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잘못했기에 할 말이 없어진 하윤은 얼른 목소리를 줄이며 작게 중얼거렸다.“그거야 더 리얼하게 연기하려고 그랬죠.”하지만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턱을 움켜 잡았다.“리얼? 어떻게 리얼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디 말해 봐. 얼마나 리얼하게 하려고 했는지?”하윤의 얼굴은 도준의 손에 잡혀 잔뜩 일그러졌다. 그 때문에 목소리마저 어눌하게 들렸다.“제가 어떻게 감히 뭘 했겠어요? 제 몸과 마음은 모두 도준 씨 건데. 저 그럴 배짱없어요.”눈을 깜빡이며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겨우 손의 힘을 풀었다.“그럴 배짱이 없다고? 아닌 것 같은데?”하윤은 기회를 틈 타 도준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그럴 리가요. 공태준이 기사를 불러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오르려고 한 거예요. 안 그랬다면 거절했을 거라고요.”도준은 콧방귀를 뀌었다.“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도준이 아까보다는 많이 누그러든 태도를 보이자 하윤은 애써 자기 얼굴을 도준의 손아귀에서 빼냈다.“제가 도준 씨한테 어떻게 거짓말하겠어요? 잊었어요? 우리 같은 편이잖아요.”하지만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도준이 아니었다.“난 또 자기가 친구를 더 신경 쓸 줄 알았지.”또 약점이 잡히자 하윤은 도준에게 더 바싹 가까이 갔다.“도준 씨는 제 남편인데, 신경 써도 남편부터 써야죠.”하윤은 어두운 차 안에서 도준을 빤히 쳐다봤다.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아마 꼬리까지 흔들어 댔을 거다.도준은 손을 들어 하윤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다음에 또 이랬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절대 안 그래요.”도준이 화 나면 복수도 하지 못하게 할까 봐, 하윤은 애써 아부를 떨어댔다.심지어 손을 뻗어 도준의 어깨까지 두드리기 시작했다.“저한테 화내느라 힘들었죠? 제가 두드려 줄게요. 저 힘 장난 아니에요.”하윤의 행동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자기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며 힘이 있기는.”콧방귀를 뀌며 도준의 말에 반박하려던 찰나, 도준의 옷주머니에
늦은 밤.권하윤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때마침 욕실에서 나온 도준은 마침 저를 이불로 돌돌 감은 채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하윤을 보더니 재밌는 듯 피식 웃었다.“뭐 하는 거야?”그제야 멈춘 하윤은 침대에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이예요.”오늘은 공은채가 자리에 있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싸우는 척 연기할 수 있었다.‘그럼 앞으로는?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하지?’근심 가득한 말에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쪽에서 다 알아서 할 건데, 걱정할 거 뭐 있어?”“그쪽?”하윤은 턱을 괸 채 고개를 살짝 꺾으며 도준을 바라봤다.“무슨 뜻이에요?”도준은 얼른 침대에 걸터 앉았다.“그쪽에서 우리 사이 갈라놓으려 할 테니 우리는 그냥 잘 협조해 주면 그만이야.”‘그건 그렇네.’하윤은 빙글 돌아 침대에 벌러덩 눕더니 도준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것도 다 알다니. 대단하네요.”“내가 또 어쨌다고 이래?”도준은 하윤을 자기 팔 사이에 가두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에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쭉 내밀며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마침 공은채의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공은채가 준 마음을 그냥 저렇게 나몰라라 해서야 되겠어요?”도준은 피식 웃었다.“기어코 가져오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가져왔더니 또 삐져? 혹시 심심해?”“그건 목걸이가 새것도 아닌 것 같아 그랬죠. 만약 목걸이에 얽힌 사연이 있거나 사랑의 증표라도 되면, 그걸 버리라고 한 제가 죄인이 되잖아요.”도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손등으로 하윤의 얼굴을 톡톡 쳤다.“총명하네. 새 목걸이가 아닌 것도 알아차리고.”이런 걸 알아 맞혔다고 해서 하윤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더 맞혀볼까요? 이거 도준 씨가 줬던 걸 공은채가 다시 돌려준 거죠?”도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위에 흩어진 하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는 약간 불쌍하기까지 했다.하지만 그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못 들었나?’못 들었다 해도 하윤은 한 번 더 물어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만약 도준이 공은채에게 아무 마음도 남아있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여전히 마음이 남아 있는 데다 진명주의 심장이 두 사람을 연결해준다면, 앞으로 도준이 저를 미워할 게 뻔했으니까.생각할수록 마음이 답답했고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때, 머리가 가벼워지더니 신선한 공기가 이불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갑갑해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자는 줄 알았는데.”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도준이 코웃음을 쳤다.“자기 전에 이야기 듣고 싶었던 거 아니야? 내가 안 하면 또 하루 종일 삐질 거잖아.”도준이 모든 걸 알려주겠다는 듯 말하자 하윤은 얼른 도준의 어깨에 기댔다.“들을 준비됐어요.”불이 꺼져 캄캄한 탓에 도준이 제 머리카락을 느긋하게 문지른다는 것밖에 느껴지지 않았다.“이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지?”하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특수 제작된 목걸이야. 안에 심장 세포가 들어 있거든.”“혹시 공은채의 원래 심장에 들어 있던 세포예요?”“응.”도준의 대답에 하윤은 소름이 돋았다. 이 목걸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은채가 어떤 마음으로 이 목걸이를 도준에게 전해 줬을지가 더 신경 쓰였다.그런 상황에서 이런 선물을 준다면 그게 누구든 거절할 수 없었을 거다.하윤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다시 입을 열었다.“아, 참 지극정성이네요.”“원하는 게 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도준의 가벼운 대답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손톱으로 잡아 뜯었다.“공태준이 전에 줬던 USB에서 두 사람 참 화목해 보였었는데.”도준이 문에 기대 피아노 연주를 하는 공은채를 지켜보던 장면이 특히 눈에 선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아직도 그것 때문에 질투하는 거야?”“아니거든요.”입을 삐죽거리며 말
다음날.새벽까지 도준에게 시달려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잔 하윤은 눈앞에 있는 도준을 보고 약 2초간 멍 때렸다.항상 빨리 깨어나 제가 눈을 뜰 때면 진작 사라지고 없을 사람이 옆에 있으니 놀랄만 했다.‘매일 오늘 같았으면.’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하윤은 도준의 머리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하지만 도준의 이마에 닿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손을 덥석 잡더니 스르르 눈을 떴다.곧이어 눈꺼풀에 가려졌던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고 갓 깨어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하고도 모자라? 아침부터 왜 또 건드려?”하윤은 깜짝 놀라 투덜거렸다.“깨었으면서 왜 자는 척해요? 놀랐잖아요.”도준은 꽉 잡고 있던 하윤의 손을 들어 올렸다.“내 잠을 방해했으면서 나를 탓하는 거야?”“채 닿지도 않았는데 뭘 방해했다는 거예요?”하윤의 볼멘 소리에 도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손이 닿아야 정신을 차린다면 진작 죽었을 거야.”하긴, 도준이 이만한 경계심도 없었다면 아마 권력 다툼 때문에 수백번도 죽었을 거다.그걸 인지하는 순간 눈 앞의 도준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럼 앞으로 제대로 자요. 제가 망 봐 줄게요.”도준이 피식 웃었다.“말은 참 예쁘게 해.”이윽고 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그런데 자기가 깨어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야 발견할 걸 보니…….”길게 늘어뜨린 도준의 말꼬리에 하윤은 왠지 기대감이 샘솟았다. ‘발견한 걸 보니 뭐? 이제는 나랑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고?’“어제 나 제대로 쥐어 짰나 보네.”“뭐라고요?”괜히 기대했다는 생각에 하윤은 얼른 달려들어 도준을 꼬집었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준비를 하고 문을 나섰다.……아침 식사를 하며 하윤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끝내 낮은 소리로 물었다.“왜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요?”도준은 하윤의 말에 피식 웃었다.“아침 식사하는데 방해할 게 뭐 있어? 얼른 먹어. 식은 거 먹으면 배 아플라.”“네.”하지
권하윤은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민도준을 힐끔거리다가 옆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공태준을 보고는 말없이 머핀을 내려 놓았다. 심지어 도준의 압박 때문에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태준에게 미안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분명 연기인 줄 알면서도 태준과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하윤의 모습을 본 순간, 도준은 말 못할 짜증이 밀려왔다.하지만 뭐라 말하려는 찰나, 하윤이 제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눈을 들어 보니 하윤이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먹는 와중에 저한테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이거 다 연기예요. 진짜는 도준 씨뿐이에요.’도준은 혀로 제 볼을 꾹 밀며 애써 화를 삭였지만 결국은 하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다 먹었어?”“네.”하윤은 숟가락을 내리며 입을 닦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도 다 먹었다는 듯 수저를 내려 놓았다.“오후에 피아노 경매가 있는데 이 교수님이 즐겨 사용하던 스타인웨이D274도 있어요. 관심 있으면 같이 보러 가요.”그 말에 하윤은 곧바로 집중력을 빼앗겼다.‘아빠가 사용하던 피아노라고?’집이 망하면서 집에 있던 모든 물건도 경매로 팔렸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피아노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쥬얼리와는 달리 같은 모델의 피아노는 하나뿐이 아니다. 때문에 아버지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찾는 건 더 어려웠다.그런데 그 피아노에 관한 소식을 듣자 하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더해졌다.“우리 아빠 피아노가 확실해?”태준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이 교수가 사용하던 피아노 뚜껑에 긁힌 자국이 있죠?”“맞아.”그건 하윤과 승우가 동생을 데리고 놀 때, 동생이 실수로 긁은 흔적이다. 그때 이성호는 무척 마음 아파하며 복구 작업을 맡겼지만 그 흔적이 완벽하게 가려지지는 않았다.그런데 태준이 그 흔적의 위치까지 정확히 말하자 하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경매는 어제 어디서 해?”“그건…….”태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도준이 벌떡
하윤은 눈빛이 흔들려 차마 도준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그거야 공태준이 저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겠죠.”“알면서 따라가려교?”하윤은 이내 고래를 푹 떨구었다. 하윤도 그게 공태준이 내건 미끼라는 걸 안다. 하지만 알면서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이제야 연기한다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게 실감이 들었다.연기는 연기일 뿐 감정까지 흔들릴 것 없다고 자신했건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공태준이든 공은채든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고작 아침식사 하는 그 잠깐 사이에도 이렇게 되었는데 태준을 따라가면 어떤 일이 기다릴지 아무도 몰랐다.한참 생각하던 하윤은 그제야 타협했다.“그럼 안 갈게요.”이윽고 고개를 쳐들고 도준을 바라봤다.“그 피아노 꼭 사와야 해요?”“알았어, 착하네.”도준은 그제야 만족한 듯 대답했다.물론 도준의 확답을 받아냈지만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하윤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심지어 방에 돌아온 뒤, 어디 가겠냐고 묻는 도준의 물음에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다 돼요. 도준 씨가 정해요.”잔뜩 풀이 죽어 소파에 앉아 있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이내 손을 뻗어 하윤의 고개를 쳐들었다.“왜? 아직도 삐졌어?”“아니요.”하윤은 도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제 얼굴을 도준의 몸에 비볐다.“저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요. 제가 쉽게 휘둘리는 것도 모자라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 하니까. 제가 더 성숙했다면 보냈을 수도 있겠죠.”제 자리에 우뚝 선채 저한테 기댄 하윤을 보고 있던 도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왜 갑자기 이해심이 깊어졌지?”하윤은 고개를 들어 도준의 몸에 제 턱을 얹은 채 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사랑하니까요. 도준 씨가 기분 나쁜 건 원치 않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솔직히 하윤이 아무리 애교 부리고 제 비위를 맞추려 애써도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하지만 하윤의 이런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차 안이라 그런지 하윤은 잠을 설쳤다.게다가 아버지의 피아노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에 자꾸만 가족과 있었던 일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의자에 앉아 피아노 연주 숙제를 검사 받던 모습, 오빠가 곁에서 박자를 세어주던 모습, 심지어 오빠와 함께 어머니한테 사랑 노래를 연주하는 아버지를 훔쳐보던 모습도 보였다.기억속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 피아노를 찾으면 하윤뿐만 아니라 엄마와 오빠도 기뻐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차가 흔들려 눈을 떠보니 어느새 경매장에 도착했다.이번 경매에 나오는 피아노는 이성호가 사용하던 피아노 외에도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던 피아노도 있다.예전이라면 이성호의 추문 때문에 피아노는 당연히 이성호의 이름으로 소개되지 않을 거다. 심지어 누구의 피아노도 아닌 그저 평범한 피아노로 소개될 가능성이 다분했다.하지만 하윤이 우여곡절 끝에 이성호의 누명을 벗겨 준 데다, 뉴스의 파급력 때문에 이성호의 억울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뜩이나 유명한 음악가인 데다, 억울함을 쓴 서사까지 붙었으니 업계 사람만 알던 이성호의 이름은 단숨에 널리 알려졌다. 이성호에 관한 뉴스를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큼. 그 때문인지 이성호가 사용하던 피아노는 포스터 맨 중앙에 있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포스터를 본 하윤은 잔뜩 흥분한 채 도준의 손을 잡아 끌었다.“이거예요. 우리 아빠가 사용하던 피아노!”하지만 이내 걱정이 앞섰다.“포스터 맨 중앙에 소개했으면 가격은 당연히 엄청나겠죠?”도준은 하윤의 등을 밀며 농담조로 말했다.“자기가 돈 흥청망청 쓴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왜 갑자기 돈 걱정하고 그래?”“제가 언제 돈을 흥청망청 썼다고 그래요? 저 엄청 절약했거든요!”초대장에 적힌 대로 자리를 찾다 보니 일찌감치 저를 기다리고 있던 태준이 눈에 들어왔다.하윤은 잠깐 멈칫했지만 도준의 팔짱을 풀지는 않았다.당황한 듯 반응하면 오히려 의심만 살 뿐이니까.아니나 다를까 도준을 보고도 태준은 예상했다는 듯
하나 또 하나의 경매가 끝나고 아버지의 피아노가 무대 위에 올라온 순간, 권하윤은 민도준의 손을 꽉 잡았다.“아빠 피아노예요.”그와 동시에 경매사의 소개도 시작되었다.“이 피아노는 이성호 교수님이 사용하던 피아노입니다. 아마 다들 이성호 교수님에 대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유명한 음악가로 잘 알려졌죠? 친구의 질투 때문에 오명을 쓰고 세상을 떠나 더 안타까운 분이기도 합니다.”이성호의 가슴 아픈 서사를 소개하던 경매사는 이내 말머리를 돌리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그런데 이성호 교수님이 세상에 없다 해도 그분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분이 사용하던 피아노도 여전히 남아 있고요. 오늘 저희가 경매할 물건이 바로 이성호 교수가 사용하던 피아노입니다. 4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이 피아노는 원체 고가 브랜드인 데다 소장 가치까지 더해져 곧바로 6억까지 가격이 올라갔다.그걸 지켜보던 하윤도 번호표를 들고 호가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공태준이 먼저 끼어들었다.“10억!”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도준은 고개를 돌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두 쌍의 눈이 서로 마주하는 순간,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친구로서 선물하려는 것뿐인데, 설마 신경 쓰이는 건 아니죠?”“그럴 리가요.”그때 무대 위에서 경매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세 번 호가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10억, 10억…….”경매사가 세 번째로 호가하며 망치를 내려 치려고 할 때, 도준이 번호표를 꽉 쥐고 있던 하윤의 손을 들어 올렸다.이윽고 태준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런데 영 마음에 안 드네요.”“20억!”도준의 목소리에 경매사마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게, 피아노는 어디까지나 수공예품에 지나지 않다. 물론 그 가격이 브랜드가치와 유명인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고는 하나 10억에 10억을 더 얹어 부르는 건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더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태준이 이내 번호표를 들어 올리며 호가했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