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송진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

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아니야.”

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

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

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

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

“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

“안 했어.”

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

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

“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

“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

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나갔잖아. 난 언니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성유정은 말하면서 계속 성유리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성유리는 그 상황이 우스워 보였다. 성유정이 박한빈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건가? 아니면 박한빈이 질투하기를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면 큰 오산일 텐데. 박한빈은 전혀 관심도 없을 테니까.’

성유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성유정도 조용해졌다.

차 안은 고요해졌고, 잠시 후 박한빈이 차를 세웠을 때 성유리는 뒷좌석에서 잠들어버린 성유정을 보게 되었다.

성유리는 성유정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성유정의 작은 몸집과 달콤한 단장에 빠진 표정은 보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성유리가 그녀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뒷좌석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성유정을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박한빈이 번쩍 들어 올리자 성유정은 잠에서 깨어났고 실눈을 뜬 채로 속삭였다.

“한빈 오빠...”

그녀는 자연스럽게 박한빈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서 더 편한 자세를 찾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거침없는 스킨쉽은 아주 자연스럽고 다정해 보였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Related chapters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화

    성유리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무감각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서서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마치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그 순간, 성유리는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바로 그녀가 성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성유리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직접 학교로 와서 그녀와 성유정을 데리고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다.그날, 세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교통사고를 겪었었다. 사고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운전기사의 운전 미숙으로 차가 갓길보호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었다.성유리는 머리를 창문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지나쳐 성유정에게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었다.어머니는 성유정을 안고 울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었다.그때 성유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은 이유는 단지 그녀가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기 때문일 뿐,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건 성유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성유정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성유리는 그때부터 자기가 두 눈으로 목격했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어머니 대신 성유정을 안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박한빈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성유리는 그렇게 덩그러니 차에 남아있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렸을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박한빈이 차를 세운 곳이 집과 꽤 거리가 있어서 흠뻑 젖고 말았다.집 앞에서 올려다보니 성유정의 방과 박한빈의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아니 관심조차 없겠지...’성유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화

    ‘너 지금 행복하니?’성유리는 그동안 한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를 물어볼 여유가 없이 살아왔었다.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그래? 그러면 다행이야.”진무열은 대답하고 나서 침묵에 빠졌다.“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성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진무열도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성유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다시 입을 열었다.“그때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몇 년 동안 정말 네 생각 많이 했어. 늦었으니, 푹 쉬어.”그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성유리는 휴대폰을 쥔 채로 한참 동안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그날 밤, 박한빈이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진무열의 전화 때문인지, 어렵게 잠에 든 후에는 밤새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씨 가문에 막 돌아왔던 시절로 되돌아갔다.성씨 가문은 성유리를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가 시골에서 온 것을 비웃었고, 심지어 캐비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조롱했다.연회장 꼭대기에는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성유리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놀리며 수영할 줄 아는지 시험해 보겠다며 수영장 근처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갑자기 수영장에 밀어 넣어 빠뜨렸다.물이 코와 입,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 괴로움과 질식감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성유리는 충격에 눈을 번쩍 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 공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여기가 박한빈과 함께 지내는 곳, 도연제라는 현실을 인지했다. 꿈속의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시계를 보니 평소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0화

    성유리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절벽 끝에 몰린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성유리의 반응은 박한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직접 옷을 갈아입혔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결국 성유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도련님, 사모님...”숙자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자신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순순히 따랐다.차에 오른 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병원은 안 가도 돼. 어머님께는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바쁘잖아. 그냥 아무 데나 내려줘.”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었기에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2년이 넘게 되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박한빈은 분명 그녀가 왜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인 성유리에게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성유리는 한때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박한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아이가 생기면 비로소 그녀에게도 진정한 가정이 생길 수 있을 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1화

    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2화

    박한빈은 결국 성유리를 별장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길가에 내려주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떠났다.검은색 포르쉐는 성유리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더 이상 저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밖에 나온 김에 성유리는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원유진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박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신가?”원유진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는 네가 사람들 틈에서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줄 알았는데, 쇼핑도 하러 나오네.”원유진은 성유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유리를 앙숙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다른 사람들은 성유리가 박한빈과 결혼한 이후, 그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바꾸었지만, 원유진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모님 자리가 성유정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성유리는 그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원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막아섰다.“어딜 가려고? 보아하니 혼자 있네. 같이 다니는 게 어때?”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불편해.”“뭐가 불편해? 누군가를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니지?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성유리는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유진 씨, 교육은 제대로 받은 거지?”“무슨 소리야? 당연히 받았지!”“그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고 있지?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 없어?”성유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정확하게 원유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듯 얼굴이 굳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화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4화

    “언니!”성유정은 급히 다가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언니, 언니... 화난 거야? 엄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문제야...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곧 집에서 나갈 거니까. 더 이상 언니랑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게...”“응. 그래.”성유리는 아주 간단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고, 성유정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반응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 먼저 갈게.”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성유정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떠났다.성유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엄마, 어쩌죠? 언니가 저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아요...”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그래. 맞아. 난 널 싫어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충동을 억제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아마 윤청하의 뺨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기에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그들이 왜 자신보다 성유정을 편애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이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녀가 시골에서 보낸 그 시간은 그들에게 수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어리석고 초라한 모습까지 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의 딸은 성유정처럼 지적이고 품위 있어야 했다. 성유리는 그들에게 실패작에 불과했다.집에 돌아온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기도 전에, 성씨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성유정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성유리는 당연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숙자 아주머니는 연신 궁금한 듯 말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유정 씨가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사를 가나요?”그 질문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성유리는 원고 마감이 늦어져 몇 날 며칠을 끌었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5화

    성유리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옷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녀는 곧바로 문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박한빈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가 아니라, 서로를 겨냥한 적과 같은 분위기로 대치했다.“별일 없으면 나가줘. 나 자야 해.”성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내일 점심시간은 비워둬.”“무슨 일인데?”성유리는 무심코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성유정에게 사과하러 가라는 거라면 절대 안 가.”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반응은 성유리의 추측이 맞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성유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꼭 쥐었다.박한빈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 유정이는 네 동생이야.”“난 동생 없어. 그리고 성유정은 스스로 넘어진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성유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네가 잘한 건 뭐지?”박한빈은 비웃으며 말했다.“공공장소에서 싸운 게 잘한 행동이야? 네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긴 해?”“내 위치? 내가 뭐야? 시골에서 데려온 들러리일 뿐이잖아.”성유리도 비웃었다.“맞아. 10년 동안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교양 없을 거야. 너희가 원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가? 어쨌든, 당신의 아이는 나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나면 안 되잖아.”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어차피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렇게 창피하다면...”“성유리, 그만해. 생각 좀 하고 말해.”박한빈은 거친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되돌

Latest chapter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23화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하늘이가 이제 막 박한빈 씨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좀 더 잘 대해주실 수는 없어요?”“내가 하늘이한테 못 해주고 있나?”그제야 침묵하던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데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그게 다예요?”“그럼 네 생각엔?”박한빈이 피식 웃어 보이며 되물었다. 성유리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으려 했지만 박한빈은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안고는 침실로 빠르게 걸어갔다.“뭐 하시는 거예요!”놀란 성유리가 외치자 박한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네 생각엔?”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아까 박한빈 씨가 전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응. 그래서 쉬게 해주려고.”그렇게 말하면서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침실로 데려와 침대 위에 눕혔다.그는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발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곧이어 성유리는 침대 위에 깔리듯 눕혀졌다.“박한빈 씨...”그녀는 박한빈의 다 낫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박한빈의 동작은 다소 조급했고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었다.당황한 성유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의 손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그 순간,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이 단숨에 벗겨졌고 그 바람에 단추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또랑또랑한 소리를 냈다.하지만 바로 그때, 침묵을 깨듯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무시한 채 계속 성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듣다 못한 성유리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전화 받으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표정을 굳혔지만 결국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22화

    박한빈은 여기가 공공장소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사실, 진짜로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성유리를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물론 이 방식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이긴 했지만 성유리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비행기는 곧 금성에 도착했다.성유리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김서영이 하늘이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꽉 껴안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런 아이를 살며시 안았지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방금 전,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만약 그때 정말로 박한빈과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하늘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니었을까?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두 사람 다 무사히 돌아왔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이를 꼭 안았다.한편, 김서영은 조용히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을 눈치챈 그는 가만히 서서 김서영이 자신의 안전을 확인할 시간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걱정 마세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 정도니까.”박한빈의 말투는 상당히 가벼웠다.원래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김서영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인가?”그 말 속에 담긴 불만을 박한빈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다.”김서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대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집에 가자.”짧은 김서영의 한마디에 성유리는 가볍게 대답한 뒤, 허리를 숙여 하늘이를 안아 올렸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그녀의 가녀린 체격이 신경 쓰였는지 이내 다가와 말했다.“내가 안을게.”처음에 성유리는 거절하려 했다.평소라면 하늘이도 스스로 걸으려 하거나 내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박한빈을 한참 바라보더니 먼저 두 팔을 내밀었다.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성유리와 김서영도 순간 놀랐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21화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반박하지 못했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만약 저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랑 그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당신도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음, 말하자면 그렇긴 하지.”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말하면서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넌 네 남편을 너무 얕본 거지.”처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얼른 박한빈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렸다.지금 비행기는 아직 이륙 전이라, 창밖에는 끝없이 평탄한 활주로만 보일 뿐이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물었다.“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누가 부끄러워한댔어요?”성유리는 즉시 반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박한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그럼 이건 왜 이렇게 빨개졌는데?”“더워서요!”성유리는 단박에 부정하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냈다.마침 그 순간, 승무원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말을 들은 승무원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고객님, 혹시 기내 온도가 불편하신가요?”성유리는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게 되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조금 덥긴 하네요.”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성유리의 말에 승무원은 즉시 온도를 조절했고 그 바람에 그녀 쪽의 바람 세기가 확연히 강해졌다.원래도 얇은 옷차림이었던 성유리는 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옆에 있던 박한빈이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성유리가 자신과 끝까지 맞서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20화

    성유리와 박한빈이 퇴원 후 도한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박한빈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박세빈 씨의 유골을 가져가시겠습니까?”이번 사건에서 박세빈은 ‘주범’이었고 박한빈은 명백한 피해자였다.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였다.하지만 동시에 박한빈은 박세빈의 형이었고 이 세상에서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그렇기에 경찰이 한 번쯤은 물어볼 법도 했다.그 질문을 들었을 때,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필요 없습니다. 처리할 방법을 모르겠으면 바다에 뿌리든가, 아니면 하수구에 버려도 됩니다.”말을 끝낸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비록 통화 중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수화기 너머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박한빈이 끝까지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에서 박세빈을 데리고 나왔던 모습이 깊은 형제애처럼 보였을 테니까.그런데 정작 본인은 박세빈의 유골을 하수구에 버려도 된다고 말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그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생각해?”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 씨생각엔... 박세빈 씨 뒤에 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이번이 그녀가 처음으로 박한빈에게 던진 질문이었다.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확신보다는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박한빈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들었다가 되물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어쩌면 성유리도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두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더군다나 지금 박한빈에게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박세빈은 이미 죽었고 죽기 전까지도 연정우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결국 지금으로선 단순한 의심일 뿐, 연정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9화

    박한빈은 원래 그녀가 푹 잘 수 있도록 내버려두려고 했다.하지만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결국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잡았다.잘 자다가 숨이 막히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그러자 눈앞에는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한빈이 있었다.“뭐 하는 거예요?”몽롱한 상태에서도 성유리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냈다.“성유리.”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나?”“이번에... 내가 정말 죽었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성유리는 가만히 누워 박한빈을 쳐다만 봤고 방금까지도 꿈을 꾸는 것 같았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졌다.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당장 다른 사람과 재혼하겠죠.”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동공이 급격히 떨렸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다시 자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누구랑 재혼할 건데?”“누구든 상관없어요. 박한빈 씨가 말했잖아요? 저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난 네가 살아야 한다고 했지 재혼하라고 한 적 없어!”“저 혼자 애 키우기 너무 힘들잖아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부담이 좀 줄겠죠. 당신도 제가 너무 고생하는 건 싫을 거 아니에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잠깐... 나 지금 설득당한 건가?’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성유리의 손을 다시 꽉 붙잡았다.“안 돼! 네가 살아 있는 건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건 절대 안 돼!”“내가 남겨준 돈이 그렇게도 부족해? 보모를 열 명, 스무 명이라도 고용하면 될 거 아냐! 애 키우는 게 문제면 그렇게 해결하면 되잖아!”이를 악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점점 분노가 서렸다.애초에 이런 가정법적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8화

    의사는 빠르게 병실로 와 성유리를 위해 검사를 재개했다.다행히 그날 현장 깊은 곳으로 가지 않았기에 짙은 연기 또한 기도에 많이 들어가지 않아 상황은 최악이 아니었다.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하지만 서훈은 박한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박세빈 씨가 사망하셨습니다.]박한빈이 그를 집에서 구조할 때도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박한빈의 복부를 있는 힘껏 찔렀다.박세빈이 형인 박한빈을 얼마나 증오하고 혐오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지금, 증오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바보처럼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이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로 만들어줬다.게다가 박세빈의 죽음은 그와 연정우 사이에서 벌어진 거래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한빈이 아무리 악을 쓰고 구하려고 해도 쓸데가 없었다.진병오 측 사람들이 박한빈을 감금하고 납치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박세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그러니 이번 일은 이렇게 깔끔한 끝을 맺는 것이다.연정우를 조사한다고 해도 그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표시될 것이 뻔하다.이건 박한빈이 원하는 결과가 아닌데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박한빈은 문득 다른 일이 먼저 떠올랐다.‘진병오 그 사람들이 유리한테 어떻게 연락했지?’당시 박한빈은 진병오에 의해 핸드폰을 몰수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엔 비밀번호가 있었으니 그들은 박한빈의 핸드폰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연정우가 성유리의 연락처를 보내주지 않았으면 절대 그녀한테 연락을 못 한다는 말이다.도대체 왜 그들은 성유리에게 연락해 돈을 요구한 걸까? 만약 박세빈이 정체를 계속 숨겼고 박한빈이 불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은 어떻게 됐을까?박한빈은 더 이상 자세한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다친 사실을 둘 다 금성 쪽엔 알리고 싶지 않아 했지만 너무 큰 화재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박세빈이 죽었으니 김서영이 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7화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6화

    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5화

    성유리는 말하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그러자 앞에 있던 소방원은 조용히 자신이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어서 건넸다.그녀는 소방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방독면을 건네받지 않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싫어요.”“만약 박한빈 씨가 안에 있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라면... 그냥 같이 갈래요.”성유리의 말에 소방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리야.”남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행여나 자신이 환청일까 봐 두려워 고개를 돌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성유리.”그가 성유리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치기 전까지는.그녀가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토록 찾았던 박한빈이 그곳에 서 있었다.그는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하얀 옷 위에 까만 자국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까만 자국이 아닌 핏자국이었다.평소 정갈한 모습과는 달리 한껏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급박했던 현장 상황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멍하니 박한빈을 바라보다 환각이 아님을 깨닫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당시 박한빈은 이미 다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성유리가 달려와 끌어안을 때, 그 힘에 배 위에 나 있던 상처 부위가 찢어져 버렸다.꽤 강한 고통이 느껴짐에도 박한빈은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성유리를 안아줬다.이미 그녀의 눈물은 박한빈의 셔츠를 다 적셨고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많이 무섭고 놀랐나 보네.’두 사람의 몸이 가까이 닿는 순간, 그들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걱정 많이 했어?”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그렇게 쉽게 안 죽어.”“난 방금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숙여보자 그녀는 이미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뭐지?’그가 손에 힘을 살짝 푸는 순간 성유리는 픽 쓰러져버렸다.깜짝 놀란 박한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