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행복하니?’성유리는 그동안 한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를 물어볼 여유가 없이 살아왔었다.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그래? 그러면 다행이야.”진무열은 대답하고 나서 침묵에 빠졌다.“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성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진무열도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성유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다시 입을 열었다.“그때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몇 년 동안 정말 네 생각 많이 했어. 늦었으니, 푹 쉬어.”그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성유리는 휴대폰을 쥔 채로 한참 동안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그날 밤, 박한빈이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진무열의 전화 때문인지, 어렵게 잠에 든 후에는 밤새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씨 가문에 막 돌아왔던 시절로 되돌아갔다.성씨 가문은 성유리를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가 시골에서 온 것을 비웃었고, 심지어 캐비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조롱했다.연회장 꼭대기에는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성유리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놀리며 수영할 줄 아는지 시험해 보겠다며 수영장 근처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갑자기 수영장에 밀어 넣어 빠뜨렸다.물이 코와 입,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 괴로움과 질식감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성유리는 충격에 눈을 번쩍 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 공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여기가 박한빈과 함께 지내는 곳, 도연제라는 현실을 인지했다. 꿈속의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시계를 보니 평소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성유리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절벽 끝에 몰린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성유리의 반응은 박한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직접 옷을 갈아입혔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결국 성유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도련님, 사모님...”숙자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자신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순순히 따랐다.차에 오른 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병원은 안 가도 돼. 어머님께는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바쁘잖아. 그냥 아무 데나 내려줘.”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었기에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2년이 넘게 되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박한빈은 분명 그녀가 왜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인 성유리에게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성유리는 한때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박한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아이가 생기면 비로소 그녀에게도 진정한 가정이 생길 수 있을 거
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박한빈은 결국 성유리를 별장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길가에 내려주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떠났다.검은색 포르쉐는 성유리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더 이상 저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밖에 나온 김에 성유리는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원유진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박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신가?”원유진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는 네가 사람들 틈에서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줄 알았는데, 쇼핑도 하러 나오네.”원유진은 성유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유리를 앙숙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다른 사람들은 성유리가 박한빈과 결혼한 이후, 그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바꾸었지만, 원유진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모님 자리가 성유정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성유리는 그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원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막아섰다.“어딜 가려고? 보아하니 혼자 있네. 같이 다니는 게 어때?”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불편해.”“뭐가 불편해? 누군가를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니지?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성유리는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유진 씨, 교육은 제대로 받은 거지?”“무슨 소리야? 당연히 받았지!”“그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고 있지?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 없어?”성유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정확하게 원유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듯 얼굴이 굳었다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언니!”성유정은 급히 다가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언니... 화난 거야? 엄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야...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곧 집에서 나갈 거니까. 더 이상 언니랑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게...”“응. 그래.”성유리는 아주 간단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고, 성유정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반응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갈게.”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성유정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떠났다.성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 어쩌죠? 언니가 저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아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그래. 맞아. 난 널 싫어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충동을 억제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아마 윤청하의 뺨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그들이 왜 자신보다 성유정을 편애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녀가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은 그들에게 수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까지 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딸은 성유정처럼 지적이고 품위 있어야 했다. 성유리는 그들에게 실패작에 불과했다.집에 돌아온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성유정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성유리는 당연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숙자 아주머니는 연신 궁금한 듯 말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유정 씨가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나요?”그 질문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성유리는 원고 마감이 늦어져 몇 날 며칠을 끌었기
성유리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옷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녀는 곧바로 문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박한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가 아니라, 서로를 겨냥한 적과 같은 분위기로 대치했다.“별일 없으면 나가줘. 나 자야 해.”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내일 점심시간은 비워둬.”“무슨 일인데?”성유리는 무심코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성유정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거라면 절대 안 가.”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반응은 성유리의 추측이 맞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성유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박한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 유정이는 네 동생이야.”“난 동생 없어. 그리고 성유정은 스스로 넘어진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성유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네가 잘한 건 뭐지?”박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싸운 게 잘한 행동이야? 네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긴 해?”“내 위치? 내가 뭐야? 시골에서 데려온 들러리일 뿐이잖아.”성유리도 비웃었다.“맞아. 10년 동안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교양 없을 거야. 너희가 원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어쨌든, 당신의 아이는 나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 안 되잖아.”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어차피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창피하다면...”“성유리, 그만해. 생각 좀 하고 말해.”박한빈은 거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
성유리는 고민 끝에 이혼합의서를 집어넣고는 이튿날 박한빈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성씨 집안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금성 시내와 교외의 접점 지역에 있었는데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아주 호화로운 별장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때 가사 도우미 하나가 성유리를 보았지만 달려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마찬가지로 가사 도우미를 본 성유리는 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알아서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래도 사과하러 오는 거라고 성의라도 보이기 위해 성유리는 특별히 건강식품을 이것저것 챙기고는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아가씨, 오셨어요?”성유리가 집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아까 봤던 그 도우미였다.그에 성유리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성유리를 불러왔다.“언니!”언제 인기척을 들은 것인지 내려온 성유정이었다.새하얀 원피스에 검은색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순진무구한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미모였다.언니를 부르며 달려오던 성유정은 성유리 뒤를 빤히 보더니 혼자 온 것 같은 성유리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언니, 설마 혼자 운전해서 온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보며 물었다.“너 상처는 좀 어때?”“괜찮아...”성유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밝은 척을 하며 말을 돌렸다.“엄마는 위에 있어, 근데... 아직도 화나 보여. 언니가 올라가서 봐봐.”“응.”성유리가 너무 흔쾌히 대답해서 성유정이 의외라고 여기고 있던 사이, 성유리는 빠르게 성유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 시각 성씨 집안 안주인은 2층에서 꽃꽂이를 하며 성유리가 부르는 엄마 소리에도 코웃음을 쳤다.“내가 챙겨온 거 1층에 뒀어요.”성유리는 그런 엄마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지 바로 말을 꺼냈다.“어제 일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그때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미 사람 보내서 CCTV 확인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
김난희는 너무 화가 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은 감정이 없어 보일 정도로 덤덤했고 차까지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할머니, 저도 이젠 다 큰 어른입니다. 제 평생 삶이 걸린 문제는 이제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네 일? 네 놈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경고하는데 네 성이 박 씨인 이상 내 손자고 내 말에 따라야 해!” “잊었나 본데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건 다 내가 너한테 준 거야. 허튼수작 부리면 내가 다...” 김난희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말하다 문득 멈췄다. 박한빈은 그런 김난희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 “다 뭐요? 밖에 있는 그 애들 말씀이십니까?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김난희는 김서영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두 사람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상관하지 않았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할머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저도 그냥 한 명의 존재만 알 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이름이 뭔지 모르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지금 공개된 박씨 가문 유일한 상속자는 저 하나잖습니까. 만약 할머니께서도 그 사람을 손자라고 생각한다면 잘 숨어 있으라고 전해주십시오. 정말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박씨 가문의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해 가문의 멸망을 초래할 것 같은데... 할머니 마음이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박한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이빨을 숨기고 있는 맹수처럼 보였고 김난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화를 내던 김난희는 천천히 진정하다 떨리는 손으로 박한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박한빈! 너 지금 누구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김난희는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같은 애한테서 무슨 좋
담담하게 사인을 하던 성유리는 마지막에 화를 못 이기고 종이를 연필로 찢었다. 허나 그녀는 찢어진 종이를 신경도 안 쓰고 서류를 박한빈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리고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차에서 내리려 했다. “어디로 갈 건데? 데려다줄게.”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맞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자. 아침에 데리러 가도 되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않았고 그대로 차 문을 닫아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 안에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고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그녀가 던진 서류를 손에 쥐었다. 일부로 두 개의 서류를 준비한 박한빈은 성유리가 두 장 다 사인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잊은 탓인지 아니면 보기도 싫어 두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가 가져가야 하는 서류는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었다. 박한빈은 뭐가 어떻게 됐든 성유리가 사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를 잘 넣어두고 박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고 시간도 너무 늦지 않았기에 김난희와 김서영도 깨어있었다. 저번 일이 발생한 뒤로 두 사람의 사이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차가웠고 김나희는 김서영이 박씨 가문의 체면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서영은 이미 김난희의 생각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고 두 사람은 같은 집 안에 있지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집에 돌아온 박한빈을 발견한 두 사람은 깜짝 놀랐고 김난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집에 돌아올 줄은 아나 보지?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새벽밖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혹시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면 할머니 주무시는데 방해될까 봐 하지 않았고요.”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박한빈을 보던 김난희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혼자 뭐라고 중
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서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너무 힘을 쓴 탓에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해 혈색이 없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성유리가 전처럼 화를 못 이겨 자신을 힘껏 깨문다 해도 박한빈은 아마 속으로 좋아할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두 사람이라 그런지 성유리도 박한빈의 속내를 알아차렸고 이미 미쳐버린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박한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성유리는 애를 써서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요?” “음, 그럼 할 수 없지. 성리 그룹이 점점 더 망가져 가는 꼴을 두고 봐야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거야. 연정우 씨에 관한 일도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을 거고.” 평온하게 대답하는 박한빈이었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말은 점점 더 빨라졌다.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커다란 회사를 거머쥐고 있는 대단한 대표가 아니라 그냥 날강도 같아 보였다. ‘정말 뻔뻔한 사람! 어쩜 사람이 이래?’ 비록 성유리가 입 밖으로 박한빈을 욕하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 눈치 차린 듯 먼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아무런 소용은 없어. 어차피 넌 이제 연정우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지는 못할 테니까. 툭 털어놓고 말할게, 잘 들어. 앞으로 네가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나는 절대 그 남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평생 너는 어차피 나랑 얽히게 될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랑 결혼하지 그래?” 박한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성유리에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자기 옆에 물 한 잔도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만약 물이 있다면 당장 박한빈의 얼굴에 뿌려버렸을 성유리지만 물이 없으니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란 성유리는 이런 일을 종종 봐왔었지만 결국 본인이라는 “턱”을 넘지 못해 포
성유리는 능청맞게 말하는 박한빈을 보기도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병실 밖을 나갔다. “저게 무슨 말이냐? 지금 두 사람 같이 살고 있어?” 성시원은 박한빈이 나가자마자 성유리를 보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정우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유리는 성시원의 물음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오늘 저는 성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아까 내가 한 물음에 대답부터 해줘야지. 정말 같이 사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둘이 짜고 한 판이다 이거야? 어쩐지 시간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찾아와서 결판을 짓는지 궁금했는데... 다 네가 한 짓이었구나.” “됐어요.” 성유리는 피로에 잔뜩 찌든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다 알고 계세요. 박 대표님은.”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는 그냥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 사냥감일 뿐이었다고요.” “아예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평 공정하게 싸울 수 있겠어요?” 성유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입만 뻥끗거리다 결국 연정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연정우는? 이미 무산된 결혼 아니냐? 그 사람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 정 없고 매정한 인간은 우리 성씨 가문과 절대 어떠한 관련도 없어!” 성유리는 화를 내며 말하는 성시원의 앞에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떠났다. “성유리!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가? 당장 돌아와!” 뒤에서 들리는 성시원의 고함에도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병원 앞에 몰려있던 기자들은 이미 다 떠났는지 조용했기에 성유리는
성유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박한빈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던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성유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이제 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성유리는 이제야 박한빈이 예전부터 다른 투자자들과 다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가 손에 쥐고 있던 작디작은 지분까지 뺏겼지만 그녀는 저항할 자격도 없었다. 허나 성시원에게는 성유리보다 많은 발언권이 있다. 박한빈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었다. 만약 그 시간들을 충분히 이용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두 사람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성유리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 세우며 병원으로 향했지만 뜻밖의 인물과 마주쳐버렸다. ‘박한빈 씨?’ 그녀를 발견한 박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먼저 건네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 대표님도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셨군요. 그럼 저희 이 자리에서 바로 얘기 나눕시다.” 박한빈은 냉정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성리 그룹의 현재 금전 흐름 상황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통계한 결과 이미...” 어젯밤 침대에서의 화면들이 떠오른 성유리는 지금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리 그룹의 미래 계획을 말하고 있는 박한빈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아주 냉철하고 침착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유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시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동의하신 거예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성시원이지만 성유리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사실 성유리도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으로 놓고 말하면 누군가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 않다면 회사의 재무 상황이 공개될 것이니 회사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법원까지 가 회사를 매매로 넘기는
“네.” “근데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그 증거들은 네가 스스로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죠.”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박한빈 씨가 편하게 살지는 못하게 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입을 닦은 휴지를 상위에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뿌렸다. 물방울들은 박한빈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속눈썹마저 젖어버렸다. 박한빈은 물을 맞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환한 조명 아래에 있는 탓인지 안색은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던 말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 순간, 박한빈은 성유리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버렸다. “이렇게?”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며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게 네가 말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건 너무 소아과 수준 아니야?”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꽉 잡더니 바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박한빈의 어깨에 손까지 올렸다. 평소와 다른 성유리의 행동에 당황한 박한빈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성유리의 눈빛을 발견했다. 성유리의 눈빛은 마치 박한빈에게 네가 하는 행동도 유치하다는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박한빈에게 또 무슨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가까이 붙어있는 두 사람이지만 박한빈은 마음속이 공허할 따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상처가 난 부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끝없이 성유리에게 키스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야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원이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 박한빈은 애원하듯 성유리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어깨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집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지도 않으며 누군가에게 저녁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될 수록이면 간이 덜 된 음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하려 했고 박한빈은 뒤돌아있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 찾으려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직접 나한테 말해. 내가 알려줄 테니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까 CCTV 얘기를 꺼낼 때부터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박한빈의 말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발걸음을 뚝 멈추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손톱은 손바닥에 박혀버린 듯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유리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한 뒤, 뒤를 돌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박한빈 씨와 고명도 씨 사이에 있던 타협이나 거래에 대한 증거겠죠?”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박한빈은 또 너털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응? 그건 왜 찾는 거야?” “박한빈 씨 생각에는 왜 찾는 거 같은데요?” 성유리의 되묻는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아버렸고 미소 또한 천천히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나타났고 성유리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박한빈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기침을 연신 해댔고 성유리는 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대화를 나눌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도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샤워를 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올 때, 박한빈이 저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마침 집에 도착했었다. 입맛이 없던 성유리는 밥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