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에 잇자국이 가득 남은 채로 권하윤은 소파에 앉아 안정감을 되찾으려 애썼다. ‘내가 공태준을 미워하는 게 맞나?’ 사람의 마음은 가장 변덕스럽다. 하윤이 태준을 원수로 여길 때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꿍꿍이가 있고 속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본인이 떠날 때 보내줬다는 말을 듣자 그날 강물에 휩쓸릴 때 자기를 꼭 잡고 놓지 않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잡아요.’ ‘절대 손 놓으면 안 돼요.’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하윤은 무릎을 껴안고 몸을 음치린 채 고개를 팔 안에 파묻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자기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왜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규칙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지. 마치 지금처럼. 하윤은 태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미워해야 할지, 아니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때 마침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놀란 듯 고개를 든 하윤은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키 차이 때문에 남자의 그림자는 하윤을 모두 뒤덮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하윤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언, 언제 왔어요?” 도준은 빙그레 웃었다. “한참 됐어.” ‘넋이 나간 채 들어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던 누구보다는 더 일찍 들어왔지.’ 도준은 하윤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밥 먹었어?”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야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하윤은 확실히 밥을 먹은 게 맞긴 하지만 태준과 함께 먹었으니까. 도준은 하윤에게 깊게 생각할 기회도 주지 않고 또 질문을 던졌다. “뭐 먹었어?” 그는 하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돌돌 말았다. “맛있었어?” 하윤은 긴장한 듯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도준의 손을 바라봤다. 이 순간 도준이 쥐고 있는 게 자기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숨줄이라는 착각마저 들어 저도 몰래 침을 꼴깍 삼켰다
권하윤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민도준은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 “아직 변명은 생각하지 못했나 봐? 내가 도와줄까?” 하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이에 도준은 화가 나다 못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음 순간 도준은 하윤의 목을 꽉 움켜쥔 채로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분명 2할 정도의 힘만 사용했지만 하윤은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아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그때 도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매 순간 하윤 씨를 어떻게 달래줄지 고민하고 있는데 하윤 씨는 이미 다른 남자한테 갈 생각을 한 거야? 내가 요즘 너무 잘해줘서 이제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겠다는 건가?” “…….” “말해 봐. 말 못해?” “…….” “그래. 말 안 한다 이거지? 그렇다면 소리는 낼 수 있겠지?” 순간 싸늘한 바람이 몸을 덮쳐왔고 어느새 윗도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포물선을 그리며 카펫 위에 던져졌다. 하윤이 너른 소파를 원한다고 노래를 불렀었는데, 오늘 그 너른 소파 위에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누워있다. 그 모습에 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버둥대는 하윤을 지켜봤다. 남자의 손이 하윤의 다리를 쓸어 올릴 때 하윤은 끝내 입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실어요. 싫어요.” 도준은 힘을 들이지 않고 하윤의 팔을 제압했다. “하. 이제 말할 수 있겠어? 아까 말하라고 할 때는 왜 말 안 했어? 내가 하윤 씨 기분 생각해서 손도 안 댔었는데 호의를 받아 주기는커녕 짓밟아?” 도준의 손은 하윤의 어깨를 부서뜨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살갗을 쓸어내렸다. 발버둥도 소용없어지자 하윤은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꾹 감고 있던 눈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도준이 강요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윤은 이 소파에서 도준과 함께 티브이를 보며 휴식하기를 꿈꿨다. 물론 흥이 날 때 서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분위기는 더 이상 아까처럼 긴장감이 맴돌지 않아 하윤은 팅팅 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준 씨 잘못 맞잖아요. 제가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고.” “믿으라고?”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태준 따라 간 게 누구였더라? 게다가 같이 식사도 하고 왔으면서.”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 도준의 말이 맞다. 태준을 아무리 우연히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를 따라가기로 한 건 하윤이 선택한 거니까 따지고 보면 크게 다리지는 않았다. 하윤이 넋을 잃고 있을 때 도준이 그녀의 이마를 튕겼다. “자, 그러면 두 사람이 뭘 말했는지 얘기해 봐. 뭘 말했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집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어?”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태준을 오해했던 것 같다고, 태준이 그동안 자기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었던 건 도와주지 않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한 거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윤이 머뭇거릴 때 도준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미리 경고하는데, 나 지금 많이 참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꿍꿍이 부릴 생각 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대화할 테니까.” 하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사실 공태준 따라가서 밥 먹으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 아버지가 고소를 당한 게 공씨 가문과 상관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따라 갔어요. 공태준 말로는 그때 공씨 개인 저택에 공태준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닐라 공천하도 있었대요. 그러니까 이 일은 공천하 짓인 것 같아요.” 하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기에 도준이 지금 어떤 눈빛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일 것만 같았다. 하윤은 말을 마친 뒤 도준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그의 무서운 눈빛을 봐 버렸다. “왜 그렇게 봐요?” 하윤이 오싹해 몸을 움찔할 때 도준은 갑자기 웃음
오후 3시, 하윤은 로건의 차에 앉아 목적지로 출발했다. 로건이 하윤의 경호를 맡은 뒤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거였다. 하지만 대충 인사만 했던 터라 로건은 갑자기 호칭을 정하기 난감해했다. “하윤 씨…….” “아니, 아니지. 이시윤 씨…….” “아니, 아니야. 사모님!” 로건은 90도로 인사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로건이 잘 모시겠습니다!” 하윤은 로건의 호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로건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예전처럼 불러요.” 로건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 요즘 경호원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한테 시키실 일 있으면 마음대로 부리세요. 가장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테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하윤은 그 사람이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로건이 말하니 오히려 다르게 느껴졌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마치 1800와트 짜리 전구라도 갈아 끼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로건의 진지한 모습에 하윤은 멋쩍게 웃었다. “그래요.” 이윽고 조수석에 안장 안전벨트를 매자 로건이 또 말을 걸어왔다. “잘 앉으세요. 출발합니다. 좋은 여정 되시 길 바랍니다.” 하얀 이를 드러네며 환하게 웃는 로건을 보자 하윤은 웃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그, 그래요.” ‘돌아가서 희연 언니한테 물어봐야 겠네. 대체 무슨 책을 봤다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자 로건은 또 책에서 배운 서비스 기술을 선보이면서 하윤을 룸까지 경호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면 돼요. 이따가 도준 씨 차로 갈테니까 먼저 가 봐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방금 까지만 해도 태양처럼 활짝 웃고 있던 로건은 잔뜩 풀이 죽어서는 몇 걸음 걷고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하윤은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도준 씨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멀리까지 걸어갔던 로건은 한순간 하윤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돼요?”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덩치
로건이 떠나자 권하윤과 민도준만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분명 매일 같이 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도준은 낮과 밤이 거이 바뀌다시피 출근하는데다 하윤이 잠이 든 뒤 집에 돌아오고 하윤은 매번 도준을 일부러 피하는 바람에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둘만 있는 상황이 되니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하윤과는 달리 도준은 오히려 하윤을 대놓고 훑어보았다. 비교적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하윤은 오늘 연한 계열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허리 라인까지 오는 상의에 같은 색의 스커트. 분명 단아한 차림이었지만 가는 허리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더해졌다. 그러던 그때 도준이 하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다른 사람이 없으니 하윤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작은 손을 도준의 커다란 손바닥에 얹는 순간, 몸 전체가 도준에게로 끌려갔다. 리클라이닝 의자는 두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기에 하윤은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준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하윤의 등을 토닥였다. “왜 더 마른 것 같지? 요즘 밥 제대로 안 먹었어?” “먹었어요. 아주머니가 하는 밥 맛있어요.” 도준은 하윤의 허리를 문질렀다. “혼자 있기 심심했지? 파트너랑 계약 맺으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데 그때 하윤 씨도 데려갈게.” 하윤은 놀란 듯 되물었다. “해외요?” “응.” 도준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며 피식 웃었다. “참, 파트너 회사가 마침 중부 유럽에 있다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하윤 씨 가족도 데려올 수 있겠다.” 그 말에 하윤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다. ‘가족을 데려온다고?’ 하윤은 지금이 가족을 데려오는 좋은 시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아직 도준이 가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솔직히 도준이 하윤을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마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
권하윤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문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사장님, 손님이 도착했는데 들여보내도 될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윤은 민도준이 일전에 미리 당부해 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워 정신이 혼미해진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들여보내요.” 문이 밖에서 열렸다. 먼저 들어온 여인은 도준이 혼자 있는 걸 발견하자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부인도 함께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디 가셨죠? 설마 부인이 있다고 한 것도 우리 회사 여직원들이 민 사장님께 반하기라도 할까 봐 한 거짓말이었나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마리라는 여자인데 이번에 협업하기로 한 회사의 사장이다. 마리의 간단한 두 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이내 풀어졌고 동행한 임원진들마저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때 부사장이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딴 마음 품은 거 혹시 마리 본인 아니에요?” “들켰네요.” 마리는 투항하듯 두 손을 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발음은 몇몇 외국인들 중 가장 정확했다. 말을 마친 마리는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그래서 저한테 기회는 있나요?” 마리는 전형적인 중유럽 미녀다. 예쁜 외모에 금발을 갖고 있는데다 완벽한 콜라 병 몸매를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도준을 볼 때의 눈빛도 매혹적이었다. 도준은 마리가 지금껏 본 남자 중에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숨길 수 없는 야성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계약 건을 따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 프로패셔널한 모습만 보이며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는데 이제는 계약도 체결되었기에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외모에 대해 항상 자신하는 마리였기에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도준이 자기를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도준의 눈빛은 마리의 뒤를 향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권하윤은 이번 식사가 지루할 줄 알았는데 마리 덕분에 잘 어울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까지 마셨다. 그러다가 민도준이 술잔을 빼앗아 가자 하윤은 확실히 쪼잔한 남자가 맞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어지기 전 마리는 하윤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아쉬워했다. “다음에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명함 아래 적힌 알파벳을 보는 순간 하윤은 왠지 모르게 어디에서 봤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리는 하윤이 자기 회사 이름을 빤히 쳐다보자 으쓱해하며 말했다. “그건 우리 회사 이름 이니셜이에요. WM. 저희 회사는 중유럽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인데 출항할 때면 바다에 떠 있는 대부분 배에 WM이라는 글자를 새겨져 있어요. 심지어 파도도 가장 먼저 WM이라는 글자를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어요.” 술을 마신 탓에 하윤은 마리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지만 애써 눈을 뜨며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심지어 마리의 말이 끝나자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술에 취해 눈이 몽롱하면서도 맞장구 치는 하윤의 모습에 마리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발그스름한 하윤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손목이 힘껏 잡히더니 내팽개쳐졌고 다시 확인하니 하윤은 이미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술 깼죠? 아직도 안 깼으면 팔이라도 부러트려 정신이 번쩍 들게 도와드릴 수 있는데.” 마리는 아픈 손목을 털며 과장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매너는 어디 갔어요?” 그때 마침 도준의 품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하윤은 아픔을 호소하는 마리를 보자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왜 그래요?” 하지만 마리와 닿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을 들어 안다시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가자.” 억지로 집에 가게 된 하윤은 도준의 어깨 너머로 마리한테 손을 흔들었고 마리는 손 키스를 퍼부어 댔다. 바람을 맞으니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무거워지며 눈 앞이
“보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 사장도 다음 주에 기술팀을 데리고 회사로 방문하여 우리 회사 선박의 내비게이션 기술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했고요…….” 마리는 보고를 할 때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보스가 누군가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오늘 그가 오늘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마리는 오히려 의아했다. 얼굴을 비추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때 청회색의 눈동자가 마리에게로 옮겨지더니 채 마르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마리의 젖은 어깨 위에 멈췄다. 물에 젖은 자국이 마치 얼룩처럼 셔츠 어깨 라인을 따라 점점 퍼져 남자의 마음은 오히려 심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짜증나는 듯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알았어. 나가 봐.” 마리도 자기 어깨에서 점점 번지는 물 자국 때문에 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급히 나오다 보니. 저는 이만 돌아가서 선박 모델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겠습니다. 내일 귀국할 텐데 비행기 티켓 예약할까요?” ‘귀국…….’ 남자는 자기의 메일과 부재중 전화 기록을 샅샅이 살폈지만 낯선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소원이 없나?’ 그렇다면 그도 번거롭게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내일 오후 2시 거로 예약해.” “네.” …… “솨…….” 욕실의 따뜻한 물줄기가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 위에 떨어지더니 여자의 긴 머리카락과 남자의 손등을 지나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는 아름답고 온화해야 할 분위기가 정신이 혼미 해 있는 여자 때문에 깡그리 망가졌다. 머리를 씻을 때 잔뜩 취한 하윤이 글쎄 사레까지 들린 거다. 심지어 혼잣말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저 이대로 죽는 거 아니에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도준은 잔뜩 울상이 된 하윤의 모습에 오히려 피식 웃더니 샤워기 헤드를 내려 거품이 가득한 하윤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