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권희연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민시영도 함께.하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미리 짐작했기에 권하윤은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권희연은 들어오기 전부터 문밖을 지키고 있는 수맣은 경호원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홀로 외로이 앉아 있는 권하윤을 보자 미간에 근심이 더해졌다.갑자기 결혼식을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도 놀라운데 식장이 블랙썬인 것도 모자라 인질이라도 지키는 듯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다니.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결혼식이 아니었다.하지만 민시영이 곁에 있었기에 권희연도 뭐라 말하지는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권하윤의 팔을 잡았다.“하윤아, 너 괜찮아?”권하윤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언니는? 로건 씨와는 잘 돼가?”로건을 언급하자 근심이 서려 있던 권희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더니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민시영도 사이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언변이 뛰어난 데다 활발한 성격 덕에 대화는 어색해질 리 없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와 권희연에게 이제 가봐야 한다고 말을 전하는 바람에 권희연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대화도 나누지 못하게 통제하는 건 마치 감시를 받는 것 같았으니.이에 권희연은 결국 다른 걸 관계할 겨를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윤아,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랑 민 사장님…….”“희연 언니.”권하윤은 권희연의 손을 꼭 잡으며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꼬집으며 미소 지었다.“나 괜찮아. 밖에서 기다려. 이따 결혼식 시작하면 봐.”“그래.”권희연은 그제야 권하윤의 손을 놓았다.권희연이 나가자 민시영은 재밌는 얘기를 꺼내며 권하윤을 웃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권하윤의 기분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그저 권희연이 소식을 밖으로 전해줄 수 있는지만 걱정했다.민시영도 권하윤이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아챘는지 눈치껏 자리를 피해 권하윤에게
신부 대기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잇따라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권하윤 씨,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2층으로 가시죠.”“알겠어요.”권하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드레스가 너무 크고 무거운 탓에 살짝 버거워 보이자 은찬이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이윽고 훤히 드러난 권하윤의 어깨를 보고는 코트 하나를 챙겨 권하윤에게 걸쳐주었다.“조심해요.”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권하윤은 혼자서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했다. 심지어 길게 늘어진 드레스 끝자락 때문에 사람이 발 디딜 공간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이에 경호원이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권하윤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탔다가 제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어떡해요? 다음 차례를 기다려요.”권하윤의 말에 경호원들이 난감한 듯 머뭇거렸고 그걸 눈치챈 은찬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을 보태며 겁을 주었다.“이거 절대 작은 일 아니에요.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민 사장님이 댁들 가죽을 벗길 수도 있다고요.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곧 올라올 테니 그거 타고 내려와요. 제가 먼저 하윤 씨와 함께 내려갈 테니까.”몇 초 차이 나지 않는 데다 별로 멀리 떨어진 거리도 아닌 옆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기에 경호원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 덕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권하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봤다. 이 시각, 엘리베이터에는 권하윤과 은찬이 둘뿐이었다.하지만 은찬이 옆에 있든 말든 권하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공태준이 자기 말대로 5층에서 기다릴지에 관한 생각뿐이었으니.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권하윤은 권희연에게 준 쪽지에는 그저 [공태준한테 5층에서 만나자고 전해줘요]라는 한마디밖에 적지 않았었다.목적은 민도준이 지금 자기를 의심한다는 걸 공태준에게 알려주어 민도준이 자기 가족을 찾지 못하게 부탁하기 위해서다.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결혼식이 끝난 뒤 권하윤은 별장에 갇힌 채 외부와 단절될 테니까.은찬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권하윤은 5
“민 사장님, 공 가주님은 이미 가셨습니다…….”“당장 쫓아.”“네.”최수인은 더 이상 농담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람을 불러 은찬을 깨웠다.그로부터 몇 분 뒤, 겨우 눈을 뜬 은찬은 민도준과 바닥에 놓인 웨딩드레스를 보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민 사장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최수인은 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얼른 손을 저으며 끼어들었다.“쓸데없는 얘긴 그만하고, 우리 예쁜 윤이 씨가 어떻게 실종됐는지나 말해.”그제야 은찬은 울상이 되어 모든 사실을 토로했다. 게다가 경호원들이 말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그때 라이터를 빙빙 돌리던 민도준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스스로 떠난 거야? 아니면 공태준이 협박했어?”“그게…… 스스로 떠났습니다.”은찬은 자책하며 울먹였다.“권하윤 씨가 저더러 외투를 가져다 달라고 할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물론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이 내려갈 때 외투를 챙겼다는 것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설명했기에 현장 분위기는 한층 더 다운되었다.“오늘 누구랑 만났었지?”어둡고 무거운 민도준의 목소리에 은찬은 로건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말을 내뱉었다.“시영 아가씨 외에…… 권희연 씨밖에 없습니다.”그 시각, 권희연은 2층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공태준이 떠난 후부터 권희연은 긴장을 한 시도 늦출 수 없었다.더욱이 권하윤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자 권희연은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에 연신 문 쪽을 힐끗거렸다.그리고 그때.“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발에 걷어차이며 활짝 열렸다.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남자를 본 순간 권희연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포악한 기운에 주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그걸 로건도 느꼈는지 민도준이 권희연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얼른 앞에 막아섰다.“민 사장님…….”“네가 내 곁에서 고생한 세월도 있
그 시각, 차 안.운전석에 앉은 민도준은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최수인이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아직 출발하지 않은 민도준의 차를 보자 얼른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공태준이 리조트로 가고 있다는 거 알아냈잖아. 그런데 왜 따라잡지 않아?”그 말에 민도준이 최수인을 힐끗 바라봤다.“내가 조사하지 않으면 이런 함정을 파느라 수고한 공태준의 노력을 저버리는 거잖아.”그러던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최수인은 귀를 세우고 민도준과 전화 건너편 사람의 대화를 엿듣다가 대충 전용기와 항로라는 단어를 어렴풋이 들었다.그제야 최수인은 차가 리조트로 향하고 있다는 건 그저 함정이라는 걸 알아챘다.경성은 민도준의 구역이나 마찬가지기에 공태준이 권하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지 않은 이상 민도준이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때문에 경성 바닥을 빨리 뜨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그렇기에 민도준이 전용기를 막는 건 그 근원을 잘라버리는 거나 다름없다.‘쯧쯧, 역시 대단해. 고단수야!’그렇게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전화를 끊은 민도준이 핸드폰을 뒤로 던져버리고는 엑셀을 밟아버리는 바람에 최수인은 앞에 코를 박고 말았다.그 시각,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던 차가 한번 흔들리는 바람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순간 정신을 번쩍 차렸다.권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웬 남자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심지어 그 남자는 권하윤의 머리 뒤에 손을 받쳐 권하윤이 더 편히 잘 수 있게 도와주었다.어렵사리 정신을 차리며 일어난 순간 공태준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머리 아파요? 물 마실래요?”약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그런지 권하윤은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부축하려고 내민 공태준의 손을 고민도 없이 뿌리쳐 버렸다.정신이 아무리 흐릿하다고 해도 권하윤의 눈에 드리운 혐오감은 선명하기만 했다.“공태준, 당신 참 역겨워.”공태준은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미안해요. 난 그저 윤이 씨에게 보
“제 약속은 변함없어요.”공태준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제가 윤이 씨 가족을 해원으로 모셔 온 건 해원에 있으면 제가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민 사장님도 이미 조사하기 시작했으니 윤이 씨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예요. 해외에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윤이 씨도 가족이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잖아요. 안 그래요?”공태준의 말은 겉보기에는 권하윤을 위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권하윤에게 한 층 또 한 층의 족쇠를 채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인지 공태준의 말이 끝날 때 권하윤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데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출구를 찾으려는 것처럼 가슴 속에서 날뛰었지만 권하윤은 진정을 되찾으려고 자기를 강요했다. 이럴 때 공태준한테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은 권하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공태준을 바라봤다.“그다음엔? 우리 가족이 해원에서 계속 당신한테 의존하면서 살라고? 그러면 내가 무슨 대가를 지불하면 되지?”“윤이 씨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공태준의 목소리와 눈빛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약속할게요. 윤이 씨 가족은 앞으로 원래대로 생활할 수 있을 거예요. 나한테 시간을 줘요.”하지만 공태준이 평온할수록 권하윤은 미칠 것만 같았다.이 모든 건 분명 공씨 가문 때문에 벌어졌는데 다시 원래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감사해야 할 판이니.공태준은 권하윤의 그런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듯 낮은 소리로 말을 보탰다.“이건 내가 윤이 씨한테 빚진 거니까 앞으로 천천히 보상할 기회를 줘요. 네?”그 말을 듣는 순간 냉소밖에 나오지 않았다.“나한테 거절할 선택지가 있긴 한가?”공태준이 권하윤의 모든 퇴로를 말아버린 탓에 권하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결국 긴 한숨을 내쉰 권하윤은 말머리를 틀었다.“은찬은 당신과 무슨 사이이지?”“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아무 사이도 아닌데 도와준다고
뒤에서 누군가 따라온다는 소리에 권하윤은 가장 먼저 민도준을 생각했다.하지만 차를 보는 순간 실망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그 차는 민도준의 차가 아니라 이리저리 부딪히며 달려오는 작은 트럭이었으니까.‘아니야. 그래도 만약 도준 씨가 보낸 차일 수도 있잖아?’그래도 만일의 가능성도 생각하며 속으로 기도했지만 그다음 순간 권하윤의 환상은 파멸하고 말았다.뒤따르던 트럭은 그대로 돌진해 권하윤이 탄 차를 부딪쳤다.다행히 이남기가 엑셀을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세게 꺾어 피해버렸지만 그 차주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부딪쳐 왔다.그렇게 권하윤이 탄 차가 도로 가장자리까지 몰리는가 싶더니 차는 어느새 큰 강 위에 놓인 다리에 도착했다.그 순간까지도 트럭은 떨어져 나가지 않고 계속 차를 옆으로 밀어붙였다.그리고 잇따라 귀에 거슬리는 경적 소리가 다리 위에 울려 퍼졌다.…….차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자 최수인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더니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앞에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러지?”하지만 민도준에게 완전히 무시당하자 최수인은 아예 차창을 내려 앞에 있는 차주한테 수소문했다.“저기요, 말씀 좀 여쭙시다. 앞에 차들이 왜 움직이지 않죠?”그 차주도 할 일이 딱히 없었는지 아예 최수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아유, 말도 마요. 앞에 웬 차가 강에 떨어져서 지금 구조하느라 난리도 아니에요.”“네?”최수인이 더 상세히 캐물으려는 찰나 옆에 있던 차 문이 열렸다.“도준아. 너 어디 가?”민도준의 뒤를 따라 다려 나온 최수인은 길가에 설치된 폴리스 라인과 구경하느라 몰려든 인파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사고가 난 차는 마침 건져냈지만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그때 웬 사람이 한숨을 쉬며 입방정을 떨었다.“하유, 요즘 우기라서 수심이 깊어지고 물살도 세진 것 같던데 아래로 떠내려간 건 아닌가 몰라.”“아이고, 그렇다면, 쯧쯧…….”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민도준은 인파를 비집고 지
오후, 뜨거운 태양은 차가운 강물의 온도를 높여주지 못한 채 축축하게 얼굴에 달라붙었다.그 시각 최수인은 휙휙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빵 쪼가리를 질껑질껑 십고 있었다.그러다가 다른 하나를 민도준에게 쑥 내밀었다.“너도 좀 먹는 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 하나가 빵을 가져가 포장을 뜯더니 몇 입 만에 다 먹어 버렸다.최수인은 여전히 민도준에게 빵을 건네주던 동작 그대로 씩 웃었다.“난 또 네가 식사도 거를까 봐 어떻게 설득할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빨리 먹어버렸어? 내가 쓸데없는 생각 했나 보네.”그 말에 민도준은 최수인을 힐끗 째려봤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조금 꺼져들어간 느낌마저 있었지만 눈동자 안의 날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위험한 분위기가 맴돌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내가 사랑 때문에 목매는 애송이인 줄 알아?”날카롭게 귀에 꽂히는 한마디에 최수인은 하려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공태준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이미 막긴 했지만 언젠가 터질 것 같아. 공씨 가문에서 알게 되면 움직일 거 같은데.”공태준이 요즘 공씨 가문에서 한 행동은 이미 가문 어르신들의 불만을 샀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사태까지 벌어지면 그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하다.물론 희망이 묘연하다고는 하나 만약 권하윤이 살아 있다고 하면 함께 연루될 거고.때문에 요 며칠 그들은 소식을 봉쇄했다.하지만 이건 그저 일시적인 것뿐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공씨 가문도 당연히 알게 될 거다.“그럼 숨기지 마.”민도준은 담배를 입에 불고 바람을 막으며 불을 붙였다.“그냥 말해 줘. 경성에 오는 놈들은 하나도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고.”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피비린내가 서려 있어 흙냄새와 함께 섞여 스산한 분위기를 뿜어냈다.그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와 보고했다.“민 사장님, 사고를 낸 운전자 두 명을 잡았습니다.”최수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민도준을 힐끗거렸다.그랬더니 얇은 입꼬리가 한쪽으로 씩 휘어 올라가는
민씨 저택.두 운전기사가 실종된 순간부터 민승현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예감했다.이에 민승현은 바로 민씨 저택에 돌아와 몸을 숨겼다. 어찌 됐든 민씨 저택 안에서만큼은 민도준이 자기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 하고 말이다.때문에 민도준이 들이닥쳐 자기의 멱살을 잡아끌고 마당으로 가는 순간 민승현은 극도로 당황했다.“도준 형…… 민도준! 여기 본가 저택이야. 어떻게 이렇…… 아!”민승현은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마침 기척을 듣고 달려온 강수연은 이 모습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뭣들 하고 있어? 다 죽었어? 당장 막지 않고 뭐해?”강수연이 바락바락 소리치며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사용인들은 오히려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바닥에 뿌리 내리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평소의 민도준도 무서운데 지금의 민도준은 마치 갓 지옥에서 걸어 나온 저승사자 같았으니까. 아무리 주인의 명령이라도 목숨까지 걸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그때 누군가 민상철을 어렵사리 모셔 왔지만 그 사이 이미 맞을 대로 맞은 민승현은 피떡이 되어 숨이 거의 붙어 있었다.“민도준, 너 뭐 하는 거야? 민승현은 네 동생이야!”“저도 알아요.”민도준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건달 같은 모습을 보였다.“그래서요? 할아버지도 체험해 보고 싶어요? 좋아요. 노인은 공경하고 아이는 사랑하라고, 원하신다면 순서를 앞당겨 드리죠.”“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민상철은 미간을 팍 구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그럴 필요 뭐가 있어요?”민도준은 민승현의 위에 발을 올려놓고 꾹꾹 밟았다.“그래도 같은 성씨 달고 있는 걸 봐서 이 자식 목숨은 남겨 둘게요. 하지만 사람을 찾지 못하면 할아버지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이 자식도 함께 보내 드릴게요.”“너!”민상철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손으로 휠체어를 탁탁 내리쳤다.“너 미쳤어?”“네, 미쳤어요. 진작에 미쳤어요.”민도준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다들 가까이 오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