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의 말과 성유정의 억울한 모양새까지 더 해지니 윤청하는 이미 마음속으로 잘잘못을 다 따지고는 성유리를 향해 소리쳤다.“성유리!”박한빈이 없었다면 윤청하는 바로 성유리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유정이는 네 동생이고 우리 성씨 집안에서 인정한 둘째야, 근데 네가 뭐라고 나서서 그런 말을 해! 감히 우리 성씨 집안 전체를 무시하는 거야?!”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범벅인 성유정을 한 번, 그리고 차가운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성유리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제 아내가 이런 교양 없는 말을 했다는 게 불만이고 또 제 귀여운 동생이 이딴 평가를 들었단 게 불만이겠지.하지만 성유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성유정에 대한 박한빈의 믿음, 성유정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한테 손대지 않는다던 그 말 한마디였다.성유정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제 성유리가 원유진과 싸웠을 때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었다.아마도 관심할 필요가 없어서겠지.박한빈은 그 앞에서 성유리를 지켜주지도 않았다.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성유리를 데려다 성유정한테 사과를 시키는 것뿐이었다.생각을 마친 성유리는 헛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네,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했다.“근데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성유리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고 윤청하는 화가 나 몸을 벌벌 떨었다.그때 묵직한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보지 않고 성유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쟤는 그냥 엄마랑 집안사람들이 입양한 잡종이잖아요. 알아요, 나보다 쟤가 더 성씨 집안 아가씨 같다는 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성씨 집안 피가 흐르는 건 저예요.”성유리는 아직 할 말이 많았지만 박한빈이 그 앞을 막아서며 성유리를 차갑게 내려다봤다.“너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헛소리 아니야. 내가 틀린 말 했어?”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
성유리의 말이 끝나도 가만히 있던 박한빈은 서유리를 한번 보고 마침내 그 이혼합의서를 받아들었다.이혼합의서의 마지막 페이지부터 들추어본 박한빈은 이미 사인이 되어있는 성유리의 이름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성유리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혼서류를 반으로 찢어버렸다.그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성유리였지만 그녀는 애써 평온한 척하며 물었다.“이 서류가 맘에 안 들면 다시 인출해서 줄게.”박한빈은 여전히 말없이 찢어진 서류를 쓰레기통에 던져놓고는 성유리를 향해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낯빛이 변한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그렇게 성유리의 등은 빠르게 뒤에 있던 테이블에 닿았고 원래도 상처가 있던 등에 딱딱한 테이블이 닿으니 느껴지는 통증에 성유리가 신음을 흘려댔다.“이혼?”박한빈은 아파하는 성유리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아님 밀당하는 건가.”“너의 이런 치졸한 수법들이 난 매번 역겨워.”남편이 아내에 대한 평가가 역겹다라니.성유리는 아까 성유정 앞에서 박한빈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박한빈은 그 순간에 성유정을 보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에게 혐오를 드러내고 있었다.지금껏 참 많이도 실망했던 성유리였지만 심장은 아직도 이런 말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왔다.성유리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구멍이 막혀버린 듯한 느낌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아이러니한 건 이 와중에 웃음이 난다는 것이다.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은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협박 아니고 진심이야.”눈을 가늘게 뜨는 박한빈에 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우리 결혼을 더 지속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그럼 너한테 뭐가 의미 있는 건데? 아, 진씨 집안 그 혼외자?”박한빈이 진무열을 언급할 줄 몰랐던 성유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그 눈도 따라서 커졌다.하지만 박한빈
박한빈이 보낸 그 눈빛의 의미를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것은 경고였고 또 혐오였다.겉으로 보면 겸손하고 온화해 보이는 박한빈의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박한빈은 차갑기 그지없는 냉혈한이었다.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 성유리는 눈을 아래로 해 쓰레기통에 꽂힌 반으로 찢긴 이혼서류를 주시했다.백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건넨 서류였건만 박한빈은 그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애초에 성유리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성유리의 감정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정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그로부터 이틀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전해 들은 소식은 공식회의에 박한빈이 참석했다는 것이었다.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박한빈은 코앞에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도 변함없는 미모를 유지했는데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가 있어 마치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그런 기사를 보고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도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성유리는 달갑지 않은 그 얼굴을 더 보지 않고 자신의 홈페이지로 넘어가 연재를 재촉하는 댓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성유리는 만화가였지만 성유리가 속한 상류사회에서는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직업이었다.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미술을 배웠지만 그들이 접하는 건 국화나 유화지 성유리가 그리고 있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만화는 아니었다.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성유리의 만화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유리는 답글을 좀 달다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그런데 핸드폰을 내려놓기 바쁘게 성유리의 핸드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진무열에게서 온 문자 때문이었다.“내일 진씨 집안에서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준대요, 유리 씨도 올래요?”미간을 한번 찌푸린 성유리가 답장하려고 하는데 진무열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올 거죠? 며칠 전에 내가 공항에서 유리 씨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줬는데.”진무열의 말에 타자를 하던 성유리의 손가락이 공중에 머물렀다.이미 데리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거기서 다섯
시선을 아래로 한 성유리는 신문에 나온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참 교양 없고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고 난 성유리는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신문을 줍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출발하세요.”성유리의 높낮이 없는 말이 들렸음에도 기사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창까지 올려버렸다.그러자 박한빈도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성유리는 멀어져가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돌아섬으로 성유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성유리만의 몫이었다.하지만 늘 혼자였던 성유리는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파티장은 생각보다 많이 떠들썩했다.오랜 시간 동안 진씨 집안은 진무열이라는 혼외자를 숨기진 않았지만 그를 냉대하며 외국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해 혼외자에 대한 진씨 집안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었는데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주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진무열이 알려주지 않으니 성유리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그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그렇게 소란스러운 곳에 홀로 떨어진 성유리가 진무열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누구야, 너 진짜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그 사람에 의해 성유리의 팔이 잡혀버렸다.“뭘 그렇게 급해 해? 내 말 못 들었어?”원유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댈 때 원유진과 함께 다니던 동생들은 성유리의 팔이 잡히자마자 그 앞에 나서며 길을 막아버렸다.학교 다닐 때와 다름없는 모습에 성유리는
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연정우에게 던지듯 건넸다.연정우는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들었다.앞의 몇 장만 대충 본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서류를 쥔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박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것 같으세요?”“이 서류들,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연정우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더니 차분하게 물었다.“그건 교수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박한빈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으로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하지만 그런 박한빈을 보는 연정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제가 원하는 게 뭐일지는... 이미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박 대표님, 같은 남자로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연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성리 그룹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표님은 그저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구는 것뿐이잖습니까!”“그래요, 제가 가진 게 그런 거니까요. 문제 있습니까?”박한빈이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그리고, 연 교수님께서 정말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이런 자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 역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교수님과 유리의 파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서류는 교수님과 제 사이의 비밀로 남겠죠. 하지만 계속 밀어붙이시겠다면... 제 탓은 하지 마시길.”더 깊은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손등에는 혈관까지 불거져 나왔다.박한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교수님한테도 꽤 이득이 되는 거래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