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경적 소리와 격렬한 부딪힘에 이어 중력이 사라지더니 차는 강물에 빠져버렸다.순간 사방의 물이 차 안으로 들어와 미처 반하기도 전에 물에 잠겨버렸다.숨을 쉬고 싶었지만 코와 입으로 물이 자꾸만 들어오고 심지어 시선마저 강물 때문에 흔트러져 그 순간 권하윤은 처음으로 죽음의 고비에서 허덕이는 느낌을 경험했다.그러다가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누군가 권하윤을 차 안에서 밖으로 꺼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하필 그때 발이 시트 사이에 끼여 빼낼 수 없게 됐다.시간은 사람을 기다리는 법이 없다. 일분일초 흘러가는 내내 생명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권하윤을 잡은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금거렸지만 권하윤은 그저 상대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버블만 보였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권하윤은 겨우 상대의 도움으로 차에서 빠져나왔지만 두 사람은 이미 기진맥진했다.사방이 온통 물이었다. 겉으로는 고요하기만 하던 강이었는데 그 아래는 위험한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수영을 할 줄 모르는 권하윤에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밟히지 않은 채 둥둥 떠 있는 느낌은 공포의 극치였다.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누군가 자기를 꽉 안고 있다는 것뿐이었지만 권하윤이 물 때문에 허우적댈 때면 남자는 끊임없이 말했다.“저 꼭 잡아요.”“절대 놓으면 안 돼요.”하지만 끝내 차가운 강물 속에서 절망적인 익사감이 휘몰아쳤다…….그러다 눈을 떴을 때.가슴을 잡으며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권하윤은 그 시제로 겪은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그날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해 연속 이틀 동안 악몽이 되어 권하윤을 괴롭혔다.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직 혼미해 있는 공태준이 옷 위에 누워 있었고 권하윤은 그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그날 두 사람은 물살에 휩쓸려 이름 모를 황야로 떠내려갔다. 심지어 주위에는 겨우겨우 휴식할 수 있는 폐수 수질 측정소만 있었다.공태준은 다쳤는지 물에 빠졌는지 계속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에 반해
지친 나머지 권하윤은 다시 몸을 뒤에 기댔다.다리를 움직여 봤지만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쳤는지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하지만 한번 생사를 경험하고 나서 그런지 권하윤은 오히려 냉정해졌다.생사의 갈림길에 놓았을 때는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는데.확실히 목숨이 없어지면 다른 건 아무것도 의미가 없게 된다.그저 멍하니 기둥에 한참을 기대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모 위에 갑자기 옷 하나가 덮였다.이윽고 손등이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는데 그 따스한 촉감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도준 씨…….”부르고 나서 민도준의 체온은 이것과는 달리 조금 뜨겁다는 걸 인식한 권하윤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떴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공태준이 언제 깨어났는지 손등으로 권하윤의 체온을 체크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으면서 당황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몸에 열이 좀 남아 있어요.”권하윤은 공태준의 손을 물리치고 입을 뻐금거렸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이건 공태준을 마주하고도 처음으로 욕설을 퍼붓지 않은 거다.권하윤은 공태준이 미웠다. 하지만 공태준은 생사의 고비에서 권하윤을 구해줬다.때문에 한참 뒤 권하윤은 큰 숨을 들이키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구해줘서 고마워.”공태준의 눈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지금 감사 인사하기엔 이르지 않아요? 우리 아직 완전히 구조된 건 아니잖아요.”그 말에 권하윤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껏 공태준을 증오하는 데 더 익숙했던 지라 이 시각 둘 사이에 찾아온 평화에 권하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때.“콜록콜록…….”공태준이 고개를 돌려 답답한 듯 기침을 해댔다.그래도 공태준의 은혜를 입었으니 예의상 몇 마디 물어봐야 했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원한이 남이 있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공태준도 권하윤의 복잡한 심경을 간파했는지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이해해요. 제가 구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 하지만 이건 제가 윤
그 말에 아무런 흥미도 없던 권하윤의 심장이 확 쪼그라들었다.‘뭐든 대답해 주겠다고?’권하윤은 공은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버지가 왜 뛰어내렸는지, 공은채의 죽음이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그리고 민도준과 공은채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도…….확실히 공태준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단 한마디로 권하윤이 내기에서 이겨야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니.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이 말해주건대 공태준과 내기를 하면 지든 이기든 모두 그 꾀에 넘어가는 셈이 된다.때문에 권하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그럼 내가 지면?”“같아요. 제가 질문 하나 하면 윤이 씨가 답해요. 하지만 답하지 않아도 돼요.”권하윤은 공태준의 신사다운 이런 모습이 싫고 짜증 났다.“그럼 불공평하잖아.”순간 잡을 수 없는 작은 미소가 공태준의 입가에 피었다 사라졌다.“그냥 재미 삼아 하는 건데 불공평할 게 뭐 있어요?”어찌 됐든 밑지는 장사는 아닌지라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 몇 마디 대화 덕에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어둠은 빛을 뒤덮은 동시에 두 사람에게 고요함을 안겨주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공태준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민 사장 쪽 사람이 오면 따라갈 거예요?”“…….”권하윤은 공태준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감고 잠자는 척 연기했다.다행히 공태준도 계속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 물음은 권하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만약 민도준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여기를 찾아오면 따라가야 하나?감정만 따진다면 권하윤은 민도준이 좋다. 결혼하고 싶고 함께 오래 있고 싶다.하지만 결혼식 전날 밤 민도준이 했던 앞으로 자기만 봐야 한다는 말만 떠올리면 권하윤은 몸이 떨렸다.심지어 결혼식 당일에도 권하윤은 마치 감옥에 압송되어 가는 죄수 같았다.그런 무형의 감금은 아마 권하윤의 남은 인생 따라다닐 수 있다. 권하윤이 민도준과 함께 돌아간다면 앞으로 선택할 권리
공태준도 권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분명 무덤덤한 사람이지만 권하윤을 바라볼 때만큼은 감정이 밖으로 흘러나왔다.“만약 이 모든 일이 없었더라면 저를 좋아했을 수 있나요?”권하윤은 공태준의 질문이 당황했다.“이 모든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상관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좋아할 리가 있을까?”“그럼 만약이라면요?”공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황을 그려주었다.“만약 제가 마침 권하윤 씨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첫눈에 반했다면, 저를 좋아했을 수 있어요?”권하윤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공태준을 바라봤다.“공태준, 머리가 어떻게 됐어?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나와?”분명 혼났으면서도 권태준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내비쳤다.“말 같지 않은 건 아니죠.”어찌 됐든 그날 공태준은 정원에서 정말로 권하윤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아름다운 몸짓과 요염한 웃음, 춤이 끝나자 얼굴을 손에 파묻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백조 같았다.하지만 권하윤은 백조보다도 더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었다.권하윤은 공태준이 왜 갑자기 기뻐하는지 알 수 없었다.“당신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 해도 공씨 가문에서 권력도 없는 집안 자녀와 같이 있도록 허락했을까? 아마 진짜 그랬다면 내 꼴은 지금보다 더 비참했겠지.”공태준 얼굴에 흔치 않게 드리운 웃음기도 그 한마디에 점점 사라졌다. 오랜만에 느낀 진심 어린 기쁨도 다시 흩어져 버렸다.“하긴.”29살인 지금도 가문에서 원하는 대로 자아를 잃은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때문에 어떠한 가정에서도 공태준에게 주어진 행복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가주님? 권하윤 씨?”그때 소리가 점차 멀리에서 들려왔다.이남기는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이 아직 있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차 한 대를 빌렸는데 같이 마을로 가요.”차라고는 말했지만 밖에 나가보니 세 바퀴짜리 농업용 오토바이였다.이남기는 앞에서 운전하고 공태준과 권하윤은 뒤쪽
짤막한 한마디에 권하윤의 마음에 큰 파도가 일었다.‘공태준이 아니라면…… 도준 씨?’이제 막 이렇게 생각했는데 시선 속에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헬기 앞에서 담배를 문 채 세 사람이 있는 쪽을 빤히 쳐다봤다.분명 이 거리에서 민도준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권하윤은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 같은 으스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옆에 있는 큰 산도 조금 전처럼 무게감을 주지 않았고 엔진 소리도 갑자기 작아진 것 같았다.하지만 칸막이도 없는 차인지라, 짐칸에 앉아 있는 권하윤의 모습은 고스란히 민도준의 눈에 들어갔다.똑같이 위기를 느낀 이남기는 자기도 모르게 차를 후퇴했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뒤에 차 두 대가 멈춰 서며 퇴로를 막았다.그와 동시에 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만하지 그래?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귀에 익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오자 권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민도준의 얼굴이 시선 속에서 점점 또렷해지다가 턱밑에 난 검푸른 수염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겁이 덜컥 났다.민도준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권하윤은 경성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그렇다면 그저 죄명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된다.권하윤은 목을 움츠린 채 당장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민도준의 눈을 피했지만 그가 앞으로 내미는 손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내려와.”짤막한 한마디에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권하윤은 본능적으로 움직였지만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공태준이 먼저 막아 나섰다.“민 사장님, 우선 윤이 씨한테 같이 가겠는지 물어봐야 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민도준은 그제야 공태준을 발견한 것처럼 시선을 돌리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아, 공 가주님이 내 결혼식에서 내 사람을 데려갔다는 걸 깜빡할 뻔했군.”다음 순간 민도준은 공태준의 멱살을 꽉 잡아당겼다.“다른 사람 걱정하기 전에 오늘 내 손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하는 게 어때요? 공 가주님.”공태준은 목
최수인은 권하윤을 별장으로 데려다주고는 입구에서 한참을 아쉬워했다.“또 이렇게 이별해야 하다니. 윤이 씨도 이번 고비를 잘 넘기길 바랄게요. 정 안 되면 저한테 와요. 제가 민도준보다 더 예뻐해줄 테니까.”권하윤은 최수인이 일부러 농담한다는 걸 알았기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생각해 볼게요.”별장으로 돌아와 보니 이곳은 여전히 권하윤이 떠나던 날과 똑같았다.하지만 권하윤은 이미 뭔가 변해 있다는 걸 느꼈다.다리가 불편해 그런지 정원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짧은 거리도 걷기 힘들었다.그렇게 계단 앞까지 다가와 어떻게 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권하윤이 눈물범벅이 된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하윤아, 왜 이제야 왔어? 몸은 어때? 어디 다친 데 없어?”“괜찮아.”권하윤은 권희연을 잡고 물었다.“언니랑 로건 씨는 괜찮아?”그 물음에 권희연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우리는 아무 일 없어.”권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날 쓰러진 뒤 권희연이 민도준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했었다.“참, 그런데 언니가 여긴 웬일이야?”“그게…… 민 사장님이 나더러 와보라고 했어. 네 다리가 불편하다고 돌봐주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멍해지더니 코끝이 시큰거렸다.분명 이렇게 많은 잘못을 했지만 민도준은 매번 이렇게 권하윤을 모른 체 하지 않으니…….샤워를 마친 권하윤은 권희연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권하윤은 권희연을 돌려보냈다. 권희연은 더 남고 싶다고 했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이 돌아와 권희연을 곤란하게 할까 봐 돌아가라고 고집을 부렸다.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은 어두워졌다.몇 날 며칠을 고생하고 난 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권하윤은 마치 날아갈 것만 같았다.하지만 기분은 몸처럼 가볍지 않았다.그 자리에서 바로 따져 묻기보다 이렇게 사라져 버리니 권하윤은 오히려 더 조마조마했다.민도준이 올까 봐 두렵기도 하고 또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게다
민도준은 무서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권하윤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옆에 앉았다.“도망치는 게 재밌었어?”권하윤은 아래로 푹 숙였던 고개를 마구 저었다.그렇게 흔들다가 뭔가를 인식한 듯 고개를 쳐들고는 불쌍한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저 도망치지 않았어요. 그날 약 때문에 쓰러졌어요.”이윽고 권하윤은 그날 있은 일을 곧이곧대로 설명하고는 자아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저도 알아요. 이번 일은 제가 잘못했다는 거. 제가 얌전히 있기만 했어도 공태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잘못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권하윤은 창백한 얼굴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성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하.”갑자기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다음 순간 권하윤은 턱에 전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권하윤의 당황한 눈빛에 민도준은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결혼식 날 도망가는 건 예전에도 했었으니까.”권하윤은 민도준의 관대함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겁에 질린 채 다음 질문을 기다릴 뿐.그때 턱에 느껴지던 통증이 사라지더니 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빨개진 피부를 문질렀다. “무서웠지?”부드러워진 목소리에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렸다.“네?”민도준은 인내심 있게 다시 물었다.“강에 빠졌을 때, 무서웠지?”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물에 빠졌을 때 느꼈던 질식감이 다시 휘몰아쳤다.그때 물결치는 강물 속에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허우적대며 점점 가라앉았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웠어요. 정말 무서웠어요.”뒤늦게 밀려오는 서러움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품에 안겨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물도 차갑고 난 수영할 줄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 잡히고. 저 요즘 매일 매일 악몽 꿔요. 물에 빠져 아무리 소리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악
“왜 말이 없어?”커다란 손이 권하윤의 목덜미를 꽉 잡는 바람에 권하윤은 민도준의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민도준의 목소리는 표정과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헬기 소리 들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응? 왜 나한테 잡혔나 생각했어? 아니면 나한테 잡히면 공태준과 어떻게 해원으로 돌아갈지 걱정했어?”한마디 한마디 말은 권하윤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어 도망칠 수 없게 했다.모든 설명은 사실 앞에서 변명만 될 뿐이었다.말문이 막힌 권하윤의 모습은 마침 민도준의 눈에 들어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효과를 더해줬다.목덜미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 권하윤의 목을 더 꽉 조였다.“말해 봐. 왜 말 안 하지? 나는 미친 듯이 찾아다녔는데 공태준과 어떻게 도망칠지를 생각했어? 어디 말해 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몇 날 동안 쇠약해진 몸은 남자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 힘에 종잇장처럼 펄럭이다가 확 내팽개쳐졌다.가슴속에 쌓여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모두 흘러나왔는지 권하윤을 밀쳐내는 힘을 빼지 않은 터라 권하윤은 철퍼덕 넘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민도준은 여전히 침대 옆에 서서 권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그늘에 가려져 알 수 없는 빛을 비춰냈다.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권하윤은 다급히 손을 뻗어 민도준을 잡으려 했다.“잠깐만요.”하지만 제대로 잡지 못한 탓에 다급히 침대에서 내리느라 자기의 발이 다쳤다는 것도 잊어버렸다.“아-”권하윤이 눈을 감고 침대 아래에서 고통을 참고 있을 때 힘 있는 손이 권하윤을 들어 올려 다시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이윽고 귀찮은 듯 꾸짖었다.“다리도 다쳤으면서 왜 이래?”하지만 권하윤은 다른 걸 관계할 겨를도 없이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민도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제 말 좀 들어 봐요.”권하윤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를 악물었다.“제가 공태준과 같이 간 건 제가…… 제가 권하윤이 아니라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