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그래서 진무열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박한빈의 지금 눈빛은 무언의 경고였다, 더는 성유리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그에 진무열이 옅은 웃음을 흘리자 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성유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차에 탄 박한빈은 “펑”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세게 닫았다.그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기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성유리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든 종잇장들은 어김없이 손을 뻗는 박한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그에 성유리는 동공이 확 작아지며 다급히 외쳤다.“돌려줘!”그건 박한빈이 2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지만 성유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리는 화가 나 털이 곤두선 고양이마냥 달려들어 손가락을 펼치며 박한빈 손에 들린 종잇장들을 빼앗으려 했다.처음에는 그저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박한빈도 성유리의 태도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녀에게 종이를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제 큰 손을 들어 성유리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놓으라고! 그건 내 거야!”박한빈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성유리를 무시하며 종잇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때는 차가 이미 떠난 뒤라 차 안의 어두워진 불빛 때문에 박한빈이 불을 켜려 했다.그런데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 쪽으로 몸을 기울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그 순간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건 박한빈이 기억하건대 성유리가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맞춰온 입이었다.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사람이 원체 보수적인 탓인지 이런 쪽에선 한 번도 주동적인 적이 없던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에 박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벙찐 그 잠깐의 틈을 타 성유리는 손쉽게 스케치북을 앗아갔고 바로 제 등 뒤로 숨겼다.그제야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한빈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꺼내.”“이건 내 거야.”더 이상 성유리와 실랑이를 하기엔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박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성유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지금 도연제에 있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전히 평온한 김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가 대답했다.“네.”“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할머님 아프시단다,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어젯밤 성유정의 인스타를 보니 박한빈과 둘이 같은 곳에 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성유리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이 성유리는 김서영의 제안도 거절하려 했다.괜히 반기지도 않는 곳에 억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김서영 앞에서 거절의 말을 하려니 그것 또한 막막했던 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김서영의 성격은 박한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방금도 그냥 성유리에게 통보를 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성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끊긴 전화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십 분이 지나고 도연제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김서영은 성유리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에 들렸던 걸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내가 사람 시켜서 준비하라고 한 생선 죽이야, 좀 있다가 네가 직접 할머님한테 드려.”“신문에 난 일 할머님도 아셨어. 평소에도 박씨 집안 명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네가 한 일도 너도 다 못마땅하실 거야 지금은. 그러니까 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김서영이 차분히 말을 마치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보며 물었다.“어머님도... 아셨어요?”“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는데 어떻게 모르겠니.”성유리는 김서형의 반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성유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서영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원씨 집안 딸도 어릴 때부터 안하무인이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과했던 게 맞아. 네 신분도 생각했어야지. 좀 있다
“한빈아, 내가 한 말 들었어?”어르신의 이어지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안에 박한빈도 함께 있다는 걸 알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할머니, 그 얘긴 안 꺼내시기로 하셨잖아요.”“그건 걔가 제 일은 잘했을 때의 얘기지, 봐봐,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말을 하던 어르신은 갑자기 연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괜찮아.”하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은 어르신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한빈아, 넌 내 하나뿐인 손자야. 나는 당연히 네가 잘 되길 바라고 있어.”“네 엄마가 그때는 지화의 주식으로 널 협박해서 결혼시켰지만 이젠 아니잖니. 넌 더 이상 네 엄마한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 그러니 이혼하는 게 어때?”어르신의 말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바라던 바였기에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좀 전까지만 해도 아련한 눈으로 박한빈을 보던 성유정은 갑자기 들어오는 성유리를 보자마자 낯빛이 변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언니.”성유리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들고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이건 어머님이 갖다 주라고 하신 생선 죽이에요.”“너 이게 무슨 경우야?”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김난희에 성유리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왜요?”“오기 싫으면 오질 말 것이지. 누구 보라고 그런 얼굴을 하고 들어와, 난 진짜 너 같은...”“알겠습니다 그럼.”김난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이건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이라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는데 그래도 반응이 제일 빨랐던 박한빈이 바로 성유리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성유리.”그저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경고는 너무나도 선명했다.성유리는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박한빈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왜? 여긴 날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겠다잖아. 아니야?”“할머니께 사과드려.”성유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또 제 할 말만 하는 박한빈에 화가 난 성유리는 그와 마주친 눈을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처음 말했을 때는 홧김에 한 말이라도 칠 수 있어도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성유정은 입가에서는 벌써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놀란 척을 하며 물었다.“어떻게 이혼이란 말을 이렇게 경솔하게 해? 언니랑 형부...”성유정을 상대하기도 귀찮았던 성유리는 침대에 앉아있는 김난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리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김난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이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며칠 전 박한빈과 똑같은 반응에 옅은 웃음을 흘린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아니요, 진심입니다.”성유리는 마침내 다시 박한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더는 감정도 속박도 없는 사인데, 같이 살면서 서로를 증오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낫죠.”“안돼!”김난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성유리가 어르신을 잘 달래서 점수를 따길 바랐던 김서영은 들어오자마자 들은 황당한 소리에 소리부터 질렀다.“결혼 같은 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대충 결정해? 이건 두 집안이 20년 전부터 약속했던 결혼이야. 네가...”“진짜 이혼할 거야?”김서영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말을 끊으며 질문을 던졌다.당연히 김서영이 아니라 성유리를 향한 질문이었다.“응, 할 거야.”“그래, 그럼 후회하지마.”“서류는 언제 낼 거야?”평온한 둘의 대화를 보던 김서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쳤다.“박한빈!”“사모님.”김서영의 외침에 대답한 건 박한빈이 아니라 성유리였다.“이 년 동안 저 보살펴주시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지만 오늘 이 결정은... 저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결혼이랑 감정은 다 오랫동안 정성 들여 가꿔야 하는 거라고. 근데 전 이미...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안 맞는 건 그냥 평생 안 맞는 것 같아요.”“기대 저버려서 죄송해요
박한빈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몸을 돌려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찾아.”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러자 류수미가 다급히 외쳤다.“박한빈 씨! 여긴 사씨 저택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무단 침입이라는 거 모르세요?”“제 아내가 당신들께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러 왔는데 실종됐습니다.”“그런데 제가 이곳을 수색하는 게 뭐가 문제죠?”“설마 저희가 유리를 숨겼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경찰 측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성유리 씨는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범인은 사씨 저택의 구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CCTV가 설치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성유리 씨를 데려갈 때 모든 감시를 피해 움직였습니다.”그들이 포착한 건 단 한 장의 장면이었다.카메라 구석에 스치듯 찍힌 아주 잠깐 드러난 손목 한 조각.성유리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축 늘어진 팔이 순간적으로 화면에 포착된 것이었다.고작 2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박한빈은 그 한순간을 보고도 확신했다.“이건 성유리가 맞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럼 지금 유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현재 차량 소유자를 추적 중입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바로 경찰과의 통화를 끝냈다.그리고 마치 한순간 힘이 빠진 풍선처럼 옆 벽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그 순간, 류수미의 날 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제 확실해졌죠? 유리는 여기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 태도에 류수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참다못한 그녀가 박한빈을 향해 다가와 뺨을
박한빈은 현재 도한시에 머물고 있었고 그 무렵 에릭은 막 보석으로 풀려난 참이었다.사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억울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었고 문제의 물건을 가져온 것도 그가 아니었다.정작 그걸 들고 온 사람은 죽었고 에릭과 함께 있던 사람들만 모조리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에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자신의 결백만 입증하면 이곳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할 수 없었다.문제는 박한빈이었다.그의 기본적인 사업들은 여전히 국내에 있었고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에게 미칠 영향은 치명적일 터였다.그래서 직접 금성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경찰 수사에 협조한 것이다.이곳 경찰이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준다면 박한빈을 음해하려던 언론 보도는 모두 허위 사실 유포가 될 테니까.박한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걸 알면서도 에릭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박한빈은 그를 쓱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휴대폰을 들고 화면 속의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에릭은 한국어를 말하기는 가능했지만 글자는 읽을 줄 몰랐다.그래서 박한빈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봐도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제야 에릭은 상황을 눈치챘다.“네 아내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에릭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설마 화난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나랑 같이 해외로 가는 게 어때? 여기는 제약이 너무 많잖아. 이런 것만 없었어도 너도 굳이 이렇게까지... 야, 내 말 듣고 있긴 해?”박한빈은 에릭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몇 초 더 기다려 봤지만 성유리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에릭이 뒤에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걱정스러운 마음에 박한빈의 미간이 점점 더 잔뜻 찌푸
비록 그때의 연정우는 단순한 ‘공범’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친척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정말로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들을 돕는 선택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무마하고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 거고.권력이라는 것은 중독성 강한 독과도 같아서 한 번 손을 대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그 자리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 그리고 성유리의 존재로 인해 연정우가 바라보게 된 대상은 박한빈이었다.더군다나 박한빈 때문에 한때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으니 연정우가 그를 증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심지어 성유리는 나중에 연정우가 자신에게 그렇게 집착한 것도 단순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박한빈을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업적인 수법과 벌이로는 박한빈을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만약 성유리와 함께한다면?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일종의 승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그래서였을까.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끝까지 자신과 함께 장례식에 가려 했던 이유는 그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박한빈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을 결국 자신이 가졌다는걸.성유리는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 연정우에게 말했다.그 말투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였다.감정이 배제된 그저 객관적인 관찰자 같은 어조로.“그러니까 네가 피해자라고 착각하지 마.”성유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어쩌면 넌... 단 한 번도 날 진짜로 좋아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 네가 좋아했던 건 박한빈을 이긴다는 그 감정이었을 뿐이야.”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가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정말... 너무하네.”그가 힘없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함께했던 사이였어. 심지어 결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연정우와 잠시 눈을 맞춘 후 대답했다.“응. 일이 좀 있어서 못 왔어.”“아, 어머니께서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들어가 볼 거야?”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정우는 마치 이곳의 주인처럼 앞장서서 그녀를 안내했다.비록 그런 연정우의 뒤를 따라가긴 했지만 성유리는 항상 두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계단을 오르던 중,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번 도한시에 뜬 보도 봤어?”그녀의 물음에 연정우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는데 눈빛에는 어딘가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연정우와 여전히 눈을 맞추며 말했다.“박세빈 그 사람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너 때문이지?”그녀는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연정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이거... 지금 나를 추궁하는 거야? 경찰도 날 찾지 못했는데 너는 바로 나한테 이렇게 물어보네. 증거라도 있어?”“없어.”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냥...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렇다면 네가 이 질문을 꺼낼 때 이미 답을 정해놓았겠네?”연정우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어차피 너는 내가 한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해명을 하든 부정하든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어?”그 말에 성유리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난 단지... 그 이유를 모르겠을 뿐이야.”“무슨 이유?”“넌 왜 그렇게 박한빈 씨를 증오하는 거야?”성유리의 말이 떨어지자 연정우의 표정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아까까지만 해도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그는 마치 얇은 얼음에 금이 가듯 조금씩 변해갔다.그러다 갑자기 성유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되물었다.“네가 생각하기엔 왜일 것 같아?”서로의 거리가 갑작스럽게 좁혀지자 성유리는 불편함을 느꼈다.하지만 여전히 계단 위였고 물러설 틈도 없어 주춤거리고 있던 찰나, 연정우가 그녀를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뒤척이다가 성유리는 겨우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이 훤히 밝아 있었다.성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곧장 서재로 달려갔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없었다.도우미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도착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새벽 일찍 차를 몰고 나간 것 같다고 했다.성유리는 도우미의 대답에 아무 말 없이 입을 꼭 다물었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박한빈이 남긴 쪽지가 있었다.[일을 해결하러 가야 해. 며칠 후에 돌아올게.]그러나 쪽지에는 박한빈이 어디로 갔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성유리는 그 쪽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것을 접어 서랍에 넣었다.그날, 뉴스에서 에릭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하지만 연루된 인물들이 많아서인지 뉴스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보도된 정보도 그다지 파장이 크지 않았고 빠르게 묻히는 분위기였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이게 전부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의 고요함은 단지... 폭풍이 몰려오기 전의 침묵일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차에, 갑자기 사씨 집안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사민혁이 오늘 퇴원하여 작은 파티를 연다는 내용이었다.지금 성유리는 파티에 참석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요청한 상대가 사씨 집안이기에 잠시 망설였다.“혹시 시간 안 되는 거야?”전화를 건 사람이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대답했다.“아뇨, 괜찮아요. 몇 시에 시작하나요? 미리 가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게요.”그녀가 이렇게 흔쾌히 답한 건 단순히 거절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현재 연정우와 사씨 집안의 친밀도를 봤을 때, 연정우도 아마 참석할 가능성이 컸다.그렇다면 이 기회에 직접 그에게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곧 류수미가 파티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보내왔다.사민혁이 병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너무 떠들썩한 장소는 적절하지 않았다.그래서 이번 모임은 가까운 지인들만 초청된 조용한 자리였고 장소 역시 사씨 집안의
일할 때의 박한빈은 유독 냉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한 기운에 성유리조차도 걸음을 멈칫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인기척을 들었는지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박한빈은 표정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왜 왔어? 먼저 자라고 했잖아.”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물컵을 그의 앞에 놓았다.“무슨 일인데요?”망설이던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박한빈은 물컵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다그치듯 물었다.“네?”“에릭이 잡혔어.”그제야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최근까지 계속 국내에서 활동했었는데...”그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며칠 전에 파티를 열었어. 그런데 어젯밤... 거기서 사람이 죽었대.”그 말에 성유리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그래서요?”“약물 과다복용이 원인이야.”그 한마디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설마...”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박한빈은 옅게 웃었다.“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거.”성유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박한빈은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라도 한 듯, 곧장 말을 덧붙였다.“나는 손도 대지 않았어. 물론 에릭이 전에 나한테도 권한 적은 있었지만 난 선을 넘지 않아.”“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내가 만약 그랬으면 네가 모를 리 있겠어?”성유리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 경찰이 개입했어. 너도 알잖아. 국내에서 이 일로 걸리면 형량이 얼마나 무거운지.”“더 웃긴 건, 그날 파티 초대 명단에 내 이름도 있었다는 거야.”그 말에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그럼 이건 일부러 당신을 노리고 벌인 일이라는 말인가요?”“그래.”박한빈은 물컵을 들어 올렸지만 마시지 않고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하늘이가 이제 막 박한빈 씨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좀 더 잘 대해주실 수는 없어요?”“내가 하늘이한테 못 해주고 있나?”그제야 침묵하던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데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그게 다예요?”“그럼 네 생각엔?”박한빈이 피식 웃어 보이며 되물었다. 성유리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으려 했지만 박한빈은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안고는 침실로 빠르게 걸어갔다.“뭐 하시는 거예요!”놀란 성유리가 외치자 박한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네 생각엔?”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아까 박한빈 씨가 전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응. 그래서 쉬게 해주려고.”그렇게 말하면서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침실로 데려와 침대 위에 눕혔다.그는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발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곧이어 성유리는 침대 위에 깔리듯 눕혀졌다.“박한빈 씨...”그녀는 박한빈의 다 낫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박한빈의 동작은 다소 조급했고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었다.당황한 성유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의 손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그 순간,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이 단숨에 벗겨졌고 그 바람에 단추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또랑또랑한 소리를 냈다.하지만 바로 그때, 침묵을 깨듯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무시한 채 계속 성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듣다 못한 성유리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전화 받으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표정을 굳혔지만 결국
박한빈은 여기가 공공장소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사실, 진짜로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성유리를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물론 이 방식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이긴 했지만 성유리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비행기는 곧 금성에 도착했다.성유리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김서영이 하늘이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꽉 껴안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런 아이를 살며시 안았지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방금 전,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만약 그때 정말로 박한빈과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하늘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니었을까?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두 사람 다 무사히 돌아왔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이를 꼭 안았다.한편, 김서영은 조용히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을 눈치챈 그는 가만히 서서 김서영이 자신의 안전을 확인할 시간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걱정 마세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 정도니까.”박한빈의 말투는 상당히 가벼웠다.원래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김서영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인가?”그 말 속에 담긴 불만을 박한빈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다.”김서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대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집에 가자.”짧은 김서영의 한마디에 성유리는 가볍게 대답한 뒤, 허리를 숙여 하늘이를 안아 올렸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그녀의 가녀린 체격이 신경 쓰였는지 이내 다가와 말했다.“내가 안을게.”처음에 성유리는 거절하려 했다.평소라면 하늘이도 스스로 걸으려 하거나 내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박한빈을 한참 바라보더니 먼저 두 팔을 내밀었다.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성유리와 김서영도 순간 놀랐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반박하지 못했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만약 저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랑 그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당신도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음, 말하자면 그렇긴 하지.”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말하면서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넌 네 남편을 너무 얕본 거지.”처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얼른 박한빈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렸다.지금 비행기는 아직 이륙 전이라, 창밖에는 끝없이 평탄한 활주로만 보일 뿐이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물었다.“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누가 부끄러워한댔어요?”성유리는 즉시 반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박한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그럼 이건 왜 이렇게 빨개졌는데?”“더워서요!”성유리는 단박에 부정하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냈다.마침 그 순간, 승무원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말을 들은 승무원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고객님, 혹시 기내 온도가 불편하신가요?”성유리는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게 되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조금 덥긴 하네요.”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성유리의 말에 승무원은 즉시 온도를 조절했고 그 바람에 그녀 쪽의 바람 세기가 확연히 강해졌다.원래도 얇은 옷차림이었던 성유리는 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옆에 있던 박한빈이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성유리가 자신과 끝까지 맞서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