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처음 말했을 때는 홧김에 한 말이라도 칠 수 있어도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성유정은 입가에서는 벌써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놀란 척을 하며 물었다.“어떻게 이혼이란 말을 이렇게 경솔하게 해? 언니랑 형부...”성유정을 상대하기도 귀찮았던 성유리는 침대에 앉아있는 김난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리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김난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이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며칠 전 박한빈과 똑같은 반응에 옅은 웃음을 흘린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아니요, 진심입니다.”성유리는 마침내 다시 박한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더는 감정도 속박도 없는 사인데, 같이 살면서 서로를 증오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낫죠.”“안돼!”김난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성유리가 어르신을 잘 달래서 점수를 따길 바랐던 김서영은 들어오자마자 들은 황당한 소리에 소리부터 질렀다.“결혼 같은 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대충 결정해? 이건 두 집안이 20년 전부터 약속했던 결혼이야. 네가...”“진짜 이혼할 거야?”김서영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말을 끊으며 질문을 던졌다.당연히 김서영이 아니라 성유리를 향한 질문이었다.“응, 할 거야.”“그래, 그럼 후회하지마.”“서류는 언제 낼 거야?”평온한 둘의 대화를 보던 김서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쳤다.“박한빈!”“사모님.”김서영의 외침에 대답한 건 박한빈이 아니라 성유리였다.“이 년 동안 저 보살펴주시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지만 오늘 이 결정은... 저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결혼이랑 감정은 다 오랫동안 정성 들여 가꿔야 하는 거라고. 근데 전 이미...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안 맞는 건 그냥 평생 안 맞는 것 같아요.”“기대 저버려서 죄송해요
성유리가 택시에 타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당장 집에 와.”윤청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성유리는 원래도 가려고 했던 집이기에 별로 고민은 하지 않았다.정말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윤청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성유리의 뺨을 때렸다.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성유리는 문을 열자마자 맞은 강한 세기의 뺨에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도 흘러내렸고 귀에서 이명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아?”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윤청하가 또다시 손을 들어 올릴 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그 손을 멈추었다.“그만해.”그 목소리에 윤청하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손은 내렸다.낯선 그녀의 고분고분한 모습에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회색 조끼에 하얀 셔츠를 받쳐입은 중년 남자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관리를 잘해서인지 남자는 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몸매에 주름 하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 남자는 바로 성유리의 아버지 성시원이었다.성시원은 성유리가 보는 앞에서 윤청하는 자기 쪽으로 끌며 말했다.“애도 다 컸는데 손을 왜 대?”“나는 뭐 손대고 싶어서 대는 줄 알아요? 쟤가 하는 짓을 좀 봐요!”윤청하는 목이 쉴 정도로 소리치며 말했다.“전에 유정이더러 한빈이랑 결혼하라 했더니 네가 반대했잖아. 그렇게 고집 피워서 결혼해놓고 이제 와서 이혼한다고? 그냥 우리 성씨 집안 망신시키려고 작정했지?”“됐어, 당신도 진정해.”히스테리를 부리는 아내와 달리 성시원은 많이 차분해 보였다.성시원은 제 아내부터 다독여놓고는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나랑 같이 박씨 집안에 가자, 가서 잘 사과드리고 오늘 일은 없었던...”“안 가요.”제 말까지 끊으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성유리에 성시원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성유리, 뭐 하자는 거야 지금?”“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아니고 많이 고민해보고 내린 결정이에요.”“우리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한 결정이 어떻게 고민을 많이 해보고 내린
왜 성유정을 더 좋아할까.이건 성유리가 이 집에 금방 들어왔을 때 매일매일 생각하던 문제였다.사랑받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기에 성유리는 성유정이 이쁨받으려고 하는 행동들을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항상 성유정만을 좋아했다, 하다못해 부모님 역시.그러던 어느 날 성유리가 어머니께 차를 타드렸는데 겉으로는 고맙다고 하던 어머니가 바로 뒤로 돌아 차를 화분에 버리는 모습을 보고 난 뒤부터 성유리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그리고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도 바로 그날 밤이었다.윤청하가 성시원에게 자신의 HIV 검사에 대해 제안하는 대화였다.그때는 어려서 HIV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에이즈 병이었다.성유리가 어렸을 때 양부에게 강간을 당할뻔한 적이 있었는데 결론적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부모라는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성유리를 더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성유리에게는 그들 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던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제 눈앞의 저 잔인한 얼굴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하지만 성유리는 이내 제 감정을 추스르고 눈을 떴다.“뭐가 됐든 이젠 저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이제 부모님의 사랑 따위 필요 없거든요.”“무슨 말이야 그게?”“계속 저 데려온 거 후회하셨잖아요. 이젠 그러실 필요 없다고요. 제가 나갈게요.”“앞으로 어머니 아버지한테는 성유정이라는 자랑스러운 딸밖에 없어요.”“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윤청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게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놀라서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게 궁금하지 않았기에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어머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도 후회했거든요.”“만약 그때 제가 그 마을에서 죽어버렸다면 내 부모님은 날 사랑한다는 환상이라도 안고 죽었을 테니까.”그 말에 윤청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떨어댔다.성유리는 그런 그녀에게는 눈길을 주
숙자 아주머니가 성유리를 붙잡으려 할 때 밖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오자 아주머니는 빠르게 뛰쳐나가 박한빈에게 말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이 무슨 일인지 짐을 다 싸 들고 나가려고 하세요!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아요!”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라 박한빈은 놀라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짐을 끌고 내려오는 성유리가 보였다.박한빈은 캐리어를 한번 보더니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나 있는 성유리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성유리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법원에 언제 갈 거야?”“변호사 오라고 했어.”성유리의 얼굴에서 눈을 뗀 박한빈이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대꾸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원하는 거 없거든.”성유리의 말에 계단을 올라가던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한 푼도 안 가지고 나가도 합의서에는 사인해야 해.”박한빈의 뜻을 알아들은 성유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제야 상황파악을 끝낸 숙자 아주머니가 물었다.“도련님, 이혼... 하세요?”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박한빈은 말을 마친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고 성유리는 짐을 현관까지 끌고 간 뒤 캐리어 위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간신히 정신을 차린 숙자 아주머니는 서둘러 김서영에게 연락했고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자 아주머니는 알겠다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성유리는 비록 그들의 대화를 듣진 못했지만 숙자 아주머니의 반응으로부터 김서영이 이혼에 결국 동의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예상했던 바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서영에 대해서는 살짝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젠 다 잘 해결된 것 같았다.박한빈이 부른 변호사는 금방 집에 도착했고 이혼 합의서에는 성유리가 말한 대로 재산분할은 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하지만 원래 박한빈에게서 뭘 바란 적이 없던 성유리였기에 고민도 없이 바로 사인을 마쳤다.“대표님, 법원은 내일 오전 열 시에 다녀오시면 됩니다
성유리는 문득 결혼할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성씨 집안에서 반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성씨 집안의 장녀였기에 그녀의 결혼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반년 동안 예식장, 드레스, 결혼사진 할 것 없이 이런저런 결혼 준비 때문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었다.그때는 모든 일정을 다 중지하고 결혼이라는 대사 중심으로 하며 오랜 시간 들여 준비했었는데 이혼은 말 몇 마디로 끝내버리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유능한 변호사 덕분에 성유리와 박한빈은 유예기간도 없이 30분 만에 모든 걸 정리해버렸다.그리고 빠르게 이혼 증명서를 받는 날이 다가왔다.이미 이혼 증명서를 받은 박한빈은 지금 아주 바빠 보였다.여기저기에서 온 연락들을 처리하며 한 손으론 이혼 증명서를 챙겨 들고 다른 손으론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성유리는 마지막으로 박한빈에게 작별인사나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법원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이혼 증명서만 떡하니 놓여있었다.성유리는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이혼 증명서를 집어 들었다.2년의 결혼생활이 이로써 막을 내렸다.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해서 허무하게 끝나버린 결혼생활, 그 2년 동안 성유리는 매일매일 홀라 조마조마하며 살았던 것 같다.그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이 성유리의 생각을 멈추었다.“이게 뭐야?!”성유리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너 장난해? 아침에 보낸 다음 편, 남자 주인공이 왜 갑자기 죽는데?!”“적혀있잖아, 교통사고라고.”“미쳤어? 프러포즈 당일에 죽는 남자 주인공이 어딨어? 너 독자분들한테 치여 죽고 싶은 거야?”편집자의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그럴 리가, 그분들은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내가 알아! 제발 장난치지 말고 유리야... 이거 이대로 올리면 위에서 나만 갈군다고...”“괜찮아,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진짜? 남자 주인공 환생해? 아니면 시간을 되돌리나? 안돼, 나한테 먼저 알려줘 일단.”“아니, 여주가 환생하는 거
송효주는 그런 성유리를 노려보며 말했다.“뭐가 좋아?”“네가 그리는 건 로맨스 만화라고, 달달하고 사랑만 하는 그런 거! 네가 쓴 대로 내보냈다가는 우리 사이트만 욕먹어.”“기분이 나쁘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한 보름 정도 쉬어도 좋으니까 마음 추스르고 다시 그려.”송효주의 단호한 태도에 성유리도 더는 반박을 하지 않았다.그제야 송효주도 성유리를 보며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남편이랑 이혼은 왜 한 거야?”“전에는 잘 살았잖아, 삼시 세끼 챙겨주는 사람 있고 한도 없는 카드에 신경 쓰지 않는 남편, 이건 완전 완벽한 거잖아!”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고개를 돌려 물었디.“밥 아직 안 먹었지? 가자, 밥 사줄게.”...자경 라운지.이곳은 금성에서 제일가는 럭셔리한 곳이었다.접대하는 모든 손님들은 금성에서 이름 꽤나 알린 사람들이었고 다들 회원카드가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출입을 하지 않던 성유정도 오늘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있었다.당연히 저 소파 정중앙에 앉아있는 사람 때문이었다.상류사회의 주축이 되는 박한빈의 이혼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오늘 이 자리는 박한빈이 다시 솔로가 된 걸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박한빈은 차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오만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이 굳이 마련한 자리를 거절하진 않았다.그런 와중에 성유정이 룸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그녀를 보며 물었다.“너희 언니랑 한빈이 이혼했다는 거 진짜야?”박한빈에게는 차마 물을 용기가 없었던 그들이기에 마침 들어온 성유정을 붙잡고 따져 물었다.성유정은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아이고, 그때는 그 난리를 치면서 결혼하더니 이혼은 이렇게 쉽게 해?”“그러니까, 나도 엄청 놀랐어.”성유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분명 잘 사는 것 같았는데...”“성유리 지도 해보니까 안된다는 걸 안 거겠지.”“그냥 짜증 한 번 부린 건데 박
아무도 성유정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아까 진무열 얘기를 꺼냈던 사람은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그건 모르지. 근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니, 어차피 우리랑 어울릴 사람은 아닌데.”“한빈이 형, 제가 한잔 따라드릴게요.”남자의 이 행동은 아까의 실언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함이었다.박한빈이 아무리 성유리를 싫어한다 해도 결혼 기간 동안 진무열이랑 엮여서 이혼했다는 소문이라도 떠돌게 되면 그건 또 다른 개념의 문제였기에 남자는 눈치가 조금은 남았는지 서둘러 굽히고 들어갔다.다행히 박한빈도 별말 하지 않고 술잔을 부딪쳐주었다.그렇게 한 잔씩 마시고 나서 그 남자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박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난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내 앞으로 계산서 달아두고 잘 놀다가.”“네? 왜...”인사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밖으로 나갔고 성유정은 빠르게 그 뒤를 쫓아갔다.“오빠!”“왜?”고개를 돌린 박한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표정에 성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나... 택시 타고 왔는데, 데려다줄 수 있어?”“그래.”박한빈은 예전처럼 성유정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저를 대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음을 확인한 성유정이 안도의 숨을 내뱉고는 전처럼 예쁘게 웃으며 박한빈과 나란히 서서 라운지를 빠져나갔다.자경 라운지가 번창하면서 거리 전체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해 늦은 시각에도 거리에는 많은 바와 라운지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그 형형색색의 불빛들은 한 잔 한 잔의 칵테일 같았고 서늘한 밤공기에도 사치의 냄새가 자욱했다.하지만 그런 것들은 박한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런데 그때 박한빈에게 물어볼 게 있어 고개를 들던 성유정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파란색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는 성유리였는데 평소와 달리 진한 화장에 하늘 높이 솟은 아이라인은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했고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녀를 한껏 더 매혹적이게 만들었다.
사람은 그곳에 서 있었지만 시선은 성유리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거기 서서 성유정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그래서 성유리도 박한빈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는 성유정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집에 가자 언니. 엄마 아빠랑 그만 싸우면 안 돼?”“미안한데 난 안가.”성유정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하지만 성유정은 포기하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송효주를 보며 말했다.“언니 친구분이시죠? 언니한테 저랑 같이 집에 좀...”“언니도 이 나이 먹었으면 동생분이 말 안 해도 알아서 해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웃으며 말하는 송효주에 성유정은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부모님이 언니를 보고 싶어 하세요! 언니는 엄마 아빠가 언니 걱정만 하게 내버려 둘 거야? 어쩜 사람이 그래?”말을 마친 성유정이 눈물까지 흘리자 송효주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동생분이 연기를 잘하시네, 연예이나 해보지 그래요?”필터링 없는 송효주의 말에 성유정이 벙쪄있자 송효주는 그 틈을 타 성유리를 잡아끌며 말했다.“가자 우린.”“언니!”하지만 기회를 놓칠 리 없던 성유정이 성유리를 잡으려 했지만 그걸 먼저 예상하고 있었던 성유리가 팔을 피했는데 여기서 또 의외인 것은 그 동작 하나 때문에 성유정이 넘어졌다는 것이다.그제야 박한빈도 더는 그곳에 서 있지 않고 성유정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잡아주었다.“나 괜찮아 한빈 오빠.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한빈? 박한빈? 당신이 유리 전남편이에요?”“가자.”또 그들과 엮이기 싫었던 성유리가 송효주를 잡아끌었지만 송효주는 움직이지 않고 박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이건 무슨 상황이에요? 처제랑 형부? 이거 뭐 드라마에요?”“헛소리하지 마세요!”송효주의 말에 성유정이 다급히 나서며 해명했다.“나랑 한빈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요즘이 어떤 시댄데, 남녀 둘이서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