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의 질문에 공태준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저도 말하기 곤란해요.” 곧 중요한 단서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태준이 다시 입을 다물자 하윤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음식점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마저 하윤을 바라봤다. 태준은 고개를 들어 하윤을 바라볼 뿐 막지 않았다. 하지만 하윤은 몇 초간 망설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순간 화가 난다고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깊은 숨을 들이쉬며 냉정을 되찾은 뒤에야 하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괴롭히려고 했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 공천하였다? 내 아버지가 학생들의 고발을 당한 것도 당신 아버지가 한 짓이고?” 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 모습에 하윤은 미간을 팍 구겼다. “대답하지 않고 물은 왜 따르는 거야?” “윤이 씨가 답을 듣고 화를 낼까 봐 먼저 물부터 마시고 마음 가라앉히라고요.” 하윤은 태준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건가?” “아니요. 제 대답을 믿지 않을까 봐요.” 태준은 하윤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하윤은 태준의 입에서 나올 이름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 웃음이 났다. “지금 민도준을 말하려는 거야?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네.” 하윤은 가방을 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태준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 “은우가 윤이 씨 풀어줬던 일 알고 있었어요.” 몇 걸음 걸어 나가던 뒷모습이 멈칫하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놀란 듯 물었다. “뭐라고?” …… 돌아가는 길에 하윤은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위의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귓가에는 여전히 태준이 말한 몇 마디가 맴돌았다. “그날 제가 밖에서 돌아왔을 대 윤이 씨가 웬 차에 올라탄 걸 봤어요. 하지만 저랑
손가락에 잇자국이 가득 남은 채로 권하윤은 소파에 앉아 안정감을 되찾으려 애썼다. ‘내가 공태준을 미워하는 게 맞나?’ 사람의 마음은 가장 변덕스럽다. 하윤이 태준을 원수로 여길 때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꿍꿍이가 있고 속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본인이 떠날 때 보내줬다는 말을 듣자 그날 강물에 휩쓸릴 때 자기를 꼭 잡고 놓지 않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잡아요.’ ‘절대 손 놓으면 안 돼요.’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하윤은 무릎을 껴안고 몸을 음치린 채 고개를 팔 안에 파묻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자기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왜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규칙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지. 마치 지금처럼. 하윤은 태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미워해야 할지, 아니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때 마침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놀란 듯 고개를 든 하윤은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키 차이 때문에 남자의 그림자는 하윤을 모두 뒤덮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하윤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언, 언제 왔어요?” 도준은 빙그레 웃었다. “한참 됐어.” ‘넋이 나간 채 들어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던 누구보다는 더 일찍 들어왔지.’ 도준은 하윤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밥 먹었어?”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야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하윤은 확실히 밥을 먹은 게 맞긴 하지만 태준과 함께 먹었으니까. 도준은 하윤에게 깊게 생각할 기회도 주지 않고 또 질문을 던졌다. “뭐 먹었어?” 그는 하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돌돌 말았다. “맛있었어?” 하윤은 긴장한 듯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도준의 손을 바라봤다. 이 순간 도준이 쥐고 있는 게 자기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숨줄이라는 착각마저 들어 저도 몰래 침을 꼴깍 삼켰다
권하윤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민도준은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 “아직 변명은 생각하지 못했나 봐? 내가 도와줄까?” 하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이에 도준은 화가 나다 못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음 순간 도준은 하윤의 목을 꽉 움켜쥔 채로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분명 2할 정도의 힘만 사용했지만 하윤은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아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그때 도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매 순간 하윤 씨를 어떻게 달래줄지 고민하고 있는데 하윤 씨는 이미 다른 남자한테 갈 생각을 한 거야? 내가 요즘 너무 잘해줘서 이제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겠다는 건가?” “…….” “말해 봐. 말 못해?” “…….” “그래. 말 안 한다 이거지? 그렇다면 소리는 낼 수 있겠지?” 순간 싸늘한 바람이 몸을 덮쳐왔고 어느새 윗도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포물선을 그리며 카펫 위에 던져졌다. 하윤이 너른 소파를 원한다고 노래를 불렀었는데, 오늘 그 너른 소파 위에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누워있다. 그 모습에 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버둥대는 하윤을 지켜봤다. 남자의 손이 하윤의 다리를 쓸어 올릴 때 하윤은 끝내 입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실어요. 싫어요.” 도준은 힘을 들이지 않고 하윤의 팔을 제압했다. “하. 이제 말할 수 있겠어? 아까 말하라고 할 때는 왜 말 안 했어? 내가 하윤 씨 기분 생각해서 손도 안 댔었는데 호의를 받아 주기는커녕 짓밟아?” 도준의 손은 하윤의 어깨를 부서뜨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살갗을 쓸어내렸다. 발버둥도 소용없어지자 하윤은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꾹 감고 있던 눈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도준이 강요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윤은 이 소파에서 도준과 함께 티브이를 보며 휴식하기를 꿈꿨다. 물론 흥이 날 때 서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분위기는 더 이상 아까처럼 긴장감이 맴돌지 않아 하윤은 팅팅 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준 씨 잘못 맞잖아요. 제가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고.” “믿으라고?” 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태준 따라 간 게 누구였더라? 게다가 같이 식사도 하고 왔으면서.”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 도준의 말이 맞다. 태준을 아무리 우연히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를 따라가기로 한 건 하윤이 선택한 거니까 따지고 보면 크게 다리지는 않았다. 하윤이 넋을 잃고 있을 때 도준이 그녀의 이마를 튕겼다. “자, 그러면 두 사람이 뭘 말했는지 얘기해 봐. 뭘 말했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집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어?”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태준을 오해했던 것 같다고, 태준이 그동안 자기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었던 건 도와주지 않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한 거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윤이 머뭇거릴 때 도준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미리 경고하는데, 나 지금 많이 참으면서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꿍꿍이 부릴 생각 하지 마. 안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대화할 테니까.” 하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사실 공태준 따라가서 밥 먹으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 아버지가 고소를 당한 게 공씨 가문과 상관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따라 갔어요. 공태준 말로는 그때 공씨 개인 저택에 공태준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닐라 공천하도 있었대요. 그러니까 이 일은 공천하 짓인 것 같아요.” 하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기에 도준이 지금 어떤 눈빛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일 것만 같았다. 하윤은 말을 마친 뒤 도준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그의 무서운 눈빛을 봐 버렸다. “왜 그렇게 봐요?” 하윤이 오싹해 몸을 움찔할 때 도준은 갑자기 웃음
오후 3시, 하윤은 로건의 차에 앉아 목적지로 출발했다. 로건이 하윤의 경호를 맡은 뒤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거였다. 하지만 대충 인사만 했던 터라 로건은 갑자기 호칭을 정하기 난감해했다. “하윤 씨…….” “아니, 아니지. 이시윤 씨…….” “아니, 아니야. 사모님!” 로건은 90도로 인사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로건이 잘 모시겠습니다!” 하윤은 로건의 호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로건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예전처럼 불러요.” 로건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 요즘 경호원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한테 시키실 일 있으면 마음대로 부리세요. 가장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테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하윤은 그 사람이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로건이 말하니 오히려 다르게 느껴졌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마치 1800와트 짜리 전구라도 갈아 끼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로건의 진지한 모습에 하윤은 멋쩍게 웃었다. “그래요.” 이윽고 조수석에 안장 안전벨트를 매자 로건이 또 말을 걸어왔다. “잘 앉으세요. 출발합니다. 좋은 여정 되시 길 바랍니다.” 하얀 이를 드러네며 환하게 웃는 로건을 보자 하윤은 웃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그, 그래요.” ‘돌아가서 희연 언니한테 물어봐야 겠네. 대체 무슨 책을 봤다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자 로건은 또 책에서 배운 서비스 기술을 선보이면서 하윤을 룸까지 경호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면 돼요. 이따가 도준 씨 차로 갈테니까 먼저 가 봐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방금 까지만 해도 태양처럼 활짝 웃고 있던 로건은 잔뜩 풀이 죽어서는 몇 걸음 걷고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하윤은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도준 씨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멀리까지 걸어갔던 로건은 한순간 하윤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돼요?”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덩치
로건이 떠나자 권하윤과 민도준만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분명 매일 같이 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도준은 낮과 밤이 거이 바뀌다시피 출근하는데다 하윤이 잠이 든 뒤 집에 돌아오고 하윤은 매번 도준을 일부러 피하는 바람에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둘만 있는 상황이 되니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하윤과는 달리 도준은 오히려 하윤을 대놓고 훑어보았다. 비교적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하윤은 오늘 연한 계열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허리 라인까지 오는 상의에 같은 색의 스커트. 분명 단아한 차림이었지만 가는 허리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더해졌다. 그러던 그때 도준이 하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다른 사람이 없으니 하윤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작은 손을 도준의 커다란 손바닥에 얹는 순간, 몸 전체가 도준에게로 끌려갔다. 리클라이닝 의자는 두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기에 하윤은 도준의 가슴 위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준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하윤의 등을 토닥였다. “왜 더 마른 것 같지? 요즘 밥 제대로 안 먹었어?” “먹었어요. 아주머니가 하는 밥 맛있어요.” 도준은 하윤의 허리를 문질렀다. “혼자 있기 심심했지? 파트너랑 계약 맺으면 해외로 나가야 하는데 그때 하윤 씨도 데려갈게.” 하윤은 놀란 듯 되물었다. “해외요?” “응.” 도준은 손을 들어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며 피식 웃었다. “참, 파트너 회사가 마침 중부 유럽에 있다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하윤 씨 가족도 데려올 수 있겠다.” 그 말에 하윤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다. ‘가족을 데려온다고?’ 하윤은 지금이 가족을 데려오는 좋은 시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아직 도준이 가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솔직히 도준이 하윤을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순전히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마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
권하윤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문밖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사장님, 손님이 도착했는데 들여보내도 될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윤은 민도준이 일전에 미리 당부해 두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워 정신이 혼미해진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들여보내요.” 문이 밖에서 열렸다. 먼저 들어온 여인은 도준이 혼자 있는 걸 발견하자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부인도 함께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디 가셨죠? 설마 부인이 있다고 한 것도 우리 회사 여직원들이 민 사장님께 반하기라도 할까 봐 한 거짓말이었나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마리라는 여자인데 이번에 협업하기로 한 회사의 사장이다. 마리의 간단한 두 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이내 풀어졌고 동행한 임원진들마저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때 부사장이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딴 마음 품은 거 혹시 마리 본인 아니에요?” “들켰네요.” 마리는 투항하듯 두 손을 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발음은 몇몇 외국인들 중 가장 정확했다. 말을 마친 마리는 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그래서 저한테 기회는 있나요?” 마리는 전형적인 중유럽 미녀다. 예쁜 외모에 금발을 갖고 있는데다 완벽한 콜라 병 몸매를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도준을 볼 때의 눈빛도 매혹적이었다. 도준은 마리가 지금껏 본 남자 중에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숨길 수 없는 야성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계약 건을 따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 프로패셔널한 모습만 보이며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는데 이제는 계약도 체결되었기에 하룻밤이라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외모에 대해 항상 자신하는 마리였기에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도준이 자기를 거절할 이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도준의 눈빛은 마리의 뒤를 향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권하윤은 이번 식사가 지루할 줄 알았는데 마리 덕분에 잘 어울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까지 마셨다. 그러다가 민도준이 술잔을 빼앗아 가자 하윤은 확실히 쪼잔한 남자가 맞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어지기 전 마리는 하윤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아쉬워했다. “다음에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명함 아래 적힌 알파벳을 보는 순간 하윤은 왠지 모르게 어디에서 봤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리는 하윤이 자기 회사 이름을 빤히 쳐다보자 으쓱해하며 말했다. “그건 우리 회사 이름 이니셜이에요. WM. 저희 회사는 중유럽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인데 출항할 때면 바다에 떠 있는 대부분 배에 WM이라는 글자를 새겨져 있어요. 심지어 파도도 가장 먼저 WM이라는 글자를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어요.” 술을 마신 탓에 하윤은 마리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지만 애써 눈을 뜨며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심지어 마리의 말이 끝나자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술에 취해 눈이 몽롱하면서도 맞장구 치는 하윤의 모습에 마리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발그스름한 하윤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손목이 힘껏 잡히더니 내팽개쳐졌고 다시 확인하니 하윤은 이미 도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술 깼죠? 아직도 안 깼으면 팔이라도 부러트려 정신이 번쩍 들게 도와드릴 수 있는데.” 마리는 아픈 손목을 털며 과장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매너는 어디 갔어요?” 그때 마침 도준의 품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하윤은 아픔을 호소하는 마리를 보자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왜 그래요?” 하지만 마리와 닿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을 들어 안다시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가자.” 억지로 집에 가게 된 하윤은 도준의 어깨 너머로 마리한테 손을 흔들었고 마리는 손 키스를 퍼부어 댔다. 바람을 맞으니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무거워지며 눈 앞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