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 씨…….”“일단 병원부터 가.”많이 말할수록 실수할까 봐 권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 옷을 입기 시작했다.원래는 스스로 하려고 했으니 민도준이 도와줘 잠깐 버둥대며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저 손은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하지만 다음 순간 민도준은 권하윤의 손을 옷에서 강제로 떼어내더니 권하윤의 슬립원피스를 들추기 시작했다.“내가 도와줄게.”기억 속에 권하윤은 어릴 때 외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다. 그때는 손발이 짧아 어른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지만 지금은 다 큰 성인인데 도움을 받으니 오히려 부끄러웠다.게다가 하필이면 권하윤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는 사람이 젠틀한 사람이 아니라 입혀주다가도 손으로 이리저리 슬쩍 만져대는 바람에 권하윤은 자꾸만 몸을 흠칫흠칫 떨며 새우처럼 움츠렸다.물론 바둥거리며 이리저리 피해도 모두 헛수고였지만.민도준은 아예 웅크린 권하윤을 확 잡아당겨 팔을 활짝 열어버렸다.“이러면 내가 어떻게 옷 입혀줘? 손 들어 봐.”“응. 조금 더 들어.”자기를 살살 구슬리는 듯한 말투에 권하윤은 끝내 참지 못하고 민도준의 손에서 옷을 홱 낚아챘다.“제가 입을게요.”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흥미로운 듯 반항하는 권하윤을 단번에 제압했다.“말 들어. 옷 입혀주는 데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말을 안 듣는다고? 지금 말 안 듣는 게 누군데.’끝내 권하윤은 민도준을 이기지 못하고 민도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가 단추를 채운 손가락이 어깨를 스칠 때 몸을 살짝 떨더니 민도준이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할까 봐 바로 몸을 배배 꼬며 밀어버렸다.“됐어요. 이제 다 입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버둥대며 침대에서 내리려 했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을 꾹 누르며 아래층으로 안고 내려갔다.권하윤 스스로도 지금의 자기가 그저 짐짝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귀찮아하기는커녕 권하윤이 모든 걸 자기한테 의존하는 걸 즐기는 듯했다.그렇게 신발을 신을 때가 되자 권하윤은
권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앞에 있던 사람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하지만 민도준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미안함도 없이 오히려 권하윤을 품 안에 안고 강수연을 향해 씩 웃었다.“어이쿠, 다섯째 숙모였네요. 죄송해요.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괜찮으세요?”이 시각 민도준을 보는 강수연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우리 승현이 돌려줘. 아무리 그래도 걔는 네 동생이야. 잘못했다고 해도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게다가 잘못한 걸로 따지면 네가 승현이한테 먼저 미안한 짓을 했잖니. 승현은 그저 너무 어려서 홧김에…….”하소연하는 강수연의 말을 들어보니 민승현이 이틀 동안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강수연은 이틀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끝내 여기로 온 거고.민도준은 민승현이 실종됐다는 말에 약 2초간 멈칫하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승현이가 실종됐다고요? 그렇게 큰일을 왜 이제야 말하게요? 일찍 말했다면 저도 도왔을 텐데. 벌써 이틀이나 지났으니 죽었을지도 모르겠네요.”“너!”강수연은 눈앞이 캄캄해져 뒤통수를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그때, 한참을 서 있다 보니 권하윤은 다리에 또다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해 몸의 무게중심을 살짝 민도준에게 나누며 뒤로 기댔다.하지만 움직이기 바쁘게 민도준이 권하윤을 번쩍 들어 안으며 입을 열었다.“다리 아파?”그래도 앞에 시어머니가 될 뻔한 사람이 서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권하윤은 어색했다.아니나 다를까 권하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수연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권하윤! 너와 승현이는 그래도 부부가 될 뻔한 사이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너한테 직접 파혼도 하지 않던 승현이가 사라졌다는 데 돕지는 못할망정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람이라면 그래도 승현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니니?”“하.”순간 짤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러더니 민도준이 눈을
민도준이 민승현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이런 순간 민승현이 사라졌으니 모든 사람이 민도준을 의심할 게 뻔하다.게다가 민승현을 납치한 사람이 원하는 게 바로 이것을 테고.민승현이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사고라도 당한다면 이 모든 책임은 민도준에게 씌워질 거다.동생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분노를 살 텐데 더욱이 제수씨인 자기의 그렇고 그런 관계란 것만 생각하면 더 상상하기도 무서웠다.그런데 민승현이 죽기까지 한다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이건 분명 도준 씨를 무너뜨리려는 수작이야.’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잔뜩 긴장해하는 권하윤과는 달리 민도준은 오히려 장난을 쳐댔다.“내가 급할 거 뭐 있어? 원래도 죽이고 싶었는데 직접 손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그게 어떻게 같아요!”권하윤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민승현은 권하윤과 민도준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니 민도준이 똑같이 돌려주는 것도 성격상으로는 못 할 일이 아니다.하지만 직접 처리한다면 당연히 흔적도 남기지 않을 텐데, 다른 사람이 그걸 이용해 민도준을 무너트리려 한다면 그건 또 다르다.게다가 강씨 가문까지 있으니 일은 더 심각하다.강씨 가문은 물론 민씨 가문과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래된 재벌가이기에 그 뿌리는 매우 깊다.더욱이 강씨 가문 노부인이 민승현을 어릴 때부터 아껴 만약 진짜 민도준이 한 짓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피바람이 불 게 뻔하다.그 결과를 상상만 해도 머리가 찌근거려 권하윤은 얼른 민도준의 팔을 잡았다.“아니면 사람을 불러 민승현을 얼른 찾아보는 게 어때요? 데려오게.”“데려온다고?”민도준은 눈을 들어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왜? 설마 민승현한테 아직도 감정이 남았어? 이렇게 옛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거 몰랐네.”안 그래도 조급한데 민도준이 농담을 하며 놀려대자 권하윤은 화가 나서 민도준의 가슴을 때렸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저도 도준
사람을 끄는 민도준의 얼굴을 보며 권하윤은 잠깐 넋을 잃었다.돌이켜보면 권하윤은 한 번도 민도준의 속내를 안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민도준의 행동은 언제나 알 수 없었으니까.‘그만하자. 이미 떠나기로 결심했으면서 이런 걸 고민해서 뭐 해?’‘도준 씨한테는 나보다 떳떳하게 내보일 수 있는 아내가 더 필요하잖아. 지금은 민승현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해.’어찌 됐든 권하윤이 아니라면 민도준은 매번 다른 사람 앞에서 약점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생각을 정리한 권하윤은 일부러 자기감정을 숨기기 위해 민도준을 살짝 밀었다.“저랑 이렇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민승현이나 찾아요.”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권하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나더러 어디 가서 찾으라고?”하긴, 경성처럼 이렇게 큰 도시에서 사람 하나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숨기려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한참을 생각하던 권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혹시 민용재 짓일까요?”진씨 가문이 칩 기술 응용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더욱이 그 상품이 시장에 유입되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할 거고. 그때가 되면 민용재는 과학기술 단지를 계속 차지하고 있을 수 없을 테고 민씨 가문 산하의 모든 기업도 주인이 다시 바뀌게 될 거다.그러니 그 성격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아마도.”민도준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권하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급할 거 뭐 있어? 민승현이 죽으면 알게 될 텐데.”민도준은 이렇게 말했지만 권하유는 민도준처럼 한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에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고민했다.“사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박씨 가문과 혼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해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하윤의 머리카락을 돌돌 감던 손이 꽉 힘을 주며 머리를 잡아당겼다. 물론 아플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도 말하고 넋을 잃은 권하윤의 정신을 다시 불러오는 건 충분했다.눈을 들어보니 민도준이 차가운 눈빛
손가락 끝에 갑자기 차가운 느낌이 전해지더니 루비 반지가 눈에 들어오자 권하윤은 잠깐 멍해졌다.무거운 마음이 순간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하더니 권하윤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려고 할 때 민도준의 손이 권하윤의 손가락을 잡았다.루비 반지는 새하얀 권하윤의 손을 마치 예술품처럼 만들어 주었다.이윽고 웃음기가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며칠 늦었지만 완전히 늦은 건 아니지?”다시 그 반지를 보는 순간 권하윤의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고작 며칠이 흘렀지만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지난번에 이 반지를 볼 때 권하윤은 결혼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속박당하고 있다고만 느껴졌다.잠자기 전 권하윤이 반지를 빼려고 하자 민도준은 바로 막았다.“뭐 하는 거야?”“아직 적응이 안 돼요…….”“끼다 보면 적응돼. 얼른 자.”-민도준의 말대로 일주일이 지나자 권하윤은 반지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별장에서의 생활도 적응했다.낮에는 민도준이 없다 할지라도 밤마다 찾아와 저녁식사를 함께했으니.게다가 식사가 끝나면 권하윤의 옆에서 민도준은 좋아하지도 않는 드라마를 같이 보곤 했다. 심지어 며칠 보고 나니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까지 외웠다.오늘 마침 무서운 부분이 나오는 장면인데 권하윤은 하필이면 주스를 많이 마셔 화장실에 다녀왔다.하지만 떠나기 전 민도준에게 제대로 보고 말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러다 다급히 나왔을 때, 권하윤의 발걸음은 거실에 멈췄다.소파에 앉은 민도준이 눈살을 찌푸린 채 티브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분명 권하윤의 드라마 스타일을 뭐라 말하더니 이 시각 민도준은 인내심 있게 드라마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 권하윤은 마음이 누그러들었다.이윽고 며칠간 억눌렀던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습관은 참 무서운 건가 보다. 분명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여러 번 되뇌었는데 결국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습관이 나오는 걸 보니.일주일 전 권하윤은 자유가 고팠고 정상적인 생
민도준은 침대 옆에 앉아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왜? 이젠 화가 풀렸어?”크게 화난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다시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스로도 난감했는지 권하윤은 콧방귀를 뀌었다.“조금 휴식하다가 다시 화낼 거예요.”민도준은 그런 권하윤을 무시한 채 옆에서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뭔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그때 옆에서 민도준의 핸드폰을 본 권하윤은 눈이 반짝이더니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기댔다.“도준 씨, 뭐 해요?”권하윤은 그저 핸드폰으로 말을 꺼내 자기한테도 전자기기를 줄 수 없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핸드폰 액정에 비친 문자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도준 형, 은찬이 찾았어.]은찬이…….순간 은찬이가 은우의 동생이라고 하던 공태준의 말이 생각났다.권하윤은 이미 성은우에게 미안한데 만약 은찬이마저 일이 나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할 거다.순간 회상에 잠긴 권하윤은 민도준이 이미 핸드폰을 꺼버렸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민도준의 말에 방금까지 머리를 굴리던 권하윤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슬쩍 바라봤다.이윽고 바른 태도로 사과하기 시작했다.“방금 제가 실수로 핸드폰 문자 내용을 봐버렸어요.”“응. 그래서?”“그래서…….”권하윤은 슬그머니 민도준의 눈치를 살폈다.“은찬이를 찾았다는 걸 봐 버렸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민도준은 침대 머리에 기대며 악랄한 기운을 내뿜었다.“감히 내 눈앞에서 수작질을 했는데, 내가 어쩔 것 같아?”그 말을 들은 순간 권하윤의 가슴은 쿵 하고 가라앉았다. 민도준의 성격대로 한다면 은찬은 아마 죽지 않으면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그 생각에 권하윤은 손가락으로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사실 은찬이가 예전에 저를 잘 챙겨줬었는데 그저 한번 실수한 것뿐이에요. 아직 어린애인데 그냥 놔주면 안 돼요?”“걔가 어떤 짓을 했는지 기억나게 해줄까?”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지금도 은찬이가 자기에게 미약을 사용할 때 느꼈던 놀라움이 생생하니
“그래, 나도 그건 알아.”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모르는 건 하윤 씨가 나를 얼마나 더 오래 속일 건가 하는 거지.”일주일간 돌아온 혈색이 순간 사라지더니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했다.“저…… 일부러 속이려던 게 아니에요. 무서워서 그랬어요.”“응?”살짝 올라간 끝 음에 권하윤의 심장도 더 빨리 쿵쾅거렸다.아마 권하윤의 삶에 이제는 민도준뿐이라서 민도준의 모든 기분이 권하윤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이었다.더욱이 민도준이 매번 화를 낼 때마다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었으니까.일이 악화할까 봐 권하윤은 매번 거짓말을 해대고 들통나면 또 무서워 벌벌 떠는 악순환에 놓여있다.게다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니 권하윤은 점점 더 둔감해졌는지 지금도 한참을 생각해도 뭐라 말해야 할지 합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오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민도준의 팔을 꼭 잡았다.그건 민도준을 무서워하면서도 의지하는 표현이었다.하지만 민도준에게는 잘 먹혀들어 간 모양인지 민도준은 끝내 권하윤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그래서 나를 속이고 싶지 않다 이거지?”갑자기 부드러운 말투로 돌아온 민도준의 모습에 권하윤은 어리둥절해서 둔감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래, 그럼 은찬이 풀어줄게.”“진짜요?”권하윤은 믿기지 않는 듯 민도준을 멍하니 바라봤다.“응, 하윤 씨가 말한 것처럼 얌전히 있은 보상이야.”민도준이 고분고분해진 모습에 권하윤은 입을 벌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기어들어 간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민도준은 그런 권하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나한테 그렇게 내외할 거 뭐 있어?”권하윤은 말을 더 하다간 실수라도 할까 봐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민도준의 가슴에 기댔다.이런 고요함은 이튿날까지 지속되었다.권하윤은 말이 적어졌고 좋아하던 드라마를 보는 것조차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마치 하루아침에 활기를 잃은 것처럼.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었다.늦은 밤 민도준은 이불 안에 쪼그리고 누운 권하윤을 보고는 열쇠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
불빛이 타오르더니 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왜? 부러워? 너한테 이 기회를 넘겨줄까?”그 말에 최수인은 이내 손사래를 쳤다.“나한테 그런 복이 어디 있다고. 상대는 너를 원하지 나를 원하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 너 박씨 가문 딸을 윤이 씨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다는 거 그쪽에서는 괜찮대?”민도준은 그 말에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며 눈을 흘겼다.“내가 방패막이로 사용한다고? 스스로 달려든 거거든.”결혼식 전날 박씨 가문에서는 민도준과 박민주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퍼뜨리고는 나중에 결혼식을 비밀리에 진행하자 더 마음대로 날뛰기 시작했다.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박민주와 민도준이 이미 결혼한 줄로 알고 있다.이런 행동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게 뻔한데 박씨 가문 가주가 딸을 생각해 세운 계략이란 것만은 알 수 있다.우선 민도준이 “제수씨”와 결혼한다는 걸 민씨 가문에서는 원래도 쉬쉬하기에 허위소문을 퍼뜨려도 해명하지 못할 테고, 둘째는 박씨 가문에서 이 “혼인”으로 민도준에게 묻어가려 하기 때문이다.더욱이 박민주가 민도준을 그렇게 좋아하니 아무리 허울 좋은 껍데기라도 딸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아버지 마음일 거다.게다가 한발 물러서서 생각한다 해도 두 가문에서 이번 일에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민도준은 어느때곤 부인할 수도 모두 헛소문이라고 나서서 말할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민상철을 상대해야 하기에 잠깐 박씨 가문을 이용하는 것뿐이다.최수인은 이런 재벌가들의 암투에 흥미가 없었기에 듣다가 이내 하품을 해댔다.“그런데 너 너네집 영감탱이 신경도 쓰지 않았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상대하는데?”“공태준이 영감탱이 찾아갔었거든.”최수인은 그 말에 하던 하품을 억지로 넘기고 놀란 듯 물었다.“뭐? 그럼 그 자식이 설마 윤이 씨 일을?”민도준이 부인하지 않자 최수인은 끌끌 혀를 찼다.“공태준 이 능구렁이 같은 놈. 자기는 좋은 사람인 척하며 영감탱이 힘을 빌린다 이거네! 상황이 아주 가관이구먼. 어쩐지 사람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