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성유리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무감각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서서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마치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그 순간, 성유리는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바로 그녀가 성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성유리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직접 학교로 와서 그녀와 성유정을 데리고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다.그날, 세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교통사고를 겪었었다. 사고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운전기사의 운전 미숙으로 차가 갓길보호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었다.성유리는 머리를 창문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지나쳐 성유정에게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었다.어머니는 성유정을 안고 울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었다.그때 성유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은 이유는 단지 그녀가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기 때문일 뿐,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건 성유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성유정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성유리는 그때부터 자기가 두 눈으로 목격했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어머니 대신 성유정을 안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박한빈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성유리는 그렇게 덩그러니 차에 남아있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렸을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박한빈이 차를 세운 곳이 집과 꽤 거리가 있어서 흠뻑 젖고 말았다.집 앞에서 올려다보니 성유정의 방과 박한빈의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아니 관심조차 없겠지...’성유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너 지금 행복하니?’성유리는 그동안 한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한지를 물어볼 여유가 없이 살아왔었다.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그래? 그러면 다행이야.”진무열은 대답하고 나서 침묵에 빠졌다.“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성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진무열도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성유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에 다시 입을 열었다.“그때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몇 년 동안 정말 네 생각 많이 했어. 늦었으니, 푹 쉬어.”그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성유리는 휴대폰을 쥔 채로 한참 동안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그날 밤, 박한빈이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진무열의 전화 때문인지, 어렵게 잠에 든 후에는 밤새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씨 가문에 막 돌아왔던 시절로 되돌아갔다.성씨 가문은 성유리를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가 시골에서 온 것을 비웃었고, 심지어 캐비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조롱했다.연회장 꼭대기에는 거대한 수영장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성유리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놀리며 수영할 줄 아는지 시험해 보겠다며 수영장 근처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갑자기 수영장에 밀어 넣어 빠뜨렸다.물이 코와 입,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 괴로움과 질식감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성유리는 충격에 눈을 번쩍 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 공기에 잠시 혼란스러웠다.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여기가 박한빈과 함께 지내는 곳, 도연제라는 현실을 인지했다. 꿈속의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시계를 보니 평소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성유리는 언제나 고지식하고 차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치 절벽 끝에 몰린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성유리의 반응은 박한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를 침대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직접 옷을 갈아입혔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결국 성유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내려갔다.“도련님, 사모님...”숙자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자신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순순히 따랐다.차에 오른 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유리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병원은 안 가도 돼. 어머님께는 직접 말씀드릴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바쁘잖아. 그냥 아무 데나 내려줘.”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었기에 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2년이 넘게 되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보니,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박한빈은 분명 그녀가 왜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혼과 출산은 당연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인 성유리에게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성유리는 한때 희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박한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라도 생기기를 바랐다.아이가 생기면 비로소 그녀에게도 진정한 가정이 생길 수 있을 거
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조차 성유리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원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한의사는 무심코 박한빈을 쳐다보았다.박한빈 역시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듯해 보였고,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그러나 한의사는 곧 평정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그 약은 인제 그만 드시고 우선 몸을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가 약을 하나 처방해 드릴 테니, 관리를 시작해 봅시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의사가 약 처방전을 건넸을 때는 빠르게 손을 뻗어 받았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머뭇거림 없이 병원을 나섰다. 박한빈도 그녀를 따라나섰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밖에 나가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차에 타.”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눈빛 역시 그랬다.“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성유리, 차에 타라고 했어.”박한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병원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성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결국 차 문을 열었다.하지만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갑작스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간신히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데려다주기 싫은 거라면, 지금 차에서 내려줄래?”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 피임약을 먹고 있었던 거지?”그의 질문은 마치 여섯 살짜리 아이도 답을 알 만큼 간단했다. 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박한빈은 차를 멈추었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하지만 진행자는 여전히 그 화제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성유리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른 억측들까지 차단해 버렸다.처음부터 끝까지 성유리는 단 한 번도 박한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성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인지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는 30분도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인터뷰가 끝난 뒤, 성유리는 송효주에게서 사과의 메시지를 받았다.“나도 저쪽에서 이런 의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저 사람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주인공들 인기가 어느 정도인데, 캐릭터 얘기나 할 것이지 왜 네 사생활까지 다 언급하고 난리래?”송효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송효주의 연락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한참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송효주는 아무 대답 없는 성유리의 반응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혹시... 화 난 거야?”“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화가 나는 것도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기억될 정도도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까먹어 버렸고 뒤늦게 뉴스를 통해 자신이 어제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의 채널이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지된 그 채널은 무려 출판사의 공식 계정이었다.곧 출판사에서도 다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날 진행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무례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과,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진행자와는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성유리는 어젯밤 진행했던 인터뷰 질문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식사를 이어나갔다.잠시 후, 앞집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보다는 훨씬 조용하
두 팬덤의 싸움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제작사와 영상 플랫폼 측은 오히려 그런 팬덤 싸움을 반기는 모양이었다.요즘은 다들 그렇듯 차라리 시끄럽게 이슈가 되는 게 조용히 묻히기보다는 수익성이 더 크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던 중, 편집자가 성유리에게 연락해 원고를 요청해왔다.최근 두 달 동안 성유리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낸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곳에서 들어오는 작은 일만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이 틈을 타 성유리를 한껏 밀어줄 계획이었다.“요즘은 시간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난 이 말만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하늘이도 아직 어리고. 그렇다고 이 어린 애가 하루아침에 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알겠어, 신작은 없다 치고, 인터뷰나 하나 잡아줄게. 이 정도는 괜찮지?”“무슨 인터뷰인데?”“웹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인터뷰야. 전에 우리랑 협업한 적 있는 출판사인데,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까 원작자라도 인터뷰해서 판매량 좀 올릴 생각인가 봐.”성유리는 대충 들어주는 척만 하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성유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걱정 마. 언니만의 원칙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언니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인터뷰도 굳이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어.”그 말에 성유리는 뒤늦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오케이, 그럼 답장 보내둔다? 구체적인 시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게.”편집자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성유리도 하늘이의 생체 리듬을 지켜주며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인터뷰 시간은 밤 11시로 정해두고 아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인터뷰를 진행했다.성유리는 진행자가 단순히 드라마의 구상이나 여자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만 할 것이라 예상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집에서는 계속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성유리는 현관문을 꼭 잠가두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꽤 시끄러웠고, 새로운 입주자는 집을 다시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짐 옮기는 소리와 공사 소리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피곤했던 성하늘도 소음 때문에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성하늘의 곁에 누워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성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성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잠이 안 와.”“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올 거야.”성유리의 말에 성하늘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엄마, 그래도 잠이 안 와.”“그럼 뭘 하고 싶은데?”“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기 싫다는 뜻이네?”그 말에 성하늘은 민망한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싫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성하늘은 바로 성유리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의 팔을 꽉 껴안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아이의 반응에 성유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손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괜찮아, 엄마가 나가서 확인해 볼게.”“안돼, 엄마. 나가지 마.”성하늘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가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한 건장한 남자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린 딸과 단둘이 살다 보니 성유리의 경계심은 자연스레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꼭 잠근 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무슨 일이시죠?”“저희 대표님께서 이삿짐 때문에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다
“그렇긴 하죠. 노인 네 명에 어린애 둘 딸린 집인데 부부 중 한 명은 해고당하고 다른 한 명은 월급이 깎였다잖아요. 집 안 팔면 못 살죠.”“그러게요. 그러니까 직장을 들어가도 대기업으로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대우도 좋고 안정적이니까!”“맞아요, 맞아.”“맞다, 하늘이 엄마. 그 친구분... 은 회사 운영하시죠?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성유리는 곁에서 그녀들의 대화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수다 화제가 성유리로 바뀔 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성유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되물었다.“어떤 친구요?”“그냥...”“하늘이 아빠요!”곁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곧이어 후회가 들었는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그 사람... 하늘이 아빠 맞죠?”“그 사람 일이라면 저도 잘 몰라요.”성유리의 대답은 단호했다.“이혼한 지도 꽤 됐고,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지내니까요.”“그래요? 그렇다고 하기엔... 꽤 자주 오는 것 같던데요? 혹시 모르죠, 그분이 아직도 유리 씨한테 관심이 있을지.”“제가 보기엔 두 분 꽤 어울리는 것 같던데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러셨어요. 하늘이가 예쁜 건 다 하늘이 부모님이 예쁘고 잘생겨서라고요!”“저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했다.얼핏 듣기엔 평범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갑자기 날카로워진 성유리의 말투에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엄마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는 애 밥 차려줘야 해서요, 먼저 가 볼게요.”“저... 저기, 하늘이 엄마. 다음에 그 친구분 또 오시면 저한테도 얘기 좀 해줄래요? 우리 남편이 할 얘기가 했다고 그래서...”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하늘이도 충분히 놀았는지 성유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얌전히 그녀의 손을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거침없는 성유리의 행동에 오히려 전화를 건 쪽에서 멈칫하는 듯 보였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물었다.“아까 전화 왜 걸었어?”박한빈은 어떻게든 성유리의 입에서 먼저 어떤 말이든 나오길 기다렸고 성유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것 역시 박한빈의 일관적인 성격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항상 타인이 먼저 다가가야만 했다.박한빈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돌려줄지 고민해 보는 사람.심지어 자신이 주는 그 ‘조금’의 것도 마치 대단한 은혜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전형적인 이기주의자 마인드가 아닐 수 없다.“왜 말이 없어?”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짧은 침묵도 못 참고 성급하게 그녀를 재촉해댔다.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성유리의 말과는 다르게 박한빈은 그녀의 말투에서 사과의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결국, 차가운 웃음을 터뜨린 박한빈이 물었다.“성유리,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예요.”성유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어차피 이 일도 다 대표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대표님이 아파트단지까지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제가 대표님한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제가 무슨 오해를 하든, 그건 다 대표님 자업자득이죠. 그래도 오해했던 건 사과할게요.”성유리는 단숨에 마음속에 있던 말을 쏟아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의 기복도 없이 아주 차분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 단 하나의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안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사과의 뜻이 담긴 그녀의 말 속에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에 불과해 보였다.성유리는 박
그 탓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폰이 어느덧 잠잠해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모녀가 아파트단지에 도착했을 때는 몰려있던 사람들이 전부 흩어진 후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의 손에는 새로운 장난감이 들려있었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가 잠시 멈칫했다.“하늘이 엄마, 고마워요.”누군가가 성유리에게 다가와 말했다.“그... 단톡방에서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사람들이 정말 못돼 먹었죠.”“그러게나 말이에요. 공짜에 눈이 멀어도 유분수지.”이윽고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맞장구를 쳐주었다.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물었다.“이 물건들... 다 누가 보낸 거예요?”“당연히 한빈 씨가 보내준 거죠! 일 때문에 직접 못 온다고 비서님이 대신 갖고 왔더라고요. 설마 얘기 못 들었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그게... 대체 언제였죠?”“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받아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으니까 아마 11시쯤이었을 걸요?”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가 12시쯤이었다.그 말인즉슨 두 사람이 통화하고 있었을 때는 이미 박한빈이 물건을 보낸 뒤였다는 뜻이 된다.성유리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겨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저희가 더 고맙죠. 애들이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그나저나, 유리 씨 남편분... 아니, 전 남편분은 무슨 일 하세요? 장난감 사업이라고 하시나?”“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꽤 잘생겼어요. 연예인 아니에요?”성유리는 그녀들의 말을 모조리 무시한 채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는 성하늘과 함께 자리를 떴다.아이와 함께 집으로 올라오자 관리사무소에서 입주민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공지에는 최근 이틀간 아파트단지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전해 들었으며, 내일부터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그 공지를 확인한 입
성유리는 단체 채팅방 알림을 차단했지만 여전히 개인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다.발송자들은 다 단지에서 알게 된 아이 엄마들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박 대표님 오늘 언제 오시는지 아세요?][오늘 안 오신다면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는데요.]성유리는 무표정으로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았다.사실, 박한빈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모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박한빈은 언제나 그런 일에 능숙했다.그녀가 이 단지에서 겨우 찾아낸 평온한 삶은 박한빈의 등장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박한빈에게 그 돈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결국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성유리와 하늘이의 안정된 일상을 깨뜨리고 있었다.“엄마, 엄마!”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이내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엄마 햄버거는 맛없어?”하늘이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에 들린 음식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그냥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너 많이 먹어.”“엄마 오늘 이상해.”하늘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다시 고개를 숙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맞은편에 있던 성유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서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아파트 단지에 있어?”그의 첫 마디는 성유리의 행방을 묻는 말이었다.“미안해.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두 번째 말에 바로 반박했다.“그런 말은 박한빈 씨가 약속했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맞지 않나요?”“약속? 난 누구랑 약속한 적 없는데.”“그럼 왜 저한테 전화하세요?”“혹시 기다리고 있을까 봐...”“전 당신을 기다린 적
하늘이의 단호한 대답에 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그럼 우리 이제 집에 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흥분된 목소리는 마치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런데 다음 날, 박한빈이 또 아파트 내에 나타났다.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의 보디가드도 함께였고 그들의 손에는 묵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어제와 달리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옆 단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아이들까지 있었다.박한빈은 찾아오는 아이들이 누구인지도 구분하지 않은 채 아이들이 오기만 하면 모두에게 선물을 나눠줬다.오늘은 그가 직접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됐기에 성유리의 반응을 살필 시간도 있었다.그러나 선물을 나눠주던 박한빈은 금세 깨달았다. 성유리와 하늘이는 이미 떠나버렸단 사실을.‘언제 떠난 거지?’그로부터 셋째 날, 넷째 날이 지나갔고 다섯째 날이 될 무렵 박한빈은 더 이상 아파트에 나타나지 않았다.하지만 며칠간의 무료 선물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충분히 인상적이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단지 아래에 모여 있었다.아이들은 기대에 들떠 있었고 부모들은 아이들만큼이나 박한빈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하늘이를 데리고 단지 아래가 아닌 근처 어린이 공원으로 나가곤 했다.그날도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그런데 단지 사람들 중 일부가 그녀와 박한빈의 관계를 알아냈는지 성유리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오늘 박 대표님은 언제 오세요?”성유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도 몰라요.”“아니, 어떻게 몰라요? 남편 일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저희는 이미 이혼했잖아요.”그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참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두 분은 전혀 이혼한 사람들 같지 않은데? 박 대표님 같은 좋은 사람을 왜 용서하지 않는 거예요?”“맞아요! 박 대표님 같은 분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