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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작가: 송진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

“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

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

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

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

“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

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

“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

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

“한빈아, 너...”

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

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

“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

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

“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

“네. 아직이요.”

“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

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는...”

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

“그건 너무 이른 것 같은데요.”

성유정이 눈물을 참으며 말을 잇지 못하자, 김난희가 나섰다.

“유정이는 아직 젊어. 맞선은 천천히 해도 돼.”

“맞선은 사돈께서 직접 부탁한 일이에요. 그래서 괜찮은 청년들을 몇 명 소개받고 적극 추진하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럴 필요 없어요!”

성유정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톤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 전 아직 누구를 만나볼 생각이 없어요.”

김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성유정은 눈을 피하고, 곧장 박한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한빈 오빠, 나... 아직 결혼 생각 없어... 오빠가 좀...”

‘한빈 오빠?’

성유리는 그 호칭에 듣고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이어지는 박한빈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유정이가 원하지 않잖아요. 그냥 놔둬요. 엄마,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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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웠으나 연정우는 바로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우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왜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어떻게 연정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정말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그를 미워해야 한다!그런데 왜 성유리는 단 한 점의 미움의 감정도, 원망도 없는 것일까. 혹시 연정우는 미움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의 표정은 조금씩 사라졌고 안색도 매우 안 좋아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래서 그녀는 연정우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그럼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연정우는 그제야 그들이 어느새 병원 입구에 다 왔음을 알아챘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마치는 즉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제자리에 남겨진 연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괴이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유리의 모습이 연정우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떠나갔다.한편, 성유리는 곧바로 병실로 돌아왔고 이때 병실은 아주 조용헀다.류수미는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깎고 있었으며 사민혁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하지만 텔레비전의 소리는 너무도 작았기에 성유리는 단번에 그의 주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정우는 정말 좋은 애인 것 같아요”그러던 와중, 갑작스러운 류수미의 한 마디.그 한마디에 사민혁은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쳐다봤고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러나 류수미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했다.“만약 가능하다면... 하나가 돌아온다면 난 반드시 정우와 결혼시킬 거예요.”“왜 또 그런 말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8화

    연정우는 성유리가 할 대답을 쭉 생각해 봤었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게다가 지금 성유리의 눈빛을 보니 일부러 연정우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사뭇 진지하고 진심인 것 같았다.‘정말 진지하게 나한테 묻네.’연정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우린 헤어지지 않았나? 게다가 우리 둘이 만날 때 나도 박한빈 씨랑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난 이 방면에선 깨끗해. 그래서 너한테 잘못한 적은 없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너 지금... 나를 돌려 까는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있다 이내 대답하려고 입을 뻥끗거렸다.그러나 연정우가 먼저 말했다.“나도 알아. 이런 일엔... 나도 확실히 문제가 좀 있었지. 근데 유리야, 네 생각엔 그때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고 생각해?”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그를 쳐다보다 되물었다.“그러니까 그때 넌 날 속이고 있었던 거네? 맞아?”“뭐?”“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아무것도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이 네가 가진 것들을 다 뺏어가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 말들... 다 거짓말이었어?”“아니야.”연정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아마 스스로도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정우는 다른 변명을 더 하려고 했다.그러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나도 이젠 알겠네.”“뭘... 알겠다는 거야?”“그때 네가 날 선택한 이유가 사실 그냥...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랬던 거란 걸.”성유리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당시 네 회사는 이미 절벽 끝까지 밀려났었지. 그래서 박한빈 씨와 겨룰 자격도, 그럴 실력도 없었고. 너는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를 선택한 거야. 그런 김에 나한테서 너에 대한 호감이나 죄책감도 얻고. 맞지?”“나중에 유효정 씨가 찾아왔을 땐 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7화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민혁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이제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님은...”“의사 선생님도 그랬어. 이젠 괜찮다고.”대답하는 류수미의 태도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내내 정우가 있어서 별로 큰일도 안 생겼고.”“저도 딱히 한 건 없는걸요. 그래도 다행히 아버님께서 잘 이겨내셨어요. 근데 꼭 무리하면 안 되고 잘 휴식해야 한다고 했으니 명심하십시오.”“그래요. 정우 말이 맞아요.”류수미는 연정우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제가 그랬잖아요. 회사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저흰 이제 나이도 있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 하시려고요?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남겨줄 수도...”말하던 류수미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봤다.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던 성유리는 류수미의 말을 들은 어느 한순간, 두 주먹을 꽉 쥐었다.분위기가 얼어붙으려고 하던 그때, 연정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류수미도 얼른 대답해 줬다.“그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얼마나 피곤하겠니? 돌아가서 푹 쉬어,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성유리는 연정우가 언제부터 사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졌는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들이 연정우를 보는 눈빛을 관찰하니 다들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세 사람의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유효정.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국내에선 아무도 유효정의 사망 소식을 신경 쓰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하기야 유씨 가문은 이미 타락한 상태고 그녀의 부모님 또한 세상을 떠났다.그러니 유효정의 사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유리야, 네가 나 좀 바래다줄래?”연정우가 묻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다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6화

    “누가 아픈데요? 중요한 사람인가 보죠? 박한빈 씨가 야밤에 직접 병원에 다녀오는 걸 보면.”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뚫어져라 보며 계속 물었다.그 눈빛을 본 박한빈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이젠 유리한테도 대충 얼버무리면 안 될 것 같네.’이런 원인에서인지 박한빈은 가끔 다른 사람들이 똑똑한 여자는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그러나 그건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하지만 자신감이 없는 남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박한빈에게는 그런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아, 그냥 꽤 중요한 협업 파트너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나 봐. 상황이 되게 위급했다던데...”“근데 내가 갔을 땐 구조가 됐었어. 그래서 나도 오래 남지 않은 거고.”태연하게 말하는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기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하지만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아마 알지 않을까? 나도 모르겠는데.”박한빈은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다른 말을 꺼냈다.“지금까지 나를 기다린 게 고작 이런 걸 물어보려는 거였어?”성유리는 너무도 느긋한 박한빈의 태도에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으니까.”박한빈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먼저 자. 난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이번에 성유리는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렇지만 박한빈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잠이 안 와?”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박한빈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그럼 뭐라도 좀 할까?”성유리는 대답 없이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을 꼭 끌어안았다.오랫동안 알고 지낸 두 사람이었기에 박한빈은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 수 있었고 지금 성유리가 할 기분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그저 말없이 성유리의 등을 토닥여줬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5화

    돌아온 연정우는 박한빈과 눈을 맞추다 이내 미소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도 아버님께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연정우 씨,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지?”박한빈은 연정우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리고 연정우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혐오와 경계의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박 대표님, 지금 그게...”연정우는 박한빈의 시선에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재산을 위해 사람도 죽이는 사람이 죽은 친구의 부모는 잘 챙기십니다?”박한빈은 콧방귀를 끼며 계속 물었다.“그쪽 생각엔 제가 이걸 믿을 것 같습니까?”“사람을 죽인다고요? 박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요?”“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제일 잘 알 겁니다.”연정우는 말 없이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어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이제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하지만 전 이미 어머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아니면 지금 다시 전화해 볼까요? 제가 여기 남는 걸 동의하시는지 안 하시는지?”진지한 얼굴로 묻는 연정우를 박한빈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런데도 연정우는 미소 띤 얼굴로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박 대표님, 설마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정말 여기 남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그 말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저랑 사하나 씨는 전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은요? 유리 때문에 사씨 가문 사람들을 챙기려는 겁니까? 설마 그 사람들이 당신을 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까?”“사하나 씨의 죽음은 이제 두 분이 받아들이고 괜찮아지려고 애쓰고 있지만 전 믿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일은 잊고 싶어 한다는 걸요. 그러니까... 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4화

    박한빈은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하지만 응급실 앞에 서 있는 연정우를 보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췄고 표정을 굳혔다.류수미는 의자에 앉아 연정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마치 그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박 대표님, 오셨습니까?”연정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류수미에게 물었다.“사 회장님은 어떠십니까?”“의사들이 아직 구조 중이에요.”류수미는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요즘 안색이 말이 아니었고 아침에도 심장이 아프다고 했거든요. 월말에 건강검진 받으러 가기로 해서 그때까지 놔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괜찮으실 겁니다.”박한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연정우가 먼저 류수미에게 대답해 줬다.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오늘 네가 우리 보러 오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몰랐을 거야.”“별말씀을요. 저랑 사하나 씨는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두 분을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죠.”연정우는 마치 자상한 사람인 척하며 류수미를 달랬고 그 순간, 응급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한시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환자분 생명에는 이제 위협이 없습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류수미는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사민혁의 아내인 류수미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지만 연정우가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괜찮다고 하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박한빈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여긴 제가 전문적인 사람들을 불러 간호하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아닙니다. 전 여기 남겠어요.”류수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박한빈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 연정우가 먼저 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3화

    사실 박한빈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그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손에서 놀아나는 장난감 같았으니까.하지만 성유리가 그 ‘장난감’들을 놀기로 결정했으니 박한빈은 그녀에게 무대를 내어주기로 결심했다.‘장난감’들의 결말이 어떻든 박한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맹정태의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일부로 목소리를 깔고 멋져 보이려고 애쓴 맹정태의 음성 메시지를 듣자 박한빈은 화가 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연정우도 마찬가지다. 박한빈이 보기엔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와 만남을 가졌었다.그러니 박한빈은 연정우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매력이 존재할 거라고 여겼다.‘맹정태는 또 뭐야?’‘고작 저딴 놈도 유리한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가? 정말 우습군.’그래서 박한빈은 생각을 바꿨다. 성유리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재밌는 ‘놀이’를 하기로.마침 그도 홍지은이라는 사람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기에 그들이 이 도시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박한빈 씨.”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고 금세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왜 그래?”“아직 저한테 말 안 해주셨어요. 제 핸드폰은 왜 보신 거예요?”“아, 스팸 전화가 와서 그거 받아주다가 우연히 본 거야.”“맹정태 씨 문자는 제일 밑에 있었고 제가 차단까지 했는데 우연히 보셨다고요?”박한빈은 차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리고 순간, 너무 똑똑한 여자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박한빈 씨 핸드폰도 주세요.”한참을 박한빈만 뚫어져라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그러자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박한빈의 핸드폰을 ‘탐험’하기 시작했다.박한빈의 핸드폰 속 문자 내용들은 거의 다 업무에 관한 것이었고 연락처에도 같은 업계 사람들뿐이었다.게다가 문자를 나눈 사람도 몇 없었다.“전에 미리 지우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물었다.“내가 뭘 지우는데?”박한빈은 오히려 웃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2화

    박한빈은 성유리가 건네는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성유리가 물었다.“안 보세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급한 일 아니잖아. 일단 네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어.”“아, 제가 이미 공장 가서 검사해 봤어요. 지금 맹씨 가문 소유의 공장은 맹정태 씨 매형이 보고 있었어요. 직원은 500명 정도 있고 기간은 25일로 정했대요. 그리고... 만약 재료들이 충분하게 준비됐다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근데 요즘 공장에서 일하는 효율이 좋지 않대요. 맹정태 씨 매형도 도박꾼이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요. 그래서 사실 공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료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짧은 시간 내에 필요로 하는 수량을 만들어내려면 그 사람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성유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고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사로잡혀 멍해졌다.심지어 어느 한순간,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다.성유리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박한빈의 시선을 발견했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제 말 듣고는 계세요?”“응. 듣고 있어.”박한빈은 그제야 대답하며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래서? 넌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지?”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손가락으로 성유리의 손바닥을 계속 만지작대고 있었다.그 탓에 간지러워진 성유리가 손을 빼내려 하자 박한빈은 힘을 더 세게 주며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맹정태 씨 매형 도박꾼이라고요! 사실 공장에 있던 재료들 다 그 사람이 가져다가 팔았어요. 혼자서 성 씨가 다른 도박꾼이니 만약 이 일이 맹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마어마한 후과를 치러야겠죠.”“그러니까 매형이라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꼭 찾아낼 거예요. 자기 때문에 텅 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91화

    홍지은은 떠나가려는 성유리를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봤고 그녀는 자신의 침을 챙겨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룸의 문이 스르르 닫힐 때, 성유리는 남아있는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그 시각 홍지은은 새로 생긴 자신의 팔찌를 감상하고 있었다.여유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 성유리를 의심할 때와 180도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성유리는 홍지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필경 홍지은이 말한 것처럼 박한빈을 무너뜨리려는 성유리의 생각이 누구한테나 이상하게 들릴 테니까.제일 먼저 박한빈의 지금 위치와 수법으로 보자면 절대 감정만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론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한 마음이다.이런 상황에 그 아무도 성유리가 박한빈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담보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홍지은이 잔뜩 경계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성유리가 방금 한 행동들은 다... 홍지은이 자신을 철석같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만약 가능했다면 성유리는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홍지은을 속이기 싫었다.그러나 지금 홍지은에게 바로 지나간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한다면 그녀는 무조건 경계심과 의심을 버리지 않을 게 뻔했다.그래서 성유리가 찾은 변명이자 핑계가 바로 이런 방식이었다. 어떻게 됐든... 일은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성유리가 맹정태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박한빈에게 가져다주려고 할 무렵, 캐톡으로 누군가가 성유리에게 친구 신청을 보내왔다.[안녕하십니까. 맹정태입니다.]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성유리는 친구신청을 수락했고 일 분도 채 안 되어 맹정태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보내왔다.[이번 일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성유리는 맹정태가 감사 인사를 하려고 특별히 친구 추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다.그러자 맹정태가 이내 또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과 박 대표님 사이 일은 홍지은에게서 들었습니다.][사모님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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