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성유리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무감각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서서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마치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그 순간, 성유리는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바로 그녀가 성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성유리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직접 학교로 와서 그녀와 성유정을 데리고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다.그날, 세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교통사고를 겪었었다. 사고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운전기사의 운전 미숙으로 차가 갓길보호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었다.성유리는 머리를 창문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지나쳐 성유정에게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었다.어머니는 성유정을 안고 울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었다.그때 성유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은 이유는 단지 그녀가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기 때문일 뿐,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건 성유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성유정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성유리는 그때부터 자기가 두 눈으로 목격했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어머니 대신 성유정을 안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박한빈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성유리는 그렇게 덩그러니 차에 남아있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렸을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박한빈이 차를 세운 곳이 집과 꽤 거리가 있어서 흠뻑 젖고 말았다.집 앞에서 올려다보니 성유정의 방과 박한빈의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아니 관심조차 없겠지...’성유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너 지금 행복하니?’성유리는 그동안 한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를 물어볼 여유가 없이 살아왔었다.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그래? 그러면 다행이야.”진무열은 대답하고 나서 침묵에 빠졌다.“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성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진무열도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성유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다시 입을 열었다.“그때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몇 년 동안 정말 네 생각 많이 했어. 늦었으니, 푹 쉬어.”그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성유리는 휴대폰을 쥔 채로 한참 동안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그날 밤, 박한빈이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진무열의 전화 때문인지, 어렵게 잠에 든 후에는 밤새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씨 가문에 막 돌아왔던 시절로 되돌아갔다.성씨 가문은 성유리를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가 시골에서 온 것을 비웃었고, 심지어 캐비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조롱했다.연회장 꼭대기에는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성유리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놀리며 수영할 줄 아는지 시험해 보겠다며 수영장 근처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갑자기 수영장에 밀어 넣어 빠뜨렸다.물이 코와 입,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 괴로움과 질식감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성유리는 충격에 눈을 번쩍 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 공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여기가 박한빈과 함께 지내는 곳, 도연제라는 현실을 인지했다. 꿈속의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시계를 보니 평소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성유리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절벽 끝에 몰린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성유리의 반응은 박한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직접 옷을 갈아입혔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결국 성유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도련님, 사모님...”숙자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자신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순순히 따랐다.차에 오른 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병원은 안 가도 돼. 어머님께는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바쁘잖아. 그냥 아무 데나 내려줘.”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었기에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2년이 넘게 되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박한빈은 분명 그녀가 왜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인 성유리에게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성유리는 한때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박한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아이가 생기면 비로소 그녀에게도 진정한 가정이 생길 수 있을 거
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박한빈은 결국 성유리를 별장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길가에 내려주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떠났다.검은색 포르쉐는 성유리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였다.‘더 이상 저 녀석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마.’밖에 나온 김에 성유리는 잠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원유진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박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신가?”원유진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는 네가 사람들 틈에서 어울리는 방법을 모를 줄 알았는데, 쇼핑도 하러 나오네.”원유진은 성유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유리를 앙숙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다른 사람들은 성유리가 박한빈과 결혼한 이후, 그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바꾸었지만, 원유진은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모님 자리가 성유정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성유리는 그와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원유진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막아섰다.“어딜 가려고? 보아하니 혼자 있네. 같이 다니는 게 어때?”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불편해.”“뭐가 불편해? 누군가를 따로 만나려는 건 아니지?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성유리는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유진 씨, 교육은 제대로 받은 거지?”“무슨 소리야? 당연히 받았지!”“그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알고 있지?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 없어?”성유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정확하게 원유진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듯 얼굴이 굳었다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가볍게 웃었다. 그 반응에 당황한 원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가 웃겨서 웃어?”“유진 씨, 시간이 남으면 책 좀 많이 읽어.”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교양 없는 건 둘째 치고, 말하는 것마다 남들 웃음거리밖에 안 되거든. 진짜 무식하고 악랄하네.”이번에는 성유리가 아예 대놓고 원유진을 모욕했다.그러자 원유진의 얼굴은 즉시 창백해졌고, 분노로 가득 찼다.성유리가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원유진은 성유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시골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감히 여우처럼 굴면서, 박한빈을 차지했다고 착각해? 너 같은 게 뭐라고...”원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행동은 놀랍도록 단호하고 정확했다.순간 멍해진 원유진은 곧바로 성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성유정은 이를 막으려다 원유진에게 밀려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유리 진열장으로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그녀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손을 들자, 피가 팔을 타고 줄줄 흘렀다.성유정은 울먹이며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언니, 너무 아파...”...“성유리!”복도 끝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성유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윤청하가 성유리 앞까지 걸어와 떡하니 서 있었다.“유정이는 괜찮니? 많이 다쳤어?”“엄마...”뒤에서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청하는 성유리를 외면하고 바로 성유정 쪽으로 돌아섰다.성유정의 팔에 감긴 붕대와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본 윤청하는 표정이 굳어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니?”“의사 선생님이 잘 치료해 주셔서 이제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성유정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왜 갑자기 돌아오셨어요? 다음 주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빠는요?”“네가 걱정돼서 먼
연정우는 자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 같다.돈과 권력.사실 그건 애초에 그가 쫓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아무도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고, 아무도 영원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연정우가 진짜로 쫓아야 했던 것은 오직 그 한 줄기 빛뿐이었다.늦은 밤까지도 자신을 위해 남아 있을 그 불빛 하나.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너무 늦어버렸다.눈을 감는 순간, 연정우는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어릴 때 그는 새 그림 도구 세트를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부모님께 여러 번 얘기했고 세뱃돈을 모아 직접 사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부모님은 그것이 지나친 낭비라 생각했고 그들의 검소한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그래서 결국 연정우는 문구점에서 몰래 그 그림 도구를 훔쳤다.그는 학자 집안 출신이었고 바깥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품격 있는 모습을 유지해 왔다.덕분에 주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래도 나중에 부모님은 결국 진실을 알아버렸다.그리고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연정우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바로 문구점 앞에 무릎 꿇리고 주인에게 용서를 빌게 만든 것이다.그때, 주변에는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그러나 부모님은 연정우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정직과 성실, 그게 연정우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뿐이었다.정직과 성실이라는 그 두 단어를 성인이 된 지금 떠올리며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아주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손목시계의 시침이 정확히 열 시를 가리켰다.박한빈은 이미 사람을 시켜 연정우의 차가 향한 방향을 알아냈고 지금 그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그는 계속해서 연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우와 협상할 기회만 생긴다면 반드시 설득해서 성유리를 놓아주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정우의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운전을 하던 박한빈이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보니 손목시계의 시침이 갑자기
“미쳤어? 성유리, 당장 손 놔!”연정우는 필사적으로 핸들을 되찾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마치 먹이를 물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어 핸들을 꽉 붙잡았다.차의 속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광란의 질주를 이어갔다.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아마도 몇십 초 정도였을 것이다.그렇지만 연정우에게는 단지 한순간처럼 느껴졌다.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연정우는 더 이상 총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다.그러나 그 찰나, 두 대의 차량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쾅!굉음이 울려 퍼졌고 차체가 한순간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격렬한 충격과 함께 다시 도로로 떨어졌다.연정우는 크게 뜬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성유리였다.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성유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연정우가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그가 그녀를 납치한 진짜 이유가 박한빈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연정우는 생각했다.비록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유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을 것이라고.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한 감정도 이제는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냥 단순히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하지만 성유리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단 한 마디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를 죽음으로 끌어들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연정우는 그녀에게 별다른 원망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어딘가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그때 연정우는 불현듯 자신과 성유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그날, 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연회장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정원으로 나왔었다.그는 당시 명문대 교수였고 외할아버지는 존경받는 화
에릭이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아내 분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박한빈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내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금 뒤쪽에 있는 화단 쪽에서 아내 분이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걸 봤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전에 마피 쪽에 있던 연정우 씨였던 것 같은데요?”연정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박한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그리고 즉시 소녀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이 어디로 갔지?”“그건 잘 모르겠지만 대신 차 번호를 기억해 뒀어요. 필요하세요?”“어디 있는데?”박한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소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천 달러요, 선생님.”박한빈은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자신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번호!”소녀는 카드에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박한빈이 누군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돈을 떼먹을 사람은 아닐 터였다.결국 소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박한빈은 주저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선생님, 그건 제 휴대폰이에요!”소녀가 깜짝 놀라 소리치며 따라붙으려 했지만 에릭이 가로막았다.“넌 누구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에릭 씨.”에릭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넌 이곳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소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가슴팍의 직원 명찰을 가리켰다.“저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에요. 서빙하러 들어온 거랍니다.”에릭은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럼 이제 네가 해고됐다는 걸 알려 주지.”...한편, 성유리는 연정우의 차 안에 있었다.그가 어디로 차를 몰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에릭 씨!”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에릭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이번 ‘전쟁’에서 그들은 승리했으니 그는 상당한 보상을 손에 넣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아마도 박한빈이 억지로 그를 이 판에 끌어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제 단순한 승패로는 에릭의 감정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처음에는 그래도 기대감이 있었다.연정우라는 상대는 꽤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며 심지어 그들을 완전히 박살 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랬다면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그러나 정작 모든 일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끝나 버렸다.별다른 기복도 없이.이건 정말 따분했다.오늘 밤의 축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박한빈이 꼭 성유리를 이 연회에 참석시키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승리의 일부는 성유리의 몫이라는 말과 함께.그래서 오늘 밤의 축하는 유난히 ‘건전’했다.아니, ‘심심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에릭은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샴페인 잔에 던져 넣었다.한 잔에 5만 달러가 넘는 술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리고 뒤쪽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뭐죠?”“로얀이라는 분이 데리고 오신 동반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습니다.”상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자 에릭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라고요?”“아까 경호원들이 순찰 중에 봤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초대장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이미 끌려갔습니다.”에릭은 보고한 사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러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에릭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까?”“방금 CCTV를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마피
에릭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입속으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굳이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대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귀를 찢을 듯한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들떠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원래 이들의 축하 파티는 이런 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이 모든 건,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곳에 적응시키고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금 깨닫게 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그리고 문득, 며칠 전 연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것은 그녀와 박한빈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물론, 연정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보장도 없었다.연정우가 말한 과거들 중, 진실은 얼마이며 거짓은 얼마나 될까?성유리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웠고 과거의 선택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한빈의 감정을 믿고 싶었다.그렇게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지금의 자신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졌다.박한빈과의 관계조차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정작 그녀 자신도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데 하물며 박한빈이 온전히 알 수 있을 리가 있을까?성유리는 손에 든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달콤한 맛과 함께 과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기로 했다.이곳은 에릭이 통째로 빌린 사적인 공간이었다.주변에는 수시로 순찰을 도는 경호원들이 있어 안전은 보장된 곳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이곳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그리고 그의 총구는 성유리의 허리에 거의 닿아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 반응이 오히려 연정우를
연정우는 그곳에 머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장 자신의 거처로 향하려고 차를 몰았다.그는 성유리를 데리고 무작정 떠날 생각이었다.성유리에게 여권이 없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설령 정처 없이 떠돌게 되더라도 괜찮으니 그저 두 사람만 함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비록 허름한 지붕 아래일지라도, 한 줄기 불빛만 있다면 그곳이 곧 그들의 집이 될 테니까.그렇지만 연정우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집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얼마 전 성유리가 가져왔던 짐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고 테이블과 바닥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 모습을 본 연정우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현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성을 놓고 웃었다.도대체 왜 성유리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성유리가 어떻게 기다려줄 수 있단 말인가?그러니까 결국 처음의 판단이 맞았다. 이 모든 것은 애초부터 짜인 각본이었다.처음부터, 박한빈이 계획한 덫이었고 연정우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바보였다.분명 의심도 했었고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연정우는 그 함정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심지어 성유리가 밤늦게 건네준 차 한 잔에도 감동을 받았을 정도였다.지금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상황인데도, 눈 깜빡할 순간이면 누군가 들이닥쳐 죠지처럼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연정우는 여전히 성유리가 생각했다.오직 성유리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결과는?연정우는 또다시 속은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진심을 다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철저한 이용과 기만이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오직
“*발, 내가 미쳤지! 네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야. 지금 당장 여기서 죽어버려!”죠지는 연정우에게 더 이상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쾅!총성이 터지는 순간, 연정우는 깨달았다.박한빈은 애초에 그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마피를 삼키고 자신을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자신을 반드시 죽이려 하고 있었다.도대체 왜?아마도 박한빈이 죠지에게 무언가를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를 배신자로 만들고 마피를 배반한 장본인이라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이제 죠지에게는 물러설 길이 없었다.그러니 여기서 자신을 쏴 죽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박한빈이 원한 것은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연정우의 죽음이었다.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그리고 다음 순간, 연정우는 반사적으로 총구를 붙잡고 강하게 비틀었다.탁!총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죠지는 지체 없이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연정우는 죠지의 손목을 틀어쥐고, 총구의 방향을 억지로 돌렸다.쾅!다시 울린 총성.그 순간, 죠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의 커다란 눈알은 마치 튀어나올 듯했고 그 안에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그리고 연정우의 모습이 비친 죠지의 동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려졌다.하얀 얼굴엔 새빨간 피가 튀어 선명한 대비를 이뤘고 죠지의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죠지의 숨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마침내, 억지로 버티고 서 있던 죠지는 연정우의 품속으로 쓰러졌다.연정우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러나 죠지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죠지를 밀쳐냈다.쿵!죠지의 시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크게 뜨인 채였다.마치 죽기 직전까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은 듯한 표정으로.연정우는 발까지 헛디디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제야 그는
연정우는 며칠 전 저택에서 열린 축하 파티를 떠올렸다.그날, 죠지는 그를 사람들 앞에 세웠다.샴페인이 잔잔히 흔들리는 사이 그는 모두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그 순간, 그는 확신했다.과거에 자신을 의심하고 반대했던 이들이라도 그날 밤만큼은 모두 입을 다물었으리라고.그래서 죠지는 1차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연정우를 위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연정우의 성과를 모두에게 공개해야만 그들 역시 기꺼이 자금을 맡길 테니까.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부르노 측이 최고점에 도달한 후에도 추가 투자를 계속하자 죠지는 연정우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시장은 변덕스러운 법이니 몇 초의 망설임도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그래서 연정우는 주저하지 않았다.그는 박한빈 또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연정우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완벽한 승리였다.이번만큼은 꼭 박한빈을 꺾을 것이라는 일념 하나로 모든 걸 걸었다.그렇지만 연정우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박한빈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젠 펀드가 아니라 진짜 목표는 마피 전체를 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생각해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다.그때도 연정우는 자신의 회사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설령 패배하더라도 사씨 가문이 뒤를 받쳐주기에 완전히 망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박한빈이 노린 것은 단순한 한 회사가 아니었다.그는 사씨 그룹 전체를 원했다.마치 지금처럼.박한빈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젠 펀드가 아니라 마피 전체와 부르노 일당까지 모두 포함된 거대한 판이었다.아니, 사실 저들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짐승들이라고 해야 옳았다.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익뿐.감정도, 인간성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마치 초원에서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일단 상대의 목덜미를 물었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자들.결국, 마피는 끝장났다.연정우의 휴대전화가 계속해서
그러니 아무리 표정 관리를 잘하는 성유리라도 그 말을 듣고 나서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한참 후에야, 성유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그랬어요?”“박한빈 씨가 이런 이야기를 너한테 했을 리가 없지.”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사람은 절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해.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들추고 싶겠어? 그래서 말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거지?”“걱정 마. 이번에는 나도 반드시 박한빈 씨를 무너뜨릴 거니까.”“그리고 그때가 되면 네 여권도 찾아줄 테니까 너도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진지했다.사실 연정우는 성유리가 떠나지 않길 바랐다.박한빈과의 ‘싸움’에서 승리는 물론 원했다.하지만 만약 승리의 순간에 성유리가 자기 곁에 있어 준다면 그것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최상의 자리에 올라서면 그때는 누군가가 불을 밝혀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누군가가 성유리이기를 바랐다.“고마워요.”그러나 성유리의 대답은 단순했다.연정우가 바랐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당장은 성유리가 자기편에 서 있기만 해도 충분했으니 말이다.“됐어. 이제 자러 가.”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며칠만 기다려. 좋은 소식만 들려줄 테니까.”“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런데... 만약 연정우 씨가 진다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진지했다.연정우는 순간 성유리가 자신을 걱정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그녀는 단지 경고를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승리가 그렇게 쉽게 주어질 리가 없었다.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지 않나.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의 충격은 더욱 처참할 것이라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잘 안다.그러나 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