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던 민도준의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물론 어제 밤새도록 같이 침대에서 뒹굴었다지만 그때는 대타의 신분으로 그런 것이기에 정식으로 만났다고 할 수도 없었고 이 순간 다시 원래의 신분으로 그것도 옷을 입고 대면하는 것이니 긴장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낮에 본 영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권하윤은 이내 머리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지금 이런 생각 할 때 아니야.’자기에게 경고를 날리듯 중얼거리며 심호흡을 한 권하윤은 손을 들어 노크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뭐야? 이젠 나 만나기도 싫다는 건가?’‘에이 설마. 노크 소리만 듣고 내가 온 줄 알았다고?’권하윤은 순간 드는 안 좋은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만약 낮에 USB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벌써 몸을 돌려 떠나갔을 테지만 민도준이 공은채를 바라보던 시선을 떠올리자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더 큰 소리로 쾅쾅 문을 두드려 댔다.심지어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도준 씨…….”하지만 욱하는 마음은 민도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흩어져 버렸다.“왜 옷도 안 입고 있어요?”민도준은 허리에 타월을 두른 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권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건 하윤 씨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한테 옷 입을 시간은 줬어? 왜? 이젠 내 방문까지 부수려고?”한마디 뱉어낼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민도준의 몸에는 아직 욕실의 열기와 습기가 묻어 있었다. 더욱이 원체 높은 체온과 어우러져 압박해 오는 바람에 권하윤은 뒷걸음질 쳐대느라 민도준이 뭐라 말하는지 듣지도 못했다.민도준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토록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져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끝내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앞만 바라보던 권하윤의 시선은 자연스레 민도준의 가슴에 떨어졌다.잘빠진 근육에 물기가 촉촉이 남아 있는 걸 보자 순간 눈앞이 어질했다. 이윽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남자의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혀 저도 모르게 민용재가 그렇게 할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현재 민승현은 민도준을 처리하지 못해 안달 나 있으니 그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뛰쳐나와 증언할 거고 일이 그렇게 커지면 민상철은 아마 원하지 않는대도 가문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거다.그렇다면 평소면 몰라도 권력 다툼을 하는 이 시점에 민도준은 아예 후계자 선상에서 제외되는 건 물론 외부에까지 영향이 미칠 거다.생각하다 보니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다행히 그때 아무 말 안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놀랐어?”권하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제 존재가 도준 씨한테 폐를 끼칠까 봐요.”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웃더니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재밌네. 이제 하윤 씨 목숨은 걱정 안 되나 봐?”솔직히 그런 건 맞다.권하윤은 왠지 자기가 민도준이라는 남자한테 완전히 홀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순간까지 머릿속에 온통 민도준 생각뿐일 리 없을 테니.하지만 민도준은?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두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 또 침대에 몇 명이나 끌어들일지 모르는 일이었다.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저 걱정하는 사람도 없는데 죽든 말든 이제 상관없어요.”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민도준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권하윤을 향해 손을 저었다.“이리 와.”권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얼굴이 위로 들렸다.“이제 나한테까지 눈치 줘?”“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하윤의 표정은 여전히 뚱해 있었다. 심지어 고개를 저으며 민도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댔다.그 때문에 순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민도준은 권하윤의 턱을 홱 들어 올렸다.“조금 잘해줄까 하면 기어오르네.”그다지 사나운 말투는 아니었지만 권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졌다.순간 공은채한테는 이렇게 말하나 하
“왜요?”권하윤의 눈빛에 민도준은 미간을 찌푸렸고 눈에서 포악한 빛을 내뿜었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필요 없어.”권하윤의 얼굴은 일순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만약 민도준 부모님의 복수를 대신 해줄 수 있다면 그나마 보상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거절하다니.눈을 내리까는 순간 가슴도 가라앉았다.“알겠어요.”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에게 피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 듯 턱을 꽉 잡은 채 들어 올렸다.“민용재가 뭘 물어보든 사실대로 말해. 알았어?”“어떻게 그래요? 만약 그거로 도준 씨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그래도, 어떤 걸 말해도 되고 어떤 걸 말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권하윤은 자기의 말로 민도준이 또 위험에 빠질까 두려웠고 더욱이 민도준의 계획이 틀어질까 봐 두려웠다.자기의 존재가 민도준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걸 생각하니 권하윤은 죄책감이 들어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그 표정에 민도준은 할 수 없이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내 말 들어. 민용재 보통 사람 아니야. 하윤 씨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그러니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야 민용재가 하윤 씨한테 손대지 않을 거야. 알겠어?”지금 민씨 저택 내부는 겉보기에는 평온한 것 같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칠 위기다.더욱이 마지막 후계자 싸움에서 피를 보는 건 당연하고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도 당연하다.그런데 그런 풍랑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권하윤 같은 사람은 눈치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민도준의 말에서 이제 곧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게 된 권하윤은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도준 씨, 혹시 위험한 거 아니에요?”“뭐 그럴지도 모르지.”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권하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왜? 내가 죽으면 뭐, 같이 죽기라도 하려고?”진지하지 않은 말투였지만 권하윤의 가슴은 미어질 듯 아팠다.심지어 민도준의 옛사랑이든 새로운 사랑
민도준은 뒤로 넘어질 것처럼 젖힌 권하윤의 작은 머리를 받쳐 들고는 무심한 듯 대답하더니 잇따라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하윤 씨가 그렇게 불쌍한 척하는데 체면을 세워줘야 하지 않겠어?”“아니,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목욕하다가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고요…….”권하윤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졌다.하필 이 타이밍에 아팠다는 것도 솔직히 의심스럽긴 하겠지.하지만 민도준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권하윤의 고개를 꾹꾹 밀더니 장난기 섞인 말투로 속삭였다.“내가 씻겨 주지 않았다고 지금 탓하는 거야?”권하윤은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저 조심하지 않아…….”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민도준이 갑자기 권하윤을 밀어버리며 욕실로 들어갔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입고 나오더니 권하윤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밖으로 걸아 나가기 시작했다.권하윤은 떨어질까 봐 무의식적으로 다리로 민도준의 허리를 감싸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어디 가요?”“데려다주려고. 내가 보살펴 주지 않았다고 또 며칠 병나면 안 되잖아.”‘진짜 왔었나 보네.’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온몸이 찌릿해 났다.그런데 아직 밤도 아닌데 이런 자세로 민도준의 품에 안긴 채 나간다면 사람들이 그야말로 대 충격에 휩싸일 걸 생각하자 권하윤은 정신을 차린 듯 버둥대기 시작했다.“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내려 줘요.”하지만 버둥대기 바쁘게 민도준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내리쳤다.“계속 움직이면 사람들 앞에서 다른 거 할 수 있어.”권하윤이 순간 얼어붙자 민도준은 손으로 권하윤의 엉덩이를 가볍게 문질러댔다.“착하지.”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찬은 두 사람이 나오는 걸 보자 1초도 지체하지 않고 길을 내주며 문까지 열어주었다.그 순간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민도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어떡해, 쪽팔려서 이제 다른 사람들 얼굴 어떻게 봐.”몸을 한껏 움츠린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선심 쓰
강수연은 민도준의 포악한 눈빛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시각, 권하윤 역시 민도준 눈에 드리운 살기와 목덜미에 툭 튀어나온 핏줄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민도준의 가슴을 살살 긁었다.지금 같은 다사다난한 시기 강수연에게 뭔 짓을 했다간 강씨 가문을 상대하는 것도 골치아플게 뻔하기에 권하윤은 민도준이 말썽을 일으키는 걸 원치 않았다.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작은 손이 마침 눈에 들어온 순간 민도준은 눈을 살짝 들어 권하윤을 바라봤다. 이윽고 걱정 가득한 권하윤의 눈빛을 마주하자 그제야 들끓던 화가 조금이나마 사라졌다.품속의 여인을 살짝 주무르다가 눈꺼풀을 든 순간 다시 건들건들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이만합시다. 저도 우리 제수씨 재워야 해서요. 만약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 일찍 방에 들어오시던가요.”민도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수연한테서 빠득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심지어 민도준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갈 때 너무 빠르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앞에 넘어진 사람을 무시한 채 가로 지나며 긴 다리로 문을 닫아버렸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수연의 몸도 부르르 떨렸다.분노와 공포 그리고 울분의 감정이 뒤섞인 채 강수연은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그 시각, 복도 끝에서 지팡이를 짚고 있던 민승현이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난장판이 된 밖과는 달리 방안은 조용하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민도준은 권하윤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작은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갈 거예요?”베개 위에 누운 자세로 애타게 바라보는 권하윤의 눈빛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권하윤을 자기의 팔 사이에 가두었다.“그러면 뭘 더 원하는데?”광선이 민도준의 넓은 어깨에 가려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안전감이 들었다.이윽고 손을 뻗어 민도준의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저 재워준다면서요?”민도준은 손목시계를 힐끗
“네? 뭘 들었다고 그래요?”권하윤은 순간 뻣뻣하게 굳어 공태준한테서 USB를 받았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는 못하고 모르는 척 연기했다.잇따라 민도준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찔렸는지 이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저 이제 졸려요. 아 졸리다.”“일어나, 씻고 자.”민도준은 손을 들어 누에고치가 되어버린 권하윤을 툭툭 건드렸다.그 말에 엉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권하윤은 샤워하고 난 뒤 약을 챙겨 먹었다.그러고 나니 어느새 민도준이 떠날 시간이 되어버렸다.더 이상 민도준을 남겨둘 핑계를 찾을 수 없자 권하윤은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반짝거리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민도준을 훔쳐봤다.웃옷을 챙겨 입은 민도준은 마침 그 모습을 발견했다.훔쳐보는 모습이 들키자 권하윤은 재빠르게 고개를 다시 파묻으며 자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머리를 굴리는 새끼 여우가 따로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자는 척을 하던 권하윤은 방안에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침을 꼴깍 삼켰다.‘갔나?’의아한 마음에 눈을 슬쩍 뜬 순간, 권하윤은 눈앞에 있는 민도준의 모습에 놀라 “아”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놀랐잖아요.”이윽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권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찡그러진 미간을 펴주었다.“요즘 일이 많으니 얌전하게 있어. 알았지?”권하윤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민도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도준 씨도 조심해요.”“응, 갈게.”민도준이 떠나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그 순간 꽉 차 있던 마음마저 텅 비어버렸다.그날 밤, 권하윤은 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민도준이 했던 말과 민용재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심지어 울고불고 난리 치는 소리였다.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생각을 하기 바쁘게 쾅 하는 문소리가
권하윤을 본 순간 민상철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민상철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권하윤을 겨우 처리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강민정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너져 골치 아픈 거겠지.권하윤은 인사만 간단히 하고는 눈치껏 뒤로 슬쩍 물러나 강민정에게 무대를 넘겨주었다.하지만 웬걸? 강민정은 권하윤을 보자마자 이내 달려오더니 또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기 시작했다.“언니, 정말 미안해요. 절대 승현 오빠를 탓하지 마세요. 언니가 오빠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속상해하는 걸 보고 제가 위로해 줬을 뿐이에요. 언니도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 우리 사랑 축복해 줘요.”강민정이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 전가하는 걸 보자 권하윤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렇게 말할 거 없어요. 두 사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승현이 민정 씨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죠. 어찌 됐든, 약혼한 날 밤까지 두 사람이 만났잖아요. 그러니 저도 두 사람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권하윤의 말에 강민정은 표정이 굳더니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분노 섞인 호통 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다들 그만해!”“콜록콜록-”민상철은 버럭 소리 지르기 바쁘게 마치 당장 쓰러지기라도 할 듯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아침에 본채에 찾아와 민상철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민용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자 얼른 메이드를 불러 차를 올리도록 했다.“아버지, 손주며느리는 누가 됐든 상관없지만 아버지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그때 옆에 있던 강수연도 흐느끼며 끼어들었다.“아버님, 저도 이제 반백을 훨씬 넘은 나이인데 제발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승현이 몸도 이제 성치 않은데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현이도 아버님 손자잖아요. 이대로 저 아이 대가 끊기는 걸 지켜보실 건가요?”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권하윤은 민용재의 방법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이 아이의 등장에 민용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강수연과 민승현 스스로 파혼하게 한
본채를 나오기 바쁘게 아니나 다를까 권하윤은 남쪽 별채로 초대받았다.심지어 저택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권하윤은 민용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이미 약속을 지킨 것 같은데. 칩에 관한 소식은 알아냈나?”권하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민 사장님 손에 확실히 부모님이 남겨주신 칩이 있습니다.”말을 마친 권하윤은 눈에 띄지 않게 민용재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그러자 역시나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그나마 조금 느슨해졌다.“칩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또다시 직설적으로 던진 물음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이 설령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만 권하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민용재는 조 사장과 달리 민도준을 진짜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권하윤이 더 많은 사실을 흘릴수록 민도준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니 긴장될 수밖에.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흘러지났지만 권하윤은 끝내 민도준의 경고를 떠올리며 깊은숨을 들이켰다.“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블랙썬에 있는 것 같아요.”하지만 권하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물음이 뒤를 이었다.“민도준을 도와 그 칩을 개발하는 사람이 누구지?”그 질문을 듣는 순간 천진난만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진소혜의 자기한테 환하게 웃던 모습이 스쳐 지나가 권하윤은 애가 끓었다.‘이걸 진짜 말해도 되나? 말하면 소혜 씨가 위험해지는 건 아닌가?’수많은 생각이 정신을 괴롭혀 육체적으로 느껴졌던 고통보다 백배 괴로웠다.특히 자기의 말 한마디가 가져올 풍파를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했고 민용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소식을 알아보는지 모르다 보니 미칠 지경이었다.하지만 끝내 꽉 잡은 주먹을 스르르 펴면서 목구멍으로 어렵사리 한마디를 뱉어냈다.“블랙썬에서 민 사장님의 사촌 여동생을 본 적 있어요.”“진소혜?”민용재가 곧바로 진소혜의 이름을 뱉어내자 쪼그라들었던 폐에 겨우 공기가 흘러드는 느낌이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하지만 이대로 긴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