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이 꽉 잡힌 탓에 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오싹한 웃음에 등골이 서늘해져 설명을 하려 했지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봐도 닷새가 지나면 곧바로 깔끔하게 헤어질 것만 같으니 사정하는 게 안 되면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도준 씨도 공태준이 좋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면 왜 계속 저를 해원으로 쫓아내는데…… 아, 아파요…….”턱이 꽉 잡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이 전해지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하지만 속으로는 도준의 이런 반응에 몰래 기뻐했다. 불쌍한 척이 안되면 독점욕을 자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기쁨이 2초도 유지되지 않았을 때 도준이 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꿍꿍이가 있는 듯한 표정을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 하고 그대로 드러나자 도준은 코웃음을 쳤다.“아주 발전했네. 자극요법도 쓸 줄 알고?”하윤은 그 말에 이내 모르쇠로 일관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아닌 척하지 마. 내가 하윤 씨를 곁에 두고 가족마저 모셔 왔으면 해서 그러는 거잖아?”도준이 너무 손쉽게 자기 목적을 까발리자 하윤은 순간 난감했다.이윽고 작은 발걸음으로 도준의 앞에 다가가며 낮게 중얼거렸다.“도준 씨한테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겠네요.”하윤이 분위기를 보며 슬슬 기어오르려 하자 도준은 이내 손을 들어 하윤을 자기 몸에서 떼어냈다.“날 떠받들면 넘어갈 줄 알아? 솔직해져 봐.”여전히 꾸짖는 말투였지만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이에 하윤은 도준의 허리를 안지 못 하자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 부렸다.“범인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저 계속 세워둬서 힘들어요.”도준은 불쌍한 척하며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고 심지어는 껌딱찌처럼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때 여전히 도준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하윤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저 다리 아파요. 우리 저기 가서 얘기하면 안 돼요?”
오랫동안 내리쬔 햇볕이 비 때문에 습해진 공기를 건조하게 해주었다.그때 나무 그늘 아래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가주님, 방금 비가 와서 위험합니다. 뭘 원하시는데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남기가 말려댔지만 소용이 없었다.“괜찮아. 여기서 기다려.”태준은 돌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자학하는 듯 권하윤과 민도준이 함께 이 길을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두 사람이 함께 가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겠지?’똑같은 나무 아래 다른 사람.태준은 나무 아래에 서서 빗물에 씻긴 나무 팻말들을 빤히 바라봤다.그 순간 나무에 매단 붉은 실들이 붉은 치마로 연상되면서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려던 찰나 시선이 가장 특이한 매듭을 한 붉은 실에 멈추더니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그 실과 연결된 팻말은 다른 것과는 달리 새것이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었다.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오면서 팻말이 빙글 도는 사이, 그 위에 적힌 이름이 눈앞에서 휙 지나갔다.태준은 자기가 왜 이렇게 놀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까지 왔으면 당연히 소원을 빌고 팻말을 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하지만 특이한 매듭을 한 팻말은 자기에게 닥친 위험도 감지하지 못한 듯 흔들거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길고 고운 손가락이 그 팻말에 닿으려는 찰나, 태준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 소원 팻말 하나 구매하실래요?”약 열한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여자애가 광주리에 가득 담은 팻말을 들어 올리며 공태준을 바라봤다.팻말을 팔기 위해 여자애는 열심히 소개했다.“하나 사세요. 이거 엄청 효과 있어요. 여기 소원 빌러 오는 커플들이 끊이질 않아요. 그러니 아저씨도 하나 써봐요.”태준은 멈칫하다가 손을 내렸다.“아니야. 아저씨가 같이 이름 쓰고 싶던 상대가 다른 사람이랑 이미 이름 적었거든.”하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태준을 설득했다.“월하노인은 누가 더 진심으로 소원을 비는지 확인하고 소원을 들어준대요. 여기까지 왔으면
이 소식에 하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오빠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으니 민재혁이 회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민재혁이 다시 돌아오면 민도준에게 불리할까 봐 걱정이었다.하윤의 질문에 도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아마 그럴지도.”“그럼 어떡해요?”도준은 잔뜩 걱정하는 하윤의 표정을 보더니 뒤로 몸을 기댔다.“무서워할 거 뭐 있어? 다시 부러트리면 그만이잖아.”“…….”그 말을 들은 하윤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참, 이미 민용재의 죄증을 잡았는데 시영 언니가…… 그때 당한 일을 고백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민시영의 일은 홍보팀에서 나서서 잠재우지 않은 탓에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떼문에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재벌가의 세상에서 민시영이 받은 비난은 결코 적지 않다.그 말을 들은 도준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더니 손가락으로 하윤의 이마를 튕겼다.“미리 자백하지 않으면 영상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릴까?”하윤은 그제야 뭔가를 알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민용재가 없다 해도 아직 민재혁이 남아 있기에 만약 민시영이 미리 말하지 않으면 그녀를 상대하려는 목적이든 아니면 복수를 하려는 목적이든 그 영상은 세상에 폭로될 게 뻔하다.하지만 민시영이 직접 자기 상처를 대중 앞에 공개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영상이 나오면 오히려 죄증밖에 되지 않는다.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것을 세울 수 없다고, 민시영의 성격에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보아하니 시영 언니도 매력적인 껍데기 뒤에 항상 불같은 모습을 숨기고 있었네. 하루 만에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든 걸 보면.’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숨을 쉬었다 하는 하윤의 모습에 논담조로 말했다.“보살님의 동정심이 또 발동했나 보네?”하윤은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전 그저 고생했겠다 하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민시영이 애초에 하윤에게 접근했을 때 목적이 있었지만 매번 모든 걸 솔직히 하윤 앞
민시영의 말은 권하윤을 바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민시영이 바로 자기 아버지가 가르쳤던 음악원 학생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윤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더욱이 낯이 익다는 말에 놀랐던 모습을 떠올리자 시간이 참 빨리 지났다는 게 실감 났다.하윤은 도준을 힐끗 살피더니 핸드폰을 몰래 다른 손으로 바꾸어 쥐었다. 민시영의 말 때문에 도준과의 만남도 애초부터 짜놓은 시나리오였다는 걸 들킬까 봐.더욱이 배신했었다는 걸 다시 기억나게 할까 봐…….그때 마침 담배를 피운 도준이 눈썹을 올리며 하윤을 관찰했다. 그 눈길은 마치 왜 멍때리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듣고 있어요??”갑자기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시영의 목소리에 하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네네. 여기 신호가 좀 안 좋네요.”이 말을 내뱉은 뒤 하윤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혹시 요즘 잘 지내나요?”하윤은 상대의 상처를 들추기 싫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민시영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혹시 그 스캔들 때문에 충격받았을까 봐 그래요?”시영은 환하게 웃었다.“사실 오히려 괜찮아요. 사람마다 저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뒤에서 돕는 모습 보는 것도 꽤 흥미진진하니까. 오늘도 제가 제기한 프로젝트가 만장일치로 통과됐거든요.”“게다가 제일 좋은 건 매일 저 불러내서 차 한잔 마시자던 귀부인들이 사라지니까 귓가가 조용하고 편해요. 매번 곤란했거든요. 안 가면 합작 건에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이고, 가면 그 귀부인들이 저한테 짝을 소개해 준다고 오지랍을 부려 머리가 아팠었는데 요즘 편해요.”시영의 목소리에서 발랄함이 느껴졌지만 하윤은 오히려 가슴이 쓰라렸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하윤의 목소리가 너무 힘없어 보였는지 시영이 오히려 하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저 때문에 속상해할 거 없어요. 이 일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아요.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걱정하면 오히려 점점 나쁜 방향으로 일이 발전
민도준의 팔을 밀어버린 권하윤은 자기의 가는 몸을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도준은 정수리에서 연기가 나는 듯한 하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이번엔 완전히 삐졌나 보네.’‘뭔 인내심이 이렇게 없어? 이틀도 못 버텨?’하윤은 도준이 뭐라 말이라도 할까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버리자 역시 희망을 품으면 안 됐다고 생각했다.‘됐다, 됐어. 눈에 안 보이면 심란한 것도 덜하지.’이미 짐을 싸 들고 멀리 떠나버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가 하윤을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속으로 나 욕하는 거야?”하윤은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원망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제가 어떻게 감히 도준 씨를 욕하겠어요? 도준 씨한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라 칭찬을 하면 모를까.”그 말이 떨어지자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자성을 띤 듯한 웃음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그때 어깨가 잡히더니 힘 있는 손가락이 어깨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쓸고 지나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그만 화 풀어. 이리 와봐, 내가 달래줄게.”달래준다고 했으면서 어깨 위에 얹혀진 손은 하윤에게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몸 대부분이 침대 매트리스에 푹 꺼져 들었고 하윤을 달래주겠다던 사람이 하윤을 아래에 가두어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윤은 상대의 날카로운 눈을 똑똑히 보고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달래주기는 무슨. 제멋대로 하려고 그러는 거면서.”“응, 총명하네.”하윤은 도준의 뻔뻔함에 화가 나 버둥대며 그를 밀어버렸다.“저 그럴 기분 아니니까 저리 비켜요.”하지만 도준은 그렇게 고분고분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거절하는 하윤의 손을 잡아 손등을 깨물었다.“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제 내 위에 그렇게 오래 타고 있었으면 오늘은 내가 돌려받아야 할 차례잖아.”“그게 무슨!”하윤은 도준의 악랄함에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
권하윤은 민도준이 진짜로 행동에 옮기자 다급히 제지했다.“그만 해요. 저 그런 거 필요 없어요.”하지만 도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하윤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는 전화에 대고 계속해서 말을 해댔다.“응, 내가 주소지 보내줄게.”이에 하윤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막았다.“저 돈 싫어요.”“응? 돈이 싫으면 설마…….”도준은 자기 가슴에서 점점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야릇한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그런 암시를 받자 하윤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좀 진지해져 봐요.”도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다시 침대에 기댔다. 그 덕에 가슴 근육과 복근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하윤의 눈앞에 드러났다.“나 지금 진지한데. 그럼 뭘 원해? 한 번에 말해 봐.”하윤은 머리를 굴리며 순종하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준의 이런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다.낮까지만 해도 분명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어 하윤을 긴장하게 만들었으면서 지금은 갑자기 집도 주고 땅도 주고 그것마저…… 크흠…….‘일이 너무 이상하게 흘러가면 반드시 뭔가가 있다는 뜻인데.’도준은 하윤이 눈살을 찌푸리고 뭔가를 연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재밌는 듯 물었다.“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런다고 답이 얻어져?”하윤은 도준의 여유로운 모습에 미간을 더 팍 구겼다.물론 도준이 지금 뭐 하려는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준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그는 절대 손해 보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이에 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저한테 시킬 일이 있어요? ““시킬 일이라…….”남자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선이 하윤의 몸에서 빙 맴돌았다.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두 팔로 자기를 꼭 끌어안았다.“일이 있긴 한데 그건 하윤 씨 의견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야.”“제 의견이요?”하윤은 맨 처음에는 또 그런 쪽 부탁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말에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주로 눈앞의 남자가 한 번
비몽사몽하던 권하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홱 돌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저한테 원하는 게 아까 그게 아니었어요?”하윤은 부끄러운 나머지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도준이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었다.그때 도준이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오? 그렇게 생각한 거였어? 난 또 갑자기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하윤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부러 그런 거죠!”도준은 웃으며 하윤을 끌어당겼다.“본인이 뜻을 오해했으면서 왜 나를 탓해?”몸이 말만 잘 들었어도 하윤은 눈앞의 남자를 한바탕 때리고 싶었다.그러니까 이건 뭐 상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제멋에 이것저것 개고생을 했다는 뜻이다.하윤은 화가 난 듯 도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홱 돌아누워 분을 삭였다.화가 잔뜩 난 하윤의 뒷모습을 보자 도준은 순간 기분이 좋아져 하윤을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화났어?”하윤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아예 침대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평소라면 하윤도 이 정도로 화나지는 않았지만 벌써 또 하루가 흘렀다는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 억제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민시영의 전화에 가뜩이나 마음이 동해 의지할 무언가를 잡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그게 나쁘던 좋던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보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하윤은 거실 통유리 창 앞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산속은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은데 이 한 가지만 좋지 않다. 저녁만 되면 너무 컴컴해서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게.그 어둠 덕에 창문 유리에 비친 남자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도준은 문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은 어둠 속의 유일한 불빛이었다.그러다 그 불빛이 다시 꺼질 때쯤 남자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더니 너른 가슴이 하윤의 등을 와락 껴안았다.“진짜 삐졌어?”하윤은 몇 번 버둥댔지만 소용이 없자 발을 들어 도준을 밟아버렸다
품에 안긴 여자가 눈에 띌 정도로 무기력해지자 민도준은 권하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하윤의 머리는 이미 아까 심술을 부린 것 때문에 헝클어졌고 눈 끝에는 여전히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가련하기 그지없었다.짙고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하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그러다 잠시 뒤 도준은 손가락을 들어 하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작은 물방울이 지문을 따라 퍼지면서 손바닥에서 사라졌다.“앞으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줄 테니까 울지 마.”갑작스러운 약속에 하윤은 순간 슬픔을 잊고 멍하니 도준을 바라봤다. 솔직히 조금 믿기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정말이에요?”“응.”도준은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윤 씨 말 들을게. 가족도 여기로 모셔 와서 잘 보살펴 주고. 가둬두지도 않고 어디 가고 싶다면 다 가게 해줄게. 어때?”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여느 때보다도 부드러웠지만 하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도준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자 마치 통장에 거금이 꽂힌 것처럼 기쁨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도준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이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그, 그러면 저 가족 데리러 가면 안 돼요?”“안 돼.”뼈마디가 선명한 도준의 손이 하윤의 얼굴을 쓰다듬자 하윤은 순간 소름이 끼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제 가족이 경성에 오면…….”“경성에 오지 않을 거야.”힘 있는 손이 하윤의 어깨를 꾹 눌렀다.“가족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잖아. 그러니 안전할 수 있도록 내가 보호해 줄게. 이건 약속해. 하지만 서로 만나는 건 안 돼. 그것만 빼면 다른 요구는 뭐든 만족시켜 줄게.”하윤은 그제야 도준의 말에 반응했다.“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가족과 연을 끊으라는 뜻이에요?”도준은 칭찬하는 듯 하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똑똑하네.”“왜요?”하윤을 끌어안은 도준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자기야. 나도 자기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나를…… 생각해서?’도준의 어깨 너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