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그건 바로 박씨 집안에서 정일용에게 1000만원을 주는 대가로 다정을 박씨 집안에 넘긴다는 거였다.위에 있는 사인과 지장을 보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민혁더러 1000만 원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결국 돈과 사람을 바꾸는 것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하윤이 다정을 데려 가려는 찰나, 박희숙은 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잠깐!”박희숙이 또 자기를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에 다정은 겁을 먹고 하윤의 손을 꽉 잡았다.그 모습을 본 하윤은 오히려 다정의 손을 꼭 잡으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는 몸을 돌렸다.“돈도 받았으면서 설마 말 바꾸려는 겁니까?”“쟤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한 값도 치러야지.”박희숙이 다정을 가리키며 대답했다.민혁은 낯 두꺼운 박희숙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쳤다.“이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럽니까? 당신 집에서 소처럼 일한 것만으로도 먹은 밥 값 지불하고도 남겠구만!”“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돈 안 주면 그 계집애 끌고 당장 정일용 찾아가 정일용한테 애를 넘길 테니 그렇게 아셔.”“이봐요…….”“민혁 씨, 돈 줘요.”민혁이 버럭 화를 내려던 순간, 하윤이 민혁의 말을 잘랐다.하지만 하윤의 동의가 떨어지자 여자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왔다.“500!”“그래요.”하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희숙에게 돈을 이체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에서 돈을 뜯긴 아까움 보다는 다정을 이 지옥에서 빼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잘 보였다.하지만 민혁은 여전히 억울했는지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저 여자 좋은 일만 해 줬네.”이윽고 고개를 돌려 하윤을 보더니 이제 가도 되는지 질문했다.그 말에 하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경찰서로 가요.”“오케이…… 네?”……경찰서를 가는 길에 하윤은 도준의 전화를 받았다.“대체 뭐 하느라 아직도 출발 안 했어?”못 말린다는 듯 묻는 도준의 말에 하윤은 잔뜩 화가 난 말투로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저
조관성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민 사모님더러 조사에 협조하라고 하기만 하면 큰 책임도 안 물을 건데, 다른 곳으로 보내는 바람에 일이 꼬였잖습니까.”걱정 가득한 조관성과 달리 민도준은 여유로운 태도로 다리를 꼬았다.“걱정할 거 없어요. 제가 이미 믿을만한 사람한테 불법 증거 채택에 관한 처벌의 문제점을 알아보라고 일러 웠으니까.”“그 사람이 누군데요?”“적합한 사람이요.”도준의 이런 광기 어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간 떨려 항상 불안하지만, 조관성은 도준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도준은 무슨 일을 하든 실수하는 법이 없으니까. 이건 조관성이 문제투성이인 도준에게서 어렵사리 발견한 장점이다.때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상으로 절대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건 알죠?”도준의 실력을 인정하며 화를 가라앉히기도 잠시, 말을 한지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확인해 봤더니 도준은 또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조관성의 미간에는 또 주름이 생겼다.하지만 도준은 문자를 보낸 뒤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죄송합니다, 조 국장님. 우리 집사람이 제 껌딱지라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해서요.”“…….”‘자랑하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조관성은 화를 눌러 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한편, 경찰서.하윤이 손에 넣은 증거가 너무 명확해 정일용의 죄는 곧바로 확정되었다. 심지어 우원준의 도움 덕에 효율 또한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얼마나 빨랐는지 하윤이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희숙과 정일용이 붙잡혀 왔다.하지만 법에 대해 일자무식인 박희숙은 계속 소리치며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난 돈을 지불했는데 왜 날 잡아들여?”너무 무식한 박희숙의 말에 민혁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따지면 먹은 음식은 나중에 다 나갈 텐데 음식값은 왜 계산한데요?”“…….”맨 처음에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협조하지 않던 박희숙은 자기와 정
경성.해원과 경성의 온도 차 때문에 권하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히 로건이 곧바로 차를 몰고 데리러 온 덕에 추위 속에서 오랫동안 떨 필요는 없었지만.그런데…….커다란 양복 차림에 흰 장갑까지 끼고 나타난 로건을 보는 순간 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로건은 그런 하윤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폴터 인사를 해댔다.“사모님, 어서 오십시오!”“…….”한민혁은 차에 오르자마자 로건과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나와 도준 형이 해원에 있어서 살맛 났겠네.”로건은 행복한 얼굴을 한 채 헤실 웃었다.“어? 제가 이제 곧 아빠가 된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괜찮은데 희연 씨가 음식을 먹지 못해서 걱정이에요…….”말문이 터졌는지 로건은 묻지도 않은 자기 근황까지 줄줄이 읊었다.그걸 듣는 동안 민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언제 그런 것까지 물어봤어?’‘어딜 가나 커플 지옥이구나!’……저녁.하윤은 다정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하윤은 집안에 들어서면서 직접 방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웬걸? 유씨 아주머니가 이미 집안 청소를 하고 음식까지 한 상 가득 준비해 놓았다.게다가 하윤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 돌아오셨네요.”하윤도 유씨 아주머니가 반가워 얼른 인사했다.“아주머니, 설마 그동안 계속 여기 있었어요?”“그럴 리가요. 사장님께서 오늘 사모님이 돌아오니 방 청소도 하고 음식 차려 주라고 해서 온 거예요.”유씨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도준은 항상 자기를 생각한다는 걸 알아차리자 하윤은 마음이 따뜻해 났다. 이윽고 함께 식사하자고 유씨 아주머니를 향해 손짓했다.“아유, 아닙니다. 야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들 데리러 가야 하거든요. 그럼 천천히 드세요. 내일 다시 와서 아침 준비해 드릴게요.”“네, 수고했어요.”유씨 아주머니는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홱 돌렸
민도준이 전화를 끊겠다고 하자 권하윤은 곧바로 불만을 내비쳤다.“이제 고작 몇 마디 말했는데 전화를 끊으려고요? 어쩜 저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아요?”발끈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급할 거 뭐 있어? 전화 끊고 영상 통화로 얼굴 보자는 뜻이었는데.”도준의 말에 소리를 지르며 화 내던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방긋 웃었다.“그래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전화를 끊은 하윤은 얼른 코랄벨벳 가운을 벗어 던지고 끈 나시 슬립 원피스로 갈아 입은 뒤 립스틱까지 발랐다.하지만 그렇게 한참 동안 준비를 마친 뒤에야 어떤 플랫폼으로 영상 통화를 할 건지 의문이 들었다.도준은 지금껏 채팅 어플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걸 문자로 보내기 때문이다.하지만 하윤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카톡 어플에서 알람 소리가 들렸다.친구 추가 요청이었는데 요청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준이었다.맴 처음에는 도준이 자기 때문에 일부러 계정까지 만든 줄 알고 기뻐하던 하윤은 도준의 계정을 살피던 중 오래 전 만들어진 계정이라는 걸 발견하고 이내 풀이 죽었다.‘하! 오래 저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거야?’하윤은 투덜거리며 도준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하지만 뭐 볼 게 있나 확인해 보려 했지만 아무 내용도 없었다.‘응? 설마 나만 차단해서 올린 건 아니겠지?’하윤이 한창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하윤은 화가 났지만 도준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신 버튼을 힘주어 내리쳤다.예쁘게 단장한 하윤을 본 순간,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뭐야? 혼자 집에서 뭐 한 거야?”하윤은 방금 도준과 영상 통화를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단장하던 자기의 모습이 떠올라 콧방귀를 뀌더니 벨벳 가운을 낚아 채 자기를 꽁꽁 싸맸다.“안 보여줄 거예요.”도준은 핸드폰을 낮은 곳에 놓고 눈을 내리 깐 채 화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시선이 하윤의 목덜미에 닿은 순간,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보기만 하고 닿을 수 없자, 오히려 더 탐스러워 보였다.도
“착하네.”민도준의 칭찬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낀 권하윤은 더 많은 칭찬을 받으려면 도준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그 시각, 수줍어하면서도 애써 협조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의 목울대는 또 한 번 꿀렁거렸다.“예쁘네.”하윤은 도준이 초록색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초록색 슬립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레이스로 되어 있는 허리 부분은 너무 노출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오히려 보일 듯 말 듯하여 사람의 마음을 더 간지럽혔다.그때, 하윤은 칭찬을 들어 날아갈 듯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예쁘면 뭐 해요. 도준 씨가 카톡도 추가하지 않는데.”“아직도 이 생각 하는 거야?”여전히 꼬투리를 잡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말했잖아. 몇 년 동안 안 써서 그런 거라고. 자기가 발정 나지만 않았어도 다시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거짓말. 카톡처럼 편리한 걸 그동안 안 썼다는 게 말이 돼요? 그리고 모멘트에 대체 뭐가 있길래 저를 못 보게 했어요?”하윤은 여전히 믿지 않는 듯 따져 물었다. 끈질긴 하윤의 태도에 도준은 화가 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카톡은 심심할 때 잡담 나누는 거잖아. 그런 걸 내가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하윤은 일순 멍해졌다.하긴, 그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그런 피 바람 속에서 살아가기 바빴겠는데, 한가하게 다른 사람과 잡담을 나눴을 리 없다.모멘트는 더더욱 그러하다. 공유할 순간이 없었고 공유할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그 생각에 토라져 있던 하윤은 이내 마음을 풀었다. 오히려 같잖은 일로 꼬투리 잡아 도준의 아픈 마음을 더 찌른 자기가 원망스러워 바로 사과했다.“미안해요.”도준의 시선은 땅으로 꺼질 것처럼 푹 숙인 하윤의 고개에서 점점 아래로 흘러내렸다.“이런 시덥잖은 사과는 너무 성의 없잖아.”잘못을 저지른 하윤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성의 있는 건데요?”
야생미 넘치는 민도준의 모습은 위험하고도 섹시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어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봤다.화면 맞은편에 있던 도준은 하윤의 몽환적인 표정을 보고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착하지, 숨소리 좀 들려줘.”하윤은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 “안 돼요, 다정이 아직 거실에 있어요.”“우리 집은 방음이 잘 돼서 괜찮아, 말 들어.”결국 도준의 재촉에 못 이겨 이불을 머리위로 뒤집어썼다.화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호흡이 서로 뒤엉키며 안개가 되어 휴대폰을 감싸며 피어올랐다.마침 이불 속에 있던 하윤이 숨막혀 죽을 것 같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노크 소리는 아주 작아 마치 뼈마디로 문짝을 문지르는 것 같았다.“언니, 자요?”하윤이 이불을 들추려 하자 수화기에서 남자의 경고가 들려왔다.“가지 마.”“다…… 끝난 거 아니에요?”하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한 번 보고 올게요, 금방이면 돼요.”말을 마친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머리에 있는 가운을 가지고 땅에 발을 붙였다.하지만 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는 어느새 멈췄다.다정이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더니 그녀는 여전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에 놀란 하윤이 얼른 물었다.“다정아, 무슨 일이야?”다정은 서글프게 울며 말했다“미안해요 언니, 일부러 잠자는 거 방해하려던 거 아니에요, 엄마가 꿈에 나왔는데, 꿈에서 돌아가셨어요……, 언니 우리 엄마가, 엄마가…….”다정의 모습에서 하윤은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간 뒤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렸던 자기 모습이 보였다.꿈에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흩어져 아무리 붙여보려고 해도 붙일 수 없었다.다정의 모습이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하윤은 이내 쪼그려 앉아 다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너의 엄마는 지금 건강해, 내가 곧 엄마한테 데려다 줄게, 알겠지?”다정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언니.”“괜찮아, 가자.
방금 전 그릇 하나를 깨 버린 정다정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부엌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권하윤이 얼른 다가가 걱정된 투로 물었다.“왜 그래? 혹시 다쳤어?”다정은 너무 놀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하윤이 허리를 굽혀 깨진 그릇 조각을 줍자 그제야 허둥지둥 치우며 끊임없이 사과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손을 부들부들 떠는 다정의 모습에 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불안해 보이는 다정이 손이라도 베일까 봐 얼른 일으켜 세웠다.“무서워할 거 없어. 그릇 하나 깬 건데 뭐. 괜찮아.”하지만 어렵사리 다정을 부엌에서 데리고 나간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아침상이 눈에 들어와 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네가 한 거야?”“죄송해요. 언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했어요. 바로 버릴게요.”다정이 또다시 사과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하윤은 준비한 음식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며 애써 다정을 달랬다.그때 마침 돌아온 유정인도 풍부한 아침상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다정이가 이 아줌마 직장까지 빼앗으려 하는 거 아니야?”기특해서 던진 농담일 뿐이었는데, 다정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질리더니 방으로 달려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그 모습에 유인정은 어리둥절했다.“다정이 왜 저래요?”하윤은 꼭 걸어 잠근 방문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낯설어 그러는 것이니 우리끼리 먹어요.”식사가 끝나고, 유정인도 퇴근한 뒤에도 다정은 여전히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심각한 상황에 하윤이 다정을 달래 보려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민도준의 전화가 걸려왔다.그 순간, 하윤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얼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도준 씨, 다정이가…….”“이모님한테서 들었어. 내가 민혁을 보냈으니 다정이 데리고 심리의사 한번 찾아가.”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 스트레스를 받은 게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인
집에 도착한 권하윤이 전자 오르간 포장지를 뜯는 순간, 정다정의 눈이 반짝 빛났다.그 모습에서 다정이 얼마나 전자 오르간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저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손도 대지 않았다.그때 하윤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다정아, 와서 쳐봐.”다정이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대지 못하자 하윤이 농담조로 말했다.“이거 너 주려고 산 건데, 네가 치지 않으면 옷 거치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어.”자기를 주려고 샀다는 말에 다정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 틈에 하윤은 얼른 다정의 손을 끌어당겨 전자 오르간 위에 올려 놓았다.“자, 얼른 쳐 봐.”그제야 다정은 조심스럽게 건반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건반을 누르지는 않고 그 위만 맴돌았다.다정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윤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이제 막 자리를 비켜주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리자 하윤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도준 씨.”“뭐 잘못한 거 있어? 왜 그렇게 말해?”방문을 닫고 나서야 하윤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다정이 밖에 있거든요. 혼자만의 공간을 주려고요. 있잖아요. 의사 선생님이…….”하윤은 오늘 있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준에게 말했다.도준이 당연히 이른 작은 일은 신경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한 거지만, 하윤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따가 내가 사람 보내서 다정이 데려 갈게. 다른 사람이 돌봐 주는 게 좋겠어.”“안 돼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애를 억지로 데려갔다가 악화라고 되면 어떡해요?”곧바로 거절하는 하윤의 말에 도준이 인내심을 잃었다.“악화되면 그것도 본인 팔자야. 지금 자기한테 너무 의존한다며? 그 상황에 만약 자기가 실수로 자극이라도 주면 애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겠어.”오늘 정신과 의사도 똑 같은 말을 한 적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잘못하면 미친 짓까지 벌일 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