠지는 걸 뻔히 지켜본 거야? 딱 오늘을 위해서?”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모든 걸 대변하고 있었다. 성시원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으며 물었다. “너 미쳤어? 나한테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심지어 성유리를 너한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성시원의 손을 내려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저한테 화내셔도 소용없습니다. 돈은 이미 날아갔고 당신이 제 사무실을 부순다고 해도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제 말대로만 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기회를 드리는 거죠.” 성시원이 박한빈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박한빈은 침착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천성에 배 공장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걸 넘겨드릴 수 있어요. 이후에 꾸준히 자원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비록 회장님이 원하던 상업적 높이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적어도 실업자는 되지 않게 해드리죠.” 성시원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끝내 붙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놓았다. 그의 주먹은 여전히 꽉 쥐어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차 진정이 되는 듯 가라앉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이 진무열이 혼자 한 짓일 리가 없죠. 성
성유리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망고나무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 열매가 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가 몇 년 뒤에는 얼마나 장관일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난 이 나무를 못 보겠지?’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알려주었고 김서영은 안색이 굳어진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다시 잘 될 확률은 없니?” “네.” “근데 난 네가 떠날 것 같지 않구나.”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 “사실 전에 너한테 가라고 했을 때가 제일 좋은 기회였어.” 성유리가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무슨 대답을 하려는 찰나,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빈이는 내 아들이야. 나는 누구보다 더 걔를 잘 알아.” “지금 너희 둘 사이가 나쁘다 해도 한빈이는 너한테 집착할 거야. 절대 유리 너를 떠나게 하지 않을 거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설령 너희 둘 사이에 원한과 원망의 감정만 남아있다고 해도 말이다.” 김서영은 하려던 말들을 다 내뱉었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필경 어젯밤 박한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심한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상황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서영의 말은 다 사실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다음 날 저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심지어는 손에 케이크 하나를 든 채로 말이다.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쳐다만 보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먼저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린 평소대로 살 수 있다고.” “그럼 계속 살던 대로 살자. 우리 둘의 결혼인 이미 한번 실패로 끝을 봤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금성에 있는 사람들 입에 우스운 이야깃거리로 남을 테니까.”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관계라고 해도 같이 살아가자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해가 떠 있는 상태였다. 내리던 눈은 이미 멈췄지만 방 안에는 여전히 성유리 홀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박한빈이 오늘 자신을 찾아와 얘기를 나눌 줄 알았다. 성유리가 아는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이런 일을 질질 끌지는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을 더 끌면 끌수록 박한빈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성유리의 이번 추측은 제대로 빗나갔다. 그날, 박한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쯤에 김서영이 전화를 걸어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오라는 말까지 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몰랐지만 다음 날,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 아마 생활환경이 바뀌어서일까? 김서영의 모습은 전보다 더 생기 있고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늘 입고 있던 우아한 원피스와 액세서리가 아닌 편안 차림으로 머리까지 낮게 묶고 있는 김서영은 보기에 전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젊어진 게 아니라 생동해졌다. 성유리는 늘 김서영이 그림 속에 갇혀있는 여인인 줄 알았지만 편하게 있는 김서영을 보니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그녀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정원에서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끙끙거리며 땅을 파고 있는 김서영을 보던 성유리가 다가가 도움을 주려 했다. 그제야 성유리를 발견한 김서영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니?” “네.” “다른 사람이 선물로 준 망고 나문데 열매가 맺히면 그렇게 맛있다더라. 내년이면 열매가 맺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려고. 아, 맞다! 유리 너도 망고 좋아하지 않니?” 성유리는 스스로도 언제부터 망고를 즐겨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서영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박한빈이 전에 사줬던 망고 케이크가 떠올랐다. ‘케이크 좀 먹었다고 내가 망고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가?’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나무 심으면 안 되지 않나요?” “그렇지? 근데 누가 그러더라. 정성껏 나무를 심으면 시간이 늦어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