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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

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

“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

“아니에요...”

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

“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

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

“할머니.”

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머님...”

“아줌마, 잘 지내셨어요...”

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

“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

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

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

“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

“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

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김서영은 과거에도 고집스럽게 남편의 유언을 따르겠다고 주장했다.

성유리가 실종된 것이 아니고 성씨 가문으로 돌아온 이상 박한빈과 결혼해야 할 사람은 반드시 성유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때 김서영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박한빈의 아내는 성유정이었을 것이다.

성유정은 이 사실에 대해 김서영에게 서운함과 분노를 느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김서영은 성유정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향해 말했다.

“유리야, 같이 올라가자. 할 얘기가 있어.”

“네...”

성유리는 곧바로 대답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명함을 건넸다.

“내가 아는 유능한 한의사의 명함이야. 내일 가서 진료받아봐. 임신하려면 몸 관리 좀 해야지.”

성유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움직이지 않았다.

김서영은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잖니. 아이를 가질 생각도 해야 할 때야. 할머니께서 성유정을 많이 아끼시겠지만, 네가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오늘 김서영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년 일은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야. 벌써 1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그 일을 잊고 넘겨야 하지 않겠니?”

그 말에 성유리는 바짝 긴장했고 손에 땀을 쥐었다. 본능적으로 아랫배가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사고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위로해 주려고 ‘사고’라고 말했지만, 성유리는 누구보다도 그 일이 사고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성유정이 고의로 벌인 짓이었어... 분명히 일부러 계단에서 밀어버렸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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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8화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7화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6화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5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4화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연정우에게 던지듯 건넸다.연정우는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들었다.앞의 몇 장만 대충 본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서류를 쥔 손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박한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것 같으세요?”“이 서류들,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연정우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더니 차분하게 물었다.“그건 교수님께서 아실 필요 없습니다.”“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박한빈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잔으로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하지만 그런 박한빈을 보는 연정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제가 원하는 게 뭐일지는... 이미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박 대표님, 같은 남자로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연정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성리 그룹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표님은 그저 지화 그룹의 대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구는 것뿐이잖습니까!”“그래요, 제가 가진 게 그런 거니까요. 문제 있습니까?”박한빈이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그리고, 연 교수님께서 정말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제가 이런 자료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 역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교수님과 유리의 파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서류는 교수님과 제 사이의 비밀로 남겠죠. 하지만 계속 밀어붙이시겠다면... 제 탓은 하지 마시길.”더 깊은 침묵을 유지하던 연정우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손등에는 혈관까지 불거져 나왔다.박한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교수님한테도 꽤 이득이 되는 거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3화

    밖에서 들려오는 문고리 소리에 짜증이 밀려온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꺼져!”간결한 한 마디에 사무실 밖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성유리는 더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를 밀어내던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까지 그 행동과 함께 메말라갔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눕더니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에 걸려 있는 백열등을 바라보았다.그런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힘들어? 아니면 억울해? 연정우를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드냔 말이야.”그는 애써 조롱하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박한빈의 손 역시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가슴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고통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다다른 것이다.성유리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박한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했다.박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런 것 같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어때?”성유리가 천천히 눈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한 번 찼다.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연정우를 만나서 방금 그 서류를 보여줄 예정이야. 만약 그걸 보고도 너랑 계속 결혼하려 한다면 더는 나도 강요하지 않고 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어때? 성유리, 나랑 내기 하나 할래?”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그녀의 침묵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왜, 겁나?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하더니. 그러니까 너도...”“좋아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박한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내기할게요.”“좋아.”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2화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더니 분노로 가득 찬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너, 설마 정말 연정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매혹적인 빛을 띠었다.박한빈은 그 눈물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성유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증오였다.그녀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이런 선택을 할 때부터 성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할까?성유리와 평생을 남남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평생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한빈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성유리가 성리 그룹의 일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든,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증오하든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연정우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성유리의 눈물을 마주한 박한빈의 손발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하지만 질문을 내뱉은 순간,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희는 단순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데, 어떻게...”“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성유리의 그 한 마디는 육중한 바위가 되어 박한빈의 입을 막아버렸다.그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뺀 박한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거지, 유리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연정우는 이때까지 계속...”“정우 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했든,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날 아껴줬어요. 그 사람은 다정하고 항상 내 기분부터 살펴주거든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어 주고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1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몇 발짝 다가간 성유리가 손을 높이 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바닥은 박한빈의 그 어디도 건드리지 못했다.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던 박한빈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미친놈.”성유리가 말했다.박한빈은 그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응, 나도 알아.”성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하지만 박한빈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아냈다.“연정우 씨 외할아버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세요.”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치매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어쩌면 곧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정우 씨가 최대한 빨리 나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성유리가 말을 마쳤지만 박한빈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성유리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이 되물었다.“그래서?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그 말에 성유리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니까, 결혼식은...”“안돼.”박한빈은 단호한 말투로 성유리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성유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그녀의 꽉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정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박한빈 씨, 정말 저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이냐고요?!”그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 연정우와 연정우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약점을 잡을 수도 없었겠지. 치매에 걸린 거? 그건 다 하늘에서 천벌 내린 거야. 인과응보라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면서, 왜 난 동정 안 해줘? 그 사람들만 불쌍하고 혼자 버려진 나는 안 불쌍해? 네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박한빈은 자신이 진심으로 억울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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