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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송진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

“언니, 왔어?”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

“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

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

“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

“출근했어. 바쁜가 봐...”

“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

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진아, 그만해.”

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

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야! 너...”

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랑 싸우지 마.”

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

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

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

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

“네.”

“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칙적인 식사를 못 해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 네 아버지랑 나는 지금 해외에 있어서 바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유정이를 집으로 데려가서 잘 돌봐줘. 알겠지?”

“네.”

성유리는 흔들리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윤청하는 자신이 조금 지나쳤음을 깨달았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언니잖니...”

성유리는 핸들을 꽉 쥐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쳤지만, 결국 참아내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더 하실 얘기 있으신가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윤청하가 말했다.

“유정이 좀 바꿔 봐.”

“...”

성유리는 휴대폰을 뒷좌석에 앉은 성유정에게 건넸다.

“엄마!”

성유정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이 좋은 엄마와 딸의 통화가 이어졌다. 성유정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이는 상사를 대하는 듯한 성유리의 차갑고 딱딱한 태도와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성유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담담하게 안전벨트를 꽉 조이고 운전했다.

“이게 누구야... 유정 씨가 왔네요!”

집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집사인 숙자 아주머니가 성유정을 반갑게 맞이했다.

“숙자 아주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성유정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유정 씨가 이렇게 예뻐지다니! 마침 오늘 유정 씨가 좋아하는 탕수육을 만들었어요. 조금 있다가 꼭 맛보세요!”

숙자 아주머니는 성유정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안주인인 성유리는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삶에 익숙해진 그녀는 서운하거나 언짢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하인들에게 성유정의 짐을 객실로 옮기라고 지시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여기 있었네?”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정이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언니, 설마 오빠랑 따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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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성유리도 사실 어떤 말을 아이한테 해줘야 하는지 잘 몰랐다.옆에서 조용히 엄마의 말을 기다리던 하늘이는 결국 고개를 돌려 박한빈에게 대답했다.“감사합니다.”“이거 어떻게 접은 거야? 나도 배워 줄 수 있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하늘이에게 물었다.“완전 쉬워요!”그 물음에 하늘이는 잔뜩 신나 하며 박한빈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시작했다.박한빈은 겉으로 보기에 아이의 설명을 경청하는 것 같았지만 한쪽으론 성유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고 했지만 실패해 그냥 포기해 버렸다.저녁 메뉴는 매운탕.늘 제일 순한 맛으로 먹던 김서영조차 오늘은 특별히 매운 맛으로 먹겠다는 말을 남겼다.먹음직스러운 칼칼한 국물의 냄새가 식당에 퍼졌지만 하늘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엄마. 너무 많이 먹지 마. 많이 먹으면 목 아프잖아. 전에 이모랑...”말하던 아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는데 문득 어느 한순간에 사하나의 존재를 떠올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제야 사하나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것 같기도 했다.어린 하늘이도 느꼈으니 식사 장소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은 더 빨리 알아차렸을 것이다. 성유리의 표정이 이미 잔뜩 굳어졌다는 사실을.어색한 침묵을 뚫고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맞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너무 맵게 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렇게 심하게 맵지는 않을 거야.”“자, 이제 식사합시다.”박한빈도 김서영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사실 성유리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필경 요즘 입맛도 별로 없고 먹고 싶은 의욕도 없었으니까.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박한빈이 어르고 달래서야 성유리는 겨우 몇 입을 먹었었다.지금 성유리는 자신의 가슴이 뭔가에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그래서 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에 의해 반강제로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음식들을 씹고 있어도 맛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6화

    설날.봄에 피는 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한다.시대의 발전과 맞먹게 지금은 예전의 설날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제일 기대하고 설레는 날이다.설날이 되면 사람들은 다들 새 옷을 곱게 차려입는다. 그리고는 지나간 해에 벌어진 일들과 나쁜 기억을 잊기로 한다.사람들의 마음 깊은 속, 설날은 기쁜 날이자 기대되는 날이고 온 가족이 모이는 풍요로운 날이다.성유리는 지금껏 한 번도 설날을 기대한 적도, 풍요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설날은 하늘이에게 있어 제일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한다.지나간 몇 해 동안 설날은 모녀 둘이 조용히 보냈었다. 성유리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한다고 해도 텅텅 빈 집을 볼 때면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자기뿐만 아니라 사씨 가문 또한 제일 최악의 설날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가족을 잃은 슬픔과 고통은 특히 이런 명절에 더 심해진다.성유리는 전에 사하나가 사씨 저택에서 설날을 보낸 뒤, 바로 경운시로 날아와 두 사람과 함께 명절을 보내던 것이 생각났다.사하나는 늘 하늘이에게 세뱃돈을 준비해 뒀지만 이제 더 이상 아이는 그 돈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그런데도 하늘이는 사하나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에겐 아빠랑 할머니가 늘 옆에 있었으니까.성유리는 오랫동안 하늘이가 이모를 찾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이제 아이는 사하나를 잊어버렸다고 확신했다.‘어떻게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지?’솔직히 성유리는 하늘이를 조금 원망했다. 사하나의 죽음은 하늘이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지만 아이는 이제 이모를 떠올리지도 않고 있으니 말이다.만약 그날 스키장에 가지만 않았다면...“성유리.”다정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성유리는 그 사람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놓인 것을 봤다.박한빈 손의 온기가 느껴지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고 방금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어떻게 나까지 하늘이를 탓해...’‘3살짜리 애가 뭘 안다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5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죄송합니다. 그럼 이만.”운전기사는 계속 대문 밖에서 박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기사는 오늘도 박한빈이 하루 종일 사씨 저택에 머물 줄 알았다.그래서 자기가 마실 커피를 사러 갔다 오려고 했지만 시동을 걸기도 전, 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고 박한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굳이 묻지 않아도 운전기사는 박한빈이 오늘도 사하나의 가족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사실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필경 핏덩이 같은 딸을 잃은 부모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이런 도리는 박한빈 또한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사조차도 성유리가 아픈 원인이 사하나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라고 했으니까.박한빈은 성유리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정도로 헌신했다. 죽은 사람을 되돌리는 일 빼고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었다.그래서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파렴치하지만 유가족을 찾아가 한번, 또 한 번 비는 것뿐이었다.박한빈은 유가족이 성유리를 용서한다는 단 한 마디만 해줬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위로를 건넨다면 성유리가 나아질지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그러니 어떤 수를 쓰든지, 무슨 대가를 치르든지 박한빈은 해야만 했다.이내 박한빈이 탄 차는 실버 포레스트에 도착했고 원래 두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귀신처럼 도착하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박한빈이 직접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자 도우미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대표님.”도우미들의 손에는 보기 좋은 음식이 들려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사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십니다.”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도우미의 손에서 음식을 건네받았고 그 시각, 성유리는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비록 집안에 난방이 잘 되긴 하지만 성유리는 옷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4화

    “어르신, 사모님, 박 대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사씨 저택, 류수미는 어쩌다 기분이 괜찮아져 밥을 먹고 있었지만 도우미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렸다.류수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왜 또 왔대요?”“두 분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상의? 뭐를 상의하는데요? 가서 말해요.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말을 마친 류수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사민혁은 식탁에 마주 앉아 고민하더니 차분한 말투로 도우미에게 말했다.“돌아가시라고 하세요. 오늘은 손님 맞을 기분이 아니라서.”“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께서...”“그럼 됐어요. 거기서 기다릴 거면 기다리라고 하죠.”사민혁은 한마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고 이렇게 하면 박한빈도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서재에서 한참 동안 책을 읽던 사민혁이 창문을 힐끔 내려다보았고 박한빈이 아직도 밑에서 기다리는 것을 발견했다.오늘 금성의 온도는 너무 낮지 않았지만 눈이 조금 내리고 있어 박한빈이 더욱더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사민혁은 그런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결국 도우미에게 그를 집안으로 들이라고 했다.“박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사민혁은 짜증 섞인 말투로 박한빈에게 따지듯 물었다.“이게 지금 며칠 쨉니까? 매일 찾아오시면 어떡하죠? 누가 보면 저희 사씨 가문이 사고라도 친 줄 알겠습니다.”사민혁의 물음에도 박한빈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는데 눈이 오는 밖에 오랫동안 서 있은 박한빈의 코는 이미 빨개졌고 귀도 살짝 얼어있었다.하지만 허리는 여전히 꼿꼿하게 핀 상태였고 호흡을 고르던 박한빈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일입니다. 두 분이 성유리를 한 번만이라도 보셨으면 합니다.”“대체 우리가 왜 걔를 보러 가야 하는 거죠?”사민혁이 대답하기도 전, 한쪽에서 날카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류수미는 자기 방에서 사민혁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3화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가사도우미들은 펼쳐진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박한빈은 아주 침착했고 담담한 말투로 고개를 돌려 도우미들에게 말했다.“의사 불러오세요.”그 말에 정신이 든 도우미들은 서둘러 움직였고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성유리를 말리려고 다가왔다.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역시...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다 맞히셨네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다.이미 이성을 살짝 잃은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힘껏 밀어내며 고래고래 외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이거 놔! 놓으라고!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까부터 당신은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거야?”“제발 나 좀 죽게 내버려두라고! 박한빈,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죽게 해줘.”눈물은 성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 박한빈의 옷을 적셨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절대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박한빈이 입을 열었다.“한빛시는 네가 가자고 해서 간 게 아니야. 스키장도 네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고. 눈사태가 벌어진 것도 유리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런 책임을 물 이유는 없어.”“그렇지만 하나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하나가 하늘이 때문에 죽었어요... 만약 걔가 하늘이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하나도 살 수 있었어요. 근데...”“그래. 하나 씨가 하늘이를 구해줬어. 그래서 난 하나 씨에게 너무 고마워. 그렇지만 유리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죽을 이유도 없다고.”“그리고 네가 죽는다 해도 하나 씨는 돌아오지 않아. 이건 명확한 사실이고.”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이럴 때마저도 그는 성유리를 탓하거나 나무라지도 않았다.‘그래서 어젯밤은 나한테 준 보상이었던 건가?’박한빈은 그제야 성유리가 보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죽으려고 했으니 사씨 가문도 찾아가고 하늘이한테도 갔구나.’그는 성유리가 자신에게 미안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2화

    성유리는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준비해 둔 종이의 개수와 맞먹게 성유리는 하늘이한테 해줄 말이 많았다.심지어는 하늘이가 새해마다 자신이 쓴 편지를 볼 수 있게 가득 써놓으려는 생각도 했었다.하지만 막상 연필을 집어 드니 도통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다.그러다 문득, 성유리는 사실 자기는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꼈다.필경 그녀의 선택은 제일 직접적인 사실이니까, 그리고 하늘이도 자기 같은 나약한 엄마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엄마로서 하늘이에게 편지를 남길 자격도 없다고 여겨 연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한참 뒤, 성유리는 다른 서랍을 열어 며칠 동안 몰래 숨겨둔 유리 조각을 꺼냈다.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는다는 말은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아무리 부정해도 사하나는 결국 하늘이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 확실했고 아직 어린아이에게 성유리는 그 어떠한 상처도, 타격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니 사씨 가문에서 원하는 목숨을 성유리는 본인이 갚기로 마음먹었다.이렇게 되면 그들이 두 번 다시는 하늘이가 사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어차피 성유리가 자기 생명으로 “빚”을 갚을 거니까.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유리 조각을 손에 들고는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그곳에 있는 커다란 거울은 성유리의 모든 행동을 비추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경동맥을 쉽게 찾아냈다,‘이제 힘껏 그으면 돼.’‘근데 이러면 보기 너무 흉할 텐데.’박한빈이 새로 산 집에서 이렇게 험한 몰골도 죽고 싶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가 하루 종일 성유리를 지켜보고 모든 말과 동작을 감시하니까.그래서 성유리는 남겨질 집과 박한빈에게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만약 오늘 그런 핑계를 대 박한빈을 보내지 않았다면 성유리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생각에 잠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1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 눈빛을 본 성유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말에 숨은 의도나 계획을 알아차렸을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순순히 동의했다.“그래. 내가 가져다줄게. 언제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마침 박한빈 씨도 요 며칠 할 일이 없으시지 않나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오후에 가실래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조금 강한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뼈마디가 아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파요.”“미안. 내가 또 아프게 했네.”박한빈은 금방 사과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떠한 파동도, 미안하다는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하려던 때,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럼 지금 티켓사라고 할게. 아마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고.”성유리는 잠깐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노트북이랑 원고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니요.”“괜찮아. 도착하면 너한테 영상통화 할게. 받을 거지?”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굳어가는 듯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죠!”“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티켓사라고 한다?”박한빈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고 방을 나섰고 당일치기였기에 그는 따로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기에 준비도 무척이나 빨랐다.성유리는 원래 박한빈더러 경운시에서 하룻밤 자고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하도 예민한 사람이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그녀의 어떤 거짓말이라도 다 알아차렸고 단번에 진짜 의도를 파악했다.방금 전도 마찬가지로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줄 알았지만 그건 그저 착각이었다.그 시각, 성유리는 저택 안 사람들과 함께 박한빈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저녁에 올 거니까 나 기다려야 돼.”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40화

    성유리가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바깥은 날이 밝아 있었다.그녀는 박한빈이 회사에 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을 돌리자 뜻밖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었다.박한빈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키보드 소리도 최소화한 상태였다.성유리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그때, 박한빈은 금방 성유리의 반응을 알아채고 말했다.“깼어?”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어?”그제야 성유리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하지만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배고프면 말해.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할게.”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회사 안 가셔도 돼요?”“응. 안 가도 돼.”“사실... 굳이 매일 여기 있으실 필요는 없어요. 저 이제 괜찮아졌으니까요. 대표님께서 매일 출근 안 하시면 정말 괜찮겠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회사 말아먹을까 봐 걱정돼?”“걱정 마. 집에서도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에게 죽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한편, 성유리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음식을 테이블 위에 차려두고 있었다.“왜 식탁까지 내려가서 안 먹어요?”성유리의 질문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글쎄, 그냥 방에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성유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음에도 박한빈은 굳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성유리는 약간 불편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39화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박한빈은 이런 생각을 했다.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이 방에 머문 지도 꽤 되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웠다.이곳이 경운시가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었다.그러니 한빛시에서 벌어진 일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성유리 혼자가 아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목을 스치며 약간의 간지러움을 주었다.성유리는 그 손길을 떼어내지 않고 조용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도 철저히 경계심을 유지하는 듯했다.성유리가 잠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너...”박한빈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방 안은 난방이 켜져 있어 춥지 않았고 오히려 체온이 점점 더 높아졌다.박한빈의 힘은 강했다. 자신의 허리를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성유리는 아프기까지 했다.사실 그는 더 부드럽게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처럼 말이다. 박한빈은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서툴렀다.그는 예전과 달리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꽉 눌렀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프게 했어?”성유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한빈은 성유리가 화가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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