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아래로 한 성유리는 신문에 나온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참 교양 없고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고 난 성유리는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신문을 줍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출발하세요.”성유리의 높낮이 없는 말이 들렸음에도 기사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창까지 올려버렸다.그러자 박한빈도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성유리는 멀어져가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돌아섬으로 성유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성유리만의 몫이었다.하지만 늘 혼자였던 성유리는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파티장은 생각보다 많이 떠들썩했다.오랜 시간 동안 진씨 집안은 진무열이라는 혼외자를 숨기진 않았지만 그를 냉대하며 외국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해 혼외자에 대한 진씨 집안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었는데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주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진무열이 알려주지 않으니 성유리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그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그렇게 소란스러운 곳에 홀로 떨어진 성유리가 진무열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누구야, 너 진짜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그 사람에 의해 성유리의 팔이 잡혀버렸다.“뭘 그렇게 급해 해? 내 말 못 들었어?”원유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댈 때 원유진과 함께 다니던 동생들은 성유리의 팔이 잡히자마자 그 앞에 나서며 길을 막아버렸다.학교 다닐 때와 다름없는 모습에 성유리는
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그래서 진무열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박한빈의 지금 눈빛은 무언의 경고였다, 더는 성유리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그에 진무열이 옅은 웃음을 흘리자 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성유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차에 탄 박한빈은 “펑”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세게 닫았다.그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기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성유리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든 종잇장들은 어김없이 손을 뻗는 박한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그에 성유리는 동공이 확 작아지며 다급히 외쳤다.“돌려줘!”그건 박한빈이 2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지만 성유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리는 화가 나 털이 곤두선 고양이마냥 달려들어 손가락을 펼치며 박한빈 손에 들린 종잇장들을 빼앗으려 했다.처음에는 그저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박한빈도 성유리의 태도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녀에게 종이를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제 큰 손을 들어 성유리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놓으라고! 그건 내 거야!”박한빈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성유리를 무시하며 종잇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때는 차가 이미 떠난 뒤라 차 안의 어두워진 불빛 때문에 박한빈이 불을 켜려 했다.그런데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 쪽으로 몸을 기울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그 순간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건 박한빈이 기억하건대 성유리가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맞춰온 입이었다.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사람이 원체 보수적인 탓인지 이런 쪽에선 한 번도 주동적인 적이 없던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에 박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벙찐 그 잠깐의 틈을 타 성유리는 손쉽게 스케치북을 앗아갔고 바로 제 등 뒤로 숨겼다.그제야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한빈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꺼내.”“이건 내 거야.”더 이상 성유리와 실랑이를 하기엔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박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성유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지금 도연제에 있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전히 평온한 김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가 대답했다.“네.”“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할머님 아프시단다,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어젯밤 성유정의 인스타를 보니 박한빈과 둘이 같은 곳에 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성유리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이 성유리는 김서영의 제안도 거절하려 했다.괜히 반기지도 않는 곳에 억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김서영 앞에서 거절의 말을 하려니 그것 또한 막막했던 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김서영의 성격은 박한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방금도 그냥 성유리에게 통보를 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성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끊긴 전화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십 분이 지나고 도연제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김서영은 성유리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에 들렸던 걸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내가 사람 시켜서 준비하라고 한 생선 죽이야, 좀 있다가 네가 직접 할머님한테 드려.”“신문에 난 일 할머님도 아셨어. 평소에도 박씨 집안 명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네가 한 일도 너도 다 못마땅하실 거야 지금은. 그러니까 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김서영이 차분히 말을 마치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보며 물었다.“어머님도... 아셨어요?”“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는데 어떻게 모르겠니.”성유리는 김서형의 반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성유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서영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원씨 집안 딸도 어릴 때부터 안하무인이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과했던 게 맞아. 네 신분도 생각했어야지. 좀 있다
“한빈아, 내가 한 말 들었어?”어르신의 이어지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안에 박한빈도 함께 있다는 걸 알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할머니, 그 얘긴 안 꺼내시기로 하셨잖아요.”“그건 걔가 제 일은 잘했을 때의 얘기지, 봐봐,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말을 하던 어르신은 갑자기 연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괜찮아.”하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은 어르신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한빈아, 넌 내 하나뿐인 손자야. 나는 당연히 네가 잘 되길 바라고 있어.”“네 엄마가 그때는 지화의 주식으로 널 협박해서 결혼시켰지만 이젠 아니잖니. 넌 더 이상 네 엄마한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 그러니 이혼하는 게 어때?”어르신의 말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바라던 바였기에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좀 전까지만 해도 아련한 눈으로 박한빈을 보던 성유정은 갑자기 들어오는 성유리를 보자마자 낯빛이 변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언니.”성유리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들고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이건 어머님이 갖다 주라고 하신 생선 죽이에요.”“너 이게 무슨 경우야?”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김난희에 성유리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왜요?”“오기 싫으면 오질 말 것이지. 누구 보라고 그런 얼굴을 하고 들어와, 난 진짜 너 같은...”“알겠습니다 그럼.”김난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이건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이라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는데 그래도 반응이 제일 빨랐던 박한빈이 바로 성유리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성유리.”그저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경고는 너무나도 선명했다.성유리는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박한빈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왜? 여긴 날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겠다잖아. 아니야?”“할머니께 사과드려.”성유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또 제 할 말만 하는 박한빈에 화가 난 성유리는 그와 마주친 눈을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하늘이가 이제 막 박한빈 씨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좀 더 잘 대해주실 수는 없어요?”“내가 하늘이한테 못 해주고 있나?”그제야 침묵하던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데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그게 다예요?”“그럼 네 생각엔?”박한빈이 피식 웃어 보이며 되물었다. 성유리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으려 했지만 박한빈은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안고는 침실로 빠르게 걸어갔다.“뭐 하시는 거예요!”놀란 성유리가 외치자 박한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네 생각엔?”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아까 박한빈 씨가 전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응. 그래서 쉬게 해주려고.”그렇게 말하면서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침실로 데려와 침대 위에 눕혔다.그는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발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곧이어 성유리는 침대 위에 깔리듯 눕혀졌다.“박한빈 씨...”그녀는 박한빈의 다 낫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박한빈의 동작은 다소 조급했고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었다.당황한 성유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의 손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그 순간,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이 단숨에 벗겨졌고 그 바람에 단추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또랑또랑한 소리를 냈다.하지만 바로 그때, 침묵을 깨듯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무시한 채 계속 성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듣다 못한 성유리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전화 받으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표정을 굳혔지만 결국
박한빈은 여기가 공공장소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사실, 진짜로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성유리를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물론 이 방식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이긴 했지만 성유리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비행기는 곧 금성에 도착했다.성유리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김서영이 하늘이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꽉 껴안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런 아이를 살며시 안았지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방금 전,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만약 그때 정말로 박한빈과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하늘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니었을까?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두 사람 다 무사히 돌아왔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이를 꼭 안았다.한편, 김서영은 조용히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을 눈치챈 그는 가만히 서서 김서영이 자신의 안전을 확인할 시간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걱정 마세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 정도니까.”박한빈의 말투는 상당히 가벼웠다.원래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김서영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인가?”그 말 속에 담긴 불만을 박한빈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다.”김서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대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집에 가자.”짧은 김서영의 한마디에 성유리는 가볍게 대답한 뒤, 허리를 숙여 하늘이를 안아 올렸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그녀의 가녀린 체격이 신경 쓰였는지 이내 다가와 말했다.“내가 안을게.”처음에 성유리는 거절하려 했다.평소라면 하늘이도 스스로 걸으려 하거나 내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박한빈을 한참 바라보더니 먼저 두 팔을 내밀었다.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성유리와 김서영도 순간 놀랐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반박하지 못했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만약 저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랑 그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당신도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음, 말하자면 그렇긴 하지.”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말하면서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넌 네 남편을 너무 얕본 거지.”처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얼른 박한빈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렸다.지금 비행기는 아직 이륙 전이라, 창밖에는 끝없이 평탄한 활주로만 보일 뿐이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물었다.“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누가 부끄러워한댔어요?”성유리는 즉시 반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박한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그럼 이건 왜 이렇게 빨개졌는데?”“더워서요!”성유리는 단박에 부정하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냈다.마침 그 순간, 승무원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말을 들은 승무원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고객님, 혹시 기내 온도가 불편하신가요?”성유리는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게 되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조금 덥긴 하네요.”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성유리의 말에 승무원은 즉시 온도를 조절했고 그 바람에 그녀 쪽의 바람 세기가 확연히 강해졌다.원래도 얇은 옷차림이었던 성유리는 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옆에 있던 박한빈이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성유리가 자신과 끝까지 맞서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
성유리와 박한빈이 퇴원 후 도한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박한빈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박세빈 씨의 유골을 가져가시겠습니까?”이번 사건에서 박세빈은 ‘주범’이었고 박한빈은 명백한 피해자였다.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였다.하지만 동시에 박한빈은 박세빈의 형이었고 이 세상에서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그렇기에 경찰이 한 번쯤은 물어볼 법도 했다.그 질문을 들었을 때,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필요 없습니다. 처리할 방법을 모르겠으면 바다에 뿌리든가, 아니면 하수구에 버려도 됩니다.”말을 끝낸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비록 통화 중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수화기 너머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박한빈이 끝까지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에서 박세빈을 데리고 나왔던 모습이 깊은 형제애처럼 보였을 테니까.그런데 정작 본인은 박세빈의 유골을 하수구에 버려도 된다고 말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그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생각해?”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 씨생각엔... 박세빈 씨 뒤에 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이번이 그녀가 처음으로 박한빈에게 던진 질문이었다.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확신보다는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박한빈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들었다가 되물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어쩌면 성유리도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두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더군다나 지금 박한빈에게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박세빈은 이미 죽었고 죽기 전까지도 연정우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결국 지금으로선 단순한 의심일 뿐, 연정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
박한빈은 원래 그녀가 푹 잘 수 있도록 내버려두려고 했다.하지만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결국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잡았다.잘 자다가 숨이 막히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그러자 눈앞에는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한빈이 있었다.“뭐 하는 거예요?”몽롱한 상태에서도 성유리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냈다.“성유리.”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나?”“이번에... 내가 정말 죽었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성유리는 가만히 누워 박한빈을 쳐다만 봤고 방금까지도 꿈을 꾸는 것 같았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졌다.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당장 다른 사람과 재혼하겠죠.”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동공이 급격히 떨렸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다시 자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누구랑 재혼할 건데?”“누구든 상관없어요. 박한빈 씨가 말했잖아요? 저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난 네가 살아야 한다고 했지 재혼하라고 한 적 없어!”“저 혼자 애 키우기 너무 힘들잖아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부담이 좀 줄겠죠. 당신도 제가 너무 고생하는 건 싫을 거 아니에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잠깐... 나 지금 설득당한 건가?’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성유리의 손을 다시 꽉 붙잡았다.“안 돼! 네가 살아 있는 건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건 절대 안 돼!”“내가 남겨준 돈이 그렇게도 부족해? 보모를 열 명, 스무 명이라도 고용하면 될 거 아냐! 애 키우는 게 문제면 그렇게 해결하면 되잖아!”이를 악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점점 분노가 서렸다.애초에 이런 가정법적인
의사는 빠르게 병실로 와 성유리를 위해 검사를 재개했다.다행히 그날 현장 깊은 곳으로 가지 않았기에 짙은 연기 또한 기도에 많이 들어가지 않아 상황은 최악이 아니었다.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하지만 서훈은 박한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박세빈 씨가 사망하셨습니다.]박한빈이 그를 집에서 구조할 때도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박한빈의 복부를 있는 힘껏 찔렀다.박세빈이 형인 박한빈을 얼마나 증오하고 혐오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지금, 증오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바보처럼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이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로 만들어줬다.게다가 박세빈의 죽음은 그와 연정우 사이에서 벌어진 거래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한빈이 아무리 악을 쓰고 구하려고 해도 쓸데가 없었다.진병오 측 사람들이 박한빈을 감금하고 납치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박세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그러니 이번 일은 이렇게 깔끔한 끝을 맺는 것이다.연정우를 조사한다고 해도 그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표시될 것이 뻔하다.이건 박한빈이 원하는 결과가 아닌데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박한빈은 문득 다른 일이 먼저 떠올랐다.‘진병오 그 사람들이 유리한테 어떻게 연락했지?’당시 박한빈은 진병오에 의해 핸드폰을 몰수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엔 비밀번호가 있었으니 그들은 박한빈의 핸드폰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연정우가 성유리의 연락처를 보내주지 않았으면 절대 그녀한테 연락을 못 한다는 말이다.도대체 왜 그들은 성유리에게 연락해 돈을 요구한 걸까? 만약 박세빈이 정체를 계속 숨겼고 박한빈이 불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은 어떻게 됐을까?박한빈은 더 이상 자세한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다친 사실을 둘 다 금성 쪽엔 알리고 싶지 않아 했지만 너무 큰 화재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박세빈이 죽었으니 김서영이 모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성유리는 말하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그러자 앞에 있던 소방원은 조용히 자신이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어서 건넸다.그녀는 소방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방독면을 건네받지 않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싫어요.”“만약 박한빈 씨가 안에 있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라면... 그냥 같이 갈래요.”성유리의 말에 소방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리야.”남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행여나 자신이 환청일까 봐 두려워 고개를 돌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성유리.”그가 성유리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치기 전까지는.그녀가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토록 찾았던 박한빈이 그곳에 서 있었다.그는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하얀 옷 위에 까만 자국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까만 자국이 아닌 핏자국이었다.평소 정갈한 모습과는 달리 한껏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급박했던 현장 상황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멍하니 박한빈을 바라보다 환각이 아님을 깨닫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당시 박한빈은 이미 다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성유리가 달려와 끌어안을 때, 그 힘에 배 위에 나 있던 상처 부위가 찢어져 버렸다.꽤 강한 고통이 느껴짐에도 박한빈은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성유리를 안아줬다.이미 그녀의 눈물은 박한빈의 셔츠를 다 적셨고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많이 무섭고 놀랐나 보네.’두 사람의 몸이 가까이 닿는 순간, 그들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걱정 많이 했어?”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그렇게 쉽게 안 죽어.”“난 방금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숙여보자 그녀는 이미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뭐지?’그가 손에 힘을 살짝 푸는 순간 성유리는 픽 쓰러져버렸다.깜짝 놀란 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