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영은 민용재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지금껏 활발하고 발랄하던 모습과는 달리 존재감이 지극히 낮았다.심지어 민도준이 자기를 바라볼 때도 민시영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건 지금까지 보여온 민시영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하지만 이 순간 민시영은 검은 슈트 차림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요.”민시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민용재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민도준과 민용재가 권력 다툼을 하는 동안 민시영은 계속 민용재의 편에 섰었다.그도 그럴 게 민용재의 손에 민시영을 쥐고 주무를 수 있는 물건이 있었으니까 단 한 번도 민시영이 오늘 갑자기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이에 민용재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민시영을 바라보며 경고했다.“시영아, 오늘 상황이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너까지 보태지 말거라.”그 말에는 협박의 의미가 다분했다.하지만 이 순간 민시영은 민용재한테 잡혀 휘둘리던 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미소를 지으며 20년 전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민씨 가문 셋째 아가씨로 돌아간 모습이었다.그리고 민시영이 내뱉은 말은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충격에 빠트렸다.“제가 꼭 보태겠다고 하면요? 또 사람을 시켜 저한테 모욕을 주면서 찍은 영상으로 저를 협박하시게요?”“…….”약간 소란스러웠던 홀은 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그 순간 동시에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사람들의 놀란 시선 속에서 권하윤은 오히려 숨 막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때 권하윤도 하마터면 원혜정이 몰래 탄 약을 먹은 적이 있기에 민시영이 말한 영상이 어떤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그런 비열하고 악랄한 수단은 잔인하면서도 항상 유효하다. 특히 민시영과 같은 재벌가 여식들한테는 더더욱. 민시영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이런 스캔들이 터지면 모든 게 망가질 게 뻔하다하지만 민시영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전에 그 영상으로 제 아버지를 협박하셨죠. 이제는 저고. 그럼 다음은
별안간 할 일이 없어진 민도준은 옆에서 폭행 현장을 구경하면서 가끔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건네주어 외할아버지와 두 외삼촌이 민용재를 때리는 데 도움을 줬다.물론 세 사람은 민도준만큼 공격적이진 못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구타당하는 모습이 보이는 걸 민용재는 참을 수 없었기에 끝내 버럭 소리쳤다.“당신들이 뭔데 사람을 마구 때려? 얼른 경찰에 신고해!”말이 끝나기 바쁘게 밖에서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찰입니다. 다들 멈추세요!”장 형사가 나타난 순간 민용재는 어리둥절했다.이제 방금 신고하라고 소리쳤는데 벌써 출동해서 도착했다니 뭐가 이렇게 빠른가 잠깐 의문이 생겼다.하지만 장 형사는 들어오자마자 이런 장면을 보자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 특히 뭇사람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남자를 보자 머리가 찌근거렸다.“민 사장…….”민도준은 이내 피범벅이 된 마이크를 옆으로 던져버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장 형사, 오해 말아요. 살인범이 도망치려 해서 대신 잡아둔 거니까.”장 형사는 울긋불긋 멍이 든 민용재를 본 순간 머리가 더 아파 났다.때문에 민도준의 말은 대충 넘겨버리고 영장을 내밀면서 미란다 원칙을 읊조렸다.“민용재 씨, 당신을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민용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갑자기 나타난 장 형사를 바라보더니 옆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서 있는 민도준을 바라봤다.그리고 그제야 자기가 오늘 민도준에게 단단히 낚였다는 걸 알아차렸다.만약 이런 상황에서 체포되어 간다면 완전히 끝장나는 거다.민용재도 이렇게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수습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오늘 민도준을 공적으로 비난한 거였다.그런데 오히려 스스로 꿰임에 빠졌을 줄이야.하지만 민용재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아닌 척 연기했다.“살인? 증거 있어? 증거도 없이 이러면 나 협조할 수 없어!”“민도준 씨가 이미 여러 가지 증거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만약 협조하지
그때 웬 여자가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어버렸다.민승현은 권하윤을 보더니 싸늘하게 웃었다.“권하윤, 새로운 이름을 지어내면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진다고 생각해?”권하윤은 비아냥거리는 민승현의 말을 무시한 채 민도준 옆으로 걸어갔다.민도준은 권하윤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권하윤의 옷차림을 보는 순간 눈빛이 싸늘해졌다.이윽고 감정을 억누른 듯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려가. 나설 필요 없어.”권하윤은 민도준의 말대로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눈 뜨고 이렇듯 대단한 사람이 자기 때문에 오물을 뒤집어쓰는 걸 볼 수 없었다.이에 권하윤은 뭔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더니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저는 음악가 이성호의 딸 이시윤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저에 관해 찾아봐도 됩니다. 이성호 음악가한테 이시윤이라는 딸이 있는지.”이성호라는 이름은 적지 않은 사람이 익숙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때문에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검색을 해보고는 높은 소리로 말했다.“맞아요. 이성호 음악가님의 슬하에 이시윤이라는 딸이 있어요.”권하윤은 옆에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민도준의 눈빛을 애써 무시한 채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저와 권씨 가문 넷째 아가씨 권하윤은 쌍둥이 자매입니다. 하지만 권미란 여사가 병원을 매수해 저희 식구 몰래 제 쌍둥이 언니를 데려간 겁니다.”“그 뒤로 저희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겨났고 저희는 권씨 가문 넷째 아가씨의 도움으로 경성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그때 민도준 씨와도 알게 됐고요.”“하지만 얼마 전에 제 쌍둥이 언니가 불행하게도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권하윤은 민승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난 네가 알던 권하윤이 아니라 이시윤이야.”그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얘기 같았지만 따지고 보면 또 모두 증거가 명확해 거짓말 같지 않았다.“헛소리하지 마!”순간 분노에 찬 목소리가 고요함을 깨트렸다.민승현은 권하윤의 말이 믿기지 않았
“아니야! 이시윤이야. 내 약혼녀는 이시윤이었어!”민승현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시윤은 머나먼 해원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건지?그때 진소혜마저 끼어들었다.“이봐요. 헛소리 좀 그만할래요? 그쪽 약혼녀는 권씨 가문 넷째예요. 이 사람은 제 새언니라고요. 남의 여자 함부로 뺏지 마요!”“닥쳐! 네가 뭘 알아? 당신들이 뭘 알아?”충격을 받은 민승현은 결국 손을 뻗어 권하윤을 잡으려 했다.“거짓말이지? 거짓말하는 거지?”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민도준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하마터면 무대 끝으로 떨어질 뻔했다.“미안해. 조건반사적으로 나온 거야.”민도준은 씩 웃으며 경호원들을 향해 말했다.“뭣들 해? 당장 다섯째 도련님 모셔가서 휴식하게 하지 않고.”민승현은 끌려 나가몃서까지 미친 사람처럼 마구 소리쳤다.“아니야. 아니라고! 내 약혼녀는 이시윤이야! 당신들 다 거짓말하는 거야!”민승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오늘 벌어졌던 해프닝도 막바지에 일어섰다.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다 보니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계속 구경하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발표회를 계속할지 아니면 그대로 흩어져야 할지, 누구 하나 먼저 결정하는 사람이 없었다.사람들이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을 때 민도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이제 구경거리도 없어졌으니 발표회를 계속합시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현장 직원이 눈치껏 나타나 테이블보를 새것으로 바꾸고는 손님들을 다시 자리에 안내했다.권하윤마저 슬그머니 직원들의 뒤를 따라 무대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갓 두 걸음 정도 내디뎠을 때 손목이 덥석 잡혔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민도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민도준의 무서운 눈빛에 놀란 권하윤은 겁에 질려 이내 입을 다물었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민도준에게 끌려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연회장을 나오자 권하윤은 더 이상 민도준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그를 살짝
민도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을 누르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려놓았다.“그래. 본인은 권하윤이 아니라 이거지? 그럼 가.”어깨를 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하윤은 마음이 가벼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막막해졌다.‘가라고? 지금 나보고 떠나라는 건가?’갑자기 손에 쥐어진 자유에 기쁘기보다는 불안감만 밀려왔다.그대로 굳어버린 하윤을 보자 도준의 눈에는 귀찮음이 더해졌다.“귀먹었어? 떠나고 싶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망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 가게 해준다고.”지금 어떤 심정인지 스스로조차 말할 수 없어 하윤은 그저 비스듬히 닫힌 문을 바라봤다.저 문을 나서는 순간 앞으로 다시는 도준과 만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도 끝이겠지.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조용한 휴게실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하윤은 등을 돌린 남자를 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왜요? 왜 제가 원래 신분으로 돌아오면 도준 씨랑 같이 있을 수 없는데요? 공은채 때문이에요? 그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를 죽인 우리 집안 식구를 용서할 수 없는 건가요?”도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등을 돌린 남자의 뒷모습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가 방 안의 공기를 답답하게 짓누를 때까지 하윤은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했다.그 순간 하윤의 마음도 나락으로 떨어졌다.‘역시 난 공은채만 못 하다는 거네.’하윤은 다시 한번 도준의 등을 바라봤다. 이제 가야 할 때다.하지만 코끗과 눈시울이 자꾸만 시큰거렸고 눈물이 앞을 가려 시선이 희미해졌다.지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하윤은 그래도 가족을 위해 변명했다.“공은채 씨가 돌아간 건 저도 유감이에요. 하지만 그건 우리 가족이 해친 게 아니에요. 아빠는…….”“그만해.”참을성 없는 목소리가 하윤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하윤이 조금이나마 품고 있던 희망도 완전히 산산조각냈다.눈시울에 고였던 눈물이 끝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아무리 손을 들어 닦아보아도 눈물을 끝이 없었고 억눌린 흐느
정신이 딴 데로 새려던 찰나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앞으로 끌어당겼다.남자의 눈빛은 마치 하윤의 껍질을 벗겨낼 것처럼 날카로웠다.막연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하윤을 보며 도준은 아예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반 바퀴 빙 돌려 문을 마주 보게 했다.“직접 말해. 같이 가지 않겠다고.”‘분명 본인이 나를 쫓아냈으면서 이제는 또 협박한다고?’하윤은 순간 울컥해서 고개를 홱 돌렸다.“몰라요.”거절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공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그러고는 도준을 보며 말을 보탰다.“민 사장님, 제가 약속했던 건 해드릴 수 있으니 민 사장님도 약속 지켰으면 좋겠네요.”두 사람의 대화에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두 사람 사이에 자기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태준이 떠나간 뒤, 하윤을 잡고 있던 힘이 스르르 풀렸다.이윽고 도준은 1인용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담배 연기를 머금은 목소리는 마치 짙은 안개를 낀 것처럼 희미했다.“해원으로 돌아가겠다면 내가 사람을 찾아 데려다줄게.”도준이 또다시 당장이라도 자기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 난 모습으로 돌아오자 하윤은 순간 억울하고 분해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필요 없어요. 공태준도 마침 돌아가니 차 좀 빌려 타면 그만…….”하지만 뒤에 말은 자기를 쏘아대는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그대로 목구멍으로 삼켜야만 했다.“경고하는데, 지금 나 건드리지 마. 안 그랬다간 마음을 바꿔버릴지도 모르니까.”하윤은 귀를 쫑긋 세웠다.‘마음을 바꾼다고? 그러면 결정을 번복한다는 건가?’사실 기어코 떠나려 하는 건 그저 자유를 갖고 싶어서다.하지만 지금 자유가 손에 주어지니 또 오히려 가기 아쉬워졌다.이에 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자기 궁금증을 그대로 내뱉었다.“마음을 바꾼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하윤이 지금 기대를 품고 있다는 걸 놓칠 리 없는 도준은 눈을 반짝이며 저를 보는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왜?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가 방 안의 고요함을 깨트렸다.“민 사장님?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강원.”도준이 저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던 지역 이름을 듣자 하윤의 눈은 순간적으로 생기가 돌았다.솔직히 말을 꺼내는 순간 도준 스스로도 약간 놀랐다.하지만 다시 살아난 것처럼 구는 하윤의 표정을 보자 순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참 생명력 한번 강하네. 어떤 타격을 입든 희망만 있으면 다시 활력을 되찾는 걸 보니.’도준이 전화를 끊었을 때 하윤은 벌써 그의 앞에 서 있었다.“지금 가요? 얼마나 가려고요?”도준은 잔뜩 흥분한 하윤을 힐끗 봤다.“말했었잖아, 닷새라고.”하윤은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닷새라고 하면 아직도 도준 씨를 설득할 시간이 닷새나 있다는 뜻이잖아?’하윤은 그사이 기회를 찾아 아버지의 억울함을 도준에게 잘 설명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로서는 절대로 아버지가 그런 비겁한 일을 했을 거라는 것도, 자기가 쌓아 올린 업적을 그대로 무너트리는 일을 할 거라고도 믿지 않았으니까.민도준도 그걸 믿게 된다면 두 사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었다.다시 찾아온 희망에 밝아진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일부러 악의적으로 귀띔했다.“마침 그사이에 감옥 같은 별장으로 다시 돌아갈지 아니면 해원으로 갈지 생각하면 되겠네.”반짝거리던 하윤의 눈은 역시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약간 어두워졌지만 곧바로 스스로 조절했다.물론 지금은 죄수처럼 갇혀 살거나 추방당하는 선택지뿐이지만 5일 뒤에는 모르는 거니까.‘만약 도준 씨를 설득할 수 있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몰라.’이런 생각이 들자 하윤은 얼른 양옆으로 축 처진 도준의 팔을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알았어요.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하지만 도준은 그저 콧방귀를 뀌며 웃더니 하윤의 손을 뿌리치고 먼저 방을 나가버렸다.……밖에서는 여전히 발표회가 계속되고 있어 두 사람은 회장 맨 뒤에서 걸어 나갔다.물론 카메라 뒤편에서 걸어갔지만 민도준이 나타나자
박 대표의 말에 박민주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여직원이 박 대표를 설득했다.“대표님, 아가씨 마음대로 하게 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아가씨도 단념하지 않을 겁니다.”확실히 그랬다. 이 시각 민주는 다른 사람의 신경이 자기한테 쏠렸다는 걸 관계할 겨를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물음의 답을 얻어야 했으니까.분명 4년 동안 민도준만을 기다리면서 다른 남자는 모두 거절했는데, 심지어 먼 해외에서부터 그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왜 도준과는 이런 결말밖에 맞을 수 없는지 궁금했다.왜 도준이 자기가 아닌 권하윤을 선택했는지 알아야 했다.성숙해 보이기 위해 민주는 오늘 일부러 평소에 잘 신지도 않던 스틸레토힐을 신은 탓에 한참이나 뒤쫓아서야 겨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잠깐만요!”하지만 민준의 목소리는 남자를 붙잡지 못했다. 다급한 마음에 민주는 손을 뻗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집어넣었다.문에 손이 끼여 고통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닫히던 문이 다시 양옆으로 열렸고 도준과…… 그 여자가 민주의 눈에 들어왔다.하윤은 민주의 초라해진 행색에 잠깐 멈칫하더니 민도준을 힐끗 보고는 말없이 입을 삐죽거렸다.그사이 민주는 도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저, 물어볼 게 있어요.”도준이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는지 민주는 낮게 설명을 덧붙였다.“내일이면 저 유학 가요.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예요.”하윤은 자기의 존재가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해줄 곳이 없는지라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렸다.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살짝 떨리는 박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를 왜 싫어해요?”하윤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나 고전적인 질문이네.’도준은 몸을 뒤로 돌려 벽과 마주하고 있는 하윤을 힐끗 보더니 귀찮은 듯 반문했다.“내가 왜 그쪽을 좋아해야 하지?”숨을 죽인 채 답을 기다리던 민주는 도준의 말에 멍해져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