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밖으로 나가려는 권하윤을 덥석 잡아 다시 안으로 끌어 들였다.“홀딱 젖은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또 챙겨야 하잖아. 여기 있어. 나 혼자서 갔다 올 테니까.”“어떻게 그래요? 옷 갈아 입고 같이 갈 테니 기다려요.”하윤은 도준이 걱정되어 혼자 보낼 수 없었다.하지만 완강하게 나오는 하윤의 태도에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말 안 들을래?”도준의 모습에 하윤은 끝질기게 발꿈치를 들어 도준의 목을 끌어안았다.“저 환자 가족이에요. 어떻게 환자 혼자 보낼 수 있어요?”슬립 치마의 어깨 끈 한쪽이 끊어져 비뚤어진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하윤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야릇했다.하지만 하윤이 도준을 설득하려고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을 때, 도준이 갑자기 하윤의 목덜미를 받친 채 억지로 고개를 젖히게 하고는 벌이라도 내리는 듯 입을 맞췄다.“발정 났어? 아무 데도 갈 생각 하지 마.”“흥. 값도 치렀는데 저 두고 갈 건 아니죠?”도준은 자꾸만 자기 팔에 엉겨 붙는 하윤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자꾸 들러붙는 게 안 좋을 때도 있네.’결국 하윤은 도준과 함께 붕대를 갈러 의사를 찾아갔다.솔직히 도준의 상태가 심각한지 확인하고 싶은 마임이 컸다. 도준이 자꾸만 숨기니 더 걱정되기도 했고.껌딱지처럼 꼭 붙어 진료실에 도착한 하윤은 도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다급히 물었다.“의사 선생님, 우리 도준 씨 상처가 어떤가요? 혹시 뼈를 다치지는 않았나요?”“음…….”의사는 안경을 올리 밀면서 도준을 슬쩍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했다.“인체에는 도합 206개의 뼈가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골격을 형성합니다. 부위로 나눈다면 척추와 사지로 나눌 수 있고 형태로는 긴 뼈, 짧은 뼈…….”하윤은 의사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얼떨떨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의사의 말을 잘랐다.“저기, 그게 아니라 도준 씨 팔에 난 상처가 뼈에 손상을 주지는 않았는지
늦은 밤, 하윤은 도준의 품에 파고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안도감에 잠이 솔솔 몰 려 오려던 찰나,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도준에게 물었다.“참, 그동안 주림 선배와 선배의 할아버지는 잘 지냈어요?”도준은 어둠 속에서 자기 가슴 위에 엎드린 여자의 등을 토닥였다.“응, 잘 있어.”솔직히 하윤은 두 사람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퇴원하지도 않은 도준의 곁을 떠나기 싫어 물으려던 물음을 다시 삼켰다.하지만 의외로 도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두 사람 지금 경성에 있어. 내일 비행기 준비해 줄 테니까 한번 가 봐. 나는 해원에서 일 다 처리하면 찾아 갈게.”도준은 어안이 벙벙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저 혼자 경성으로 돌아가라고요? 싫어요. 안 갈래요. 도준 씨 곁에서 돌봐 줄 거예요.”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도준은 하윤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본인이 여기 남아 있는 게 내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순간 아까 욕실에서 벌어진 일이 생각 난 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방해만 되는 듯해 보였으니까.하지만 하윤은 망설여졌다.“그래도…….”“말 들어.”도준은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하윤 씨와 소혜가 찾은 그 증거에 문제가 있어 추형탁과 공씨 가문이 재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어. 하윤 씨가 여기 남아 있으면 상대방한테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야. 그러니까 말 들어.”하윤은 입을 뻐끔거리며 반박하려 하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겨우 다시 만난 도준과 또 헤어질 생각을 하니 하윤의 마음은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풀이 죽었다.이에 도준은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왜 그래? 싫어?”“아니요. 그냥…….”하윤도 도준이 작기를 걱정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그래도 헤어지기 싫은 마음은 여전했기에 하윤은 도준의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웅얼거렸다.“도준 씨랑 헤어지기 싫어서요.”“이번이 마지막이야.”등을 토닥이는 도준의 손길이 느껴지자 하윤은 도
민도준은 고개를 돌려 권하윤을 빤히 쳐다봤다.“우리 부처님께서 또 은혜를 베풀기 시작한 거야?”“도준 씨가 몰라서 그렇지 그 언니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매일 남편한테 맞다가 고작 한번 반격했는데 실수로 상대가 죽어 버렸거든요. 게다가 살인도 사형도 무섭지 않다고 하는데 딸이 그 일 때문에 슬퍼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래요.”하윤은 말하면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사실 저는 제 상황이 엄청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구나 다 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감개무량한 듯 한바탕 감회를 늘어 놓은 하윤은 여느 때처럼 자기를 놀려대지 않는 도준을 보자 적응이 안 되는 듯 되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요?”하윤의 말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뭐라고 말해야 해?”“제가 순진하다고, 그 사람들이 나약한 거라고 왜 놀리지 않아요?”“갑자기 하윤 씨 말도 맞는 것 같아서.”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그 모습에 하윤은 아연실색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헐, 이게 무슨 일이래? 설마 머리라도 다쳤나?”“됐어. 그만하고 얼른 자.”그동안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잔 적 없던 하윤은 처음으로 편히 잠들었다.하지만 하윤이 곤히 잠 자는 동안, 남자는 짙은 눈동자로 하윤을 빤히 쳐다봤다.……아침 9시에 눈을 떠보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오히려 아침 밥을 사서 하윤 앞에 대령했다.“이제야 일어나는 거야? 얼른 씻고 아침 먹어.”“왜 깨우지 않았어요? 아침은 제가 사왔어야 했는데.”하윤은 눈을 마구 비비더니 침대 앞에 우뚝 서 있는 도준을 멋쩍게 바라봤다.그런 하윤을 도준은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며 재촉했다.“됐어. 기다리다가 굶어 죽을 일이 있어? 얼른 씻고 밥 먹어.”그렇게 맞이한 아침 식사 시간에 도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의 입에서 경성과 비행기라는 단어를 들은 하윤은 이제 곧 혼자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입맛이 사라졌다.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은 도준은 하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점심
한민혁은 갑자기 쳐들어 갔다가 또 어제와 같은 상황을 보게 될까 봐 동의를 구하고 나서야 안으로 발을 들였다.그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하윤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식사 중이었어요?”분명 인사를 건넨 상대가 권하윤이었지만 민도준이 귀찮은 듯 대답을 가로챘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어…….”민혁은 하윤을 힐끗 바라봤다.그제야 하윤은 자기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예전이었다면 눈치 챈 순간 하윤은 얼른 자리를 피해줬을 거다. 하지만 도준과 한 마음 한 뜻이 된 지금 ‘내가 못 들을 게 뭐 있어?’ 라는 자신감이 들었다.이에 하윤은 도준을 바라봤다.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꾹 누르며 밖으로 내쫓았다.“밖에서 혼자 놀고 있어. 이따가 부를게.”하윤은 도준의 결정이 서운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문을 나선 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설마 도준 씨가 나를 못 믿나?’‘하긴, 내가 그동안 한 거짓말이 얼만데, 못 믿는 것도 당연해.’‘그런데 본인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잃기 전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건’ 사랑에 빠진 남녀가 꼭 알아야 하는 도리인 듯싶다.‘이제는 도준 씨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 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데.’별의별 생각을 하며 우울해하던 하윤은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렸다.‘도준 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나를 위해 뭐든 다 해주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내가 아는 게 많을수록 위험할까 봐 일부러 안 알려줄 수도 있잖아.’스스로 마음을 달랜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래층으로 내려 가 나무 그늘 밑에서 산책했다.오늘 날씨는 무척 화창해 햇빛이 쨍쨍 비쳤다. 이에 하윤은 일부러 나무 그늘만 찾아 다니며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병원 근처에서 호떡을 파는 가게를 발견 하윤은 얼른 호떡 하나를 사 들고 도준과 함께 나누어 먹을 계획을 세웠다.하지만 호
‘알았다고?’‘뭘 알았다는 거지?’권하윤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문에 더 바싹 붙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공아름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병실 밖에 전해졌다.“우리 집안 망가트린 게 공은채 때문이죠? 공은채랑…….”공아름의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하윤과 민혁이 동시에 병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하윤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자 민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미안해요. 너무 긴장해서 문손잡이를 눌러 버렸어요.”갑작스러운 변고에 하려던 말이 끊긴 하윤은 방안에 나타난 하윤을 본 순간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댔다.“뭐야? 감히…….”공아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녀의 갖은 노력에도 꿈쩍하지 않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살을 찡그렸다. 하지만 분명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한 듯한 표정인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손을 내밀었다.“일어나.”몰래 엿듣다가 들켜버린 하윤은 우물쭈물 하며 도준의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곧바로 잘못을 뉘우쳤다.“죄송해요. 일부러 엿들을려고 한 게 아니라 방해할까 봐 그랬어요.”그 시각, 옆에서 혼자 일어선 민혁은 하윤의 말에 엄지를 척 내밀었다.‘역시 대단하다니까. 애인과 연적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다니 참 대단해.’도준은 잔뜩 겁을 먹은 하윤을 흘끗 내려다봤다.“이젠 하다하다 엿듣기까지 해? 문에 끼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그러는 자기는, 다른 여자와 밀회하지 않으면 내가 이러겠냐고!’하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속으로만 투덜댔다.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공아름은 진심이 짓밟히다 못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공씨 가문의 변고 때문에 공아름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는 산발이 된 채 두 사람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아주 좋아.”공아름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더 다가가 자기를 괴롭히듯 두 사람을 눈에 새기더니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하윤을 삳대질했다.“도준 씨가 진짜 너 사랑하는 것 같아? 넌 그냥 이용당하는 것뿐이야! 도준 씨가 사랑하는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하윤은 마음이 무거웠다.솔직히 민도준이 그간 했던 모든 일이 공은채를 너무 사랑해서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공은채와 공태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은 뒤 모든 의심을 던져버렸었다.하지만 눈 앞에 벌어진 상황 때문에 그 두가지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도준과 공은채의 시작이 공은채가 도준 어머니의 신체 기관을 기증 받아서라고 해도 두 사람은 충분히 서로 사랑할 수 있다.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하윤은 가슴이 답답해나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윤의 감정이 점점 북받칠 때, 도준이 그녀의 미간을 꾹 짚었다.“왜 또 혼자서 땅 파?”속내를 들킨 하윤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더 이상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화 나는 걸 어떡해요! 민혁 씨랑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려고 나는 밖으로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아침밥 사러 가는 사이 공아름 씨랑 밀회나 하고. 전 여친도 계속 언급하고! 아주 화 나서 미치겠어요!”“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끊임없이 불만을 얘기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하윤을 자기 품에 꼭 끌어안았다.“난 하윤 씨 하나면 충분해. 다른 사람 생각할 겨를도 없어.”하윤은 콧방귀와 함께 고개를 홱 돌리며 여전히 화가 났다는 걸 강력 어필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턱을 잡아 돌리더니 허리를 숙여 하윤과 닿을 락 말 락 할 거리에서 멈췄다.“그렇게 불안하면 날 뽑아 먹어.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날 거잖아.”“싫거든요.”도준의 노골적인 말에 하윤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투덜거렸지만 태도는 전보다 많이 누그러들었다.그러다 끝내 고개를 들어 도준을 보더니 화가 난 듯 도준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도준 씨가 다른 사람 좋아하면 저는…….”“음? 어떻게 할 건데?”“도준 씨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서 만나주지 않을 거예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세게 휘어 감았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하윤은 낮
한참을 걸어 나왔지만 콩닥거리는 마음이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자기의 머리를 만지는 와중에도 하윤은 민도준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시각, 운전석에 앉은 한민혁은 백미러로 바보처럼 행동하는 하윤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은 미리 약속한 대로 경성에 돌아가기 전 장옥분의 딸을 보러 갔다.흥덕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헬기에서 내려 택시를 잡으러 나섰다.그렇게 차에 오른 뒤, 민혁은 하윤을 바라봤다.“그 아이가 어디 사는지 알아요?”“어…….”하윤은 그제야 장옥분의 집 주소를 모른다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고 말았다. 결국 기사더러 북적거리는 거리에 내려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흥덕 마을에는 주민이 많지 않은 데다 장옥분이 남편을 죽인 사건이 일대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수소문해냈다.장옥분의 딸은 남편의 성을 따라 정씨를 사용했고 가족이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쿵쿵쿵.”“안에 사람 있어요?”하윤이 집 대문을 한참 동안 두드렸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집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떠나려던 그때, 갑자기 문이 안에서 열렸다.“문은 왜 두드리고 난리야?”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위통을 벗고 꼬질꼬질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심지어 문을 여는 순간 술냄새가 진동했다.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자 하윤은 어색하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장옥분의 친구인데요.”“그 재수없는 X 친구라고? 그 X한테 무슨 친구가 있다고!”남자는 졸린 눈을 비비고는 하윤의 깨끗한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위아래로 훑더니 점점 노골적인 시선으로 하윤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하윤은 이내 뒷걸음 쳤다.“혹시 누구시죠?”“시동생인데.”집에 방이 두개 있는 걸 보니 형제가 같이 산 모양이었다.이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질문했다.“저는 옥분 언니 딸을 보러 왔는데, 혹시 다니는 학교를 알 수 있을까요?”장옥분의 딸을 언급하자 남자는 이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이 곳인 것 같아요.”한민혁은 앞에 보이는 3층짜리 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괜찮아 보이는 가정 형편에 하윤은 남자의 말이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봐 집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사람은 민혁이었다.그리고 그 소리에 나와 문을 연 사람이 바로 장옥분의 딸 정다정이었다.여자애는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반쯤만 내놓고 물었다.“누구세여? 누구 찾아요?”……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정원에 걸려 있는 침대 시트와 채 씻다 만 채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정원에 아무도 없는 걸 봐서는 이 모든 걸 다정이 혼자 했다는 뜻이다.하윤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다정이 민혁을 무서워한다는 걸 눈치 챈 하윤은 민혁을 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다정을 향해 싱긋 웃었다.“다정아, 난 엄마 친구야.”엄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다정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비쩍 말라 볼살도 없는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 묻어 나더니 끝내 눈물을 흘렸다.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정을 보자 하윤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무서워할 거 없어. 언니는 네 엄마랑 아주 친한 친구거든. 엄마가 너 보살펴 달라고 해서 온 거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언니한테 말할 수 있어?”다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불안한 듯 꼭 붙이고 선 다리 하며, 계속 마주 비벼대는 손을 보면 다정이 얼마나 겁 많은 아이인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하윤이 뭘 좀 알아내기도 전에 집 주인이 돌아왔고 하윤을 보자마자 싸늘한 눈초리를 날렸다.“당신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여자와 함께 들어온 남자애는 심지어 하윤에게 돌멩이를 뿌리며 욕설까지 퍼부었다.“꺼져! 엄마가 꺼지라잖아! 꺼져!”한 번에 하윤을 맞히지 못하자 남자애는 또 돌멩이를 주어 들었다. 하지만 막 하윤에게 던지려 할 때, 민혁이 나타나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어린 놈이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가지고!”남자애는 아픈 듯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아우성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