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식사가 끝날 때까지 민도준이 한마디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권하윤은 잔뜩 풀이 죽어 본채를 나섰다.게다가 어떻게 하면 민승현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억지로 부딪히는 건 절대 방법이 아니었다. 민상철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닐뿐더러 지금은 권하윤이 말을 잘 듣는 편이기도 하고 민도준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어느 정도 받아주고 있으니까.그런데 만약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민상철은 아마 권하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거다.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민용재가 내일이 되면 생각이 바뀔 거라던 말이 떠올랐다.‘설마 민승현이 오늘 이렇게 나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아니야. 도준 씨가 오늘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저도 모르는 사이에 민용재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느낌.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권하윤의 앞에 갑자기 메이드가 나타났다.“다섯째 작은 사모님.”넋을 놓고 있던 권하윤은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죠?”“남쪽 별채로 잠깐 와달라고 합니다.”‘민용재인가?’아니나 다를까 남쪽 별채에 도착하니 민용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고민은 끝났나? 이제라도 승현이와 결혼하려고 생각한다 해도 예전과는 상황이 다를 거야. 민씨 집안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수단과 방법이 아주 많거든. 하윤 씨가 다섯째 작은 사모님이 된다 해도 앞으로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거고. 게다가 승현이와 혼인신고를 하면 민도준과 결혼할 수 있는 가망은 아예 없어지는 거야. 하윤 씨의 가치가 사라지면 살길도 자연스레 사라질 거고.”민용재의 무서운 협박에도 권하윤의 생각은 딴 데 팔려 있었다.민용재가 어떻게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예상했는지? 게다가 자기를 이용해 민도준에게 뭘 하려 하는 건지?하지만 이런 걸 직접 묻는다고 해서 민용
야밤, 그림자 하나가 어둠을 틈타 죽원으로 숨어들었다.하지만 죽원 건물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민도준이 어느 방에 묵고 있는지 모른다는 걸 인지했다. 그도 그럴 게 전에 한 번도 죽원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다행히 죽원 내부 구조는 매원과 비슷한지라 안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렇게 찾은 방 앞에서 권하윤은 숨을 죽이고 소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설마 잠들었나?’작은 손을 문손잡이에 올려놓고 내리누르려는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이내 몸을 움직여 구석에 숨은 덕분에 쟁반을 들고 올라오는 메이드를 피할 수 있었다.메이드의 긴 머리는 녹덜미까지 풀어 헤쳐져 있었고 붉게 달아오른 양 볼과 예쁘장한 얼굴이 어울어지자 보는 사람의 눈마저 즐거웠다.‘하, 진짜 여자 복 많네.’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 시각, 방 안.민도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아래로 드리운 손목 라인과 감겨 있는 눈을 보니 잠이 든듯싶었다.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모습을 보게 된 메이드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민씨 저택에서 약 1년간 일해오면서 민도준을 본 횟수는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었지만 불과 몇 번 안 되는 만남이었음에도 뇌리에 박힌 사람이었으니까.물론 신분 차이가 크지만 꿈인들 못 꿀까?때문에 민도준의 시중을 들 의향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순간 메이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하루아침에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메이드는 딱 봐도 공들여 치장한 모습이었다. 딱 달라붙는 메이드복에 앞 단추를 가슴골까지 풀어 헤쳐 언뜻언뜻 보이는 볼륨은 그 어떤 남자가 봐도 마음이 흔들릴만했다.심지어 민도준의 마음을 얻으려고 머릿결마저 향수를 뿌렸다.민도준이 잠자고 있자 메이드의 배짱도 커졌는지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노ㅗㅎ자마자 떨리는 손을 뻗어 민도준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뭐 하는 거지?”나지막한 목소리에 메이드는
권하윤은 총총걸음으로 다시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방 앞에 다다르자 비스듬히 닫혀 있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이목구비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다가 일정한 속도로 부풀었다 줄어드는 민도준의 가슴을 확인하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제야 잔뜩 팽팽해졌던 긴장감이 풀리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전에 그런 사고가 벌어졌으니 이토록 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그나마 무사한 걸 확인하니 안심됐다.하지만 안도하며 떠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손목이 홱 방안으로 잡아당겨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침대에 내팽겨쳐졌다.“저…… 읍…….”소리를 낼 틈도 없이 입이 틀어막혔다. “소리는 왜 치고 그래? 정원에서부터 쫓아온 게 이런 거 바란 거 아니었어?”술에 젖어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곧바로 귓가에 흘러들었다.‘취했어.’그제야 궈하윤은 움직이지 않고 눈을 깜빡거렸다.‘뭐야? 정원에서부터 쫓아왔다니? 나를 그 여자로 보는 거야?’순간 대타의 대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했다.자조적인 웃음이 피어나더니 가슴이 쓰라리기 시작했다.입을 틀어막혀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눈앞이 눈물에 가려져 시선마저 흐려졌다.‘나인 줄 알면 아마 던져버리겠지?’손바닥의 열기는 순간 남자의 뜨거운 숨결로 대체됐지만 등이 침대 머리에 등이 닿는 바람에 뒤로 물러날 곳도 없었다.손아귀에 턱이 틀어 잡힌 채 사람을 갉아 먹는 듯한 입맞춤을 받아내야 했고 허리를 감싸는 힘에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참아야 했다.심지어 희롱 섞인 말투와 목소리에 정신마저 점차 채찍질 당하는 듯했다.“이 정도로 기분 좋아졌어? 키스 한 번에 이렇게 좋아하고, 남자 없이 어떻게 살아? 한밤중에 내 침대에 기어오른 것도 이러려고 그랬지? 응? 잘만 말하더니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어?”“…….”이 말들은 분명 그 메이드한테 한 말이겠지만 듣고 있는 권하윤의 입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몸을 버둥대려던
“아니요. 민 사장님은 그저 저더러 술만 따르라고 했어요…….”그 말에 민용재는 회전의자를 빙 돌리며 메이드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별로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보아하니 메이드한테 큰 기대를 걸지 않은 모양이었다.손을 휘휘 젓는 순간 메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방을 빠져나갔다.지금껏 민도준에게 접근하고 싶어 하는 여자는 단연코 적지 않다. 하지만 곁에 남은 사람은 공은채 외에 권하윤뿐이다.민상철의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는 지금,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민용재는 반드시 계획을 앞당겨야 했다.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권하윤을 꾀어내려고 이토록 힘든 짓을 할 리도 없다.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여자에게 있어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없을 거다.권하윤도 민도준이 자기에 대한 흥미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인식해야지만 민도준을 차지하려고 할 테니까.민용재는 누구나 급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람 마음을 이용한 거다.메이드가 나간 뒤 휠체어에 앉아 방 안으로 들어온 민재혁은 밍용재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렇게 몇 분이 지나서야 민용재는 민재혁을 발견했는지 눈길을 돌리더니 휠체어에 앉은 아들의 다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몸도 불편하면서 왜 나왔어?”“식사하시라고 말씀드리려고요.”“알았다.”원혜정은 음식에 별로 손도 대지 않고 메이드를 도와 음식을 나르는 데만 신경 썼다.그걸 보고 있던 민용재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만나 본 전문의는 뭐라고 하더냐?”원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민재혁을 힐끗 보더니 이미 담아 두었던 국을 그의 손 옆에 내려놓으며 민용재의 말에 대답했다.“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답니다.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쾅”테이블을 내리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치료할 필요가 없다니?”“내가 이미 의료진과 상의해 봤다. 여전히 지난번에 썼던 끊어진 뼈를 다시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자더구나.”끊
가늘고 쨍쨍한 목소리가 권하윤의 정신을 현실로 끌어냈고 이불이 빼앗긴 탓에 식은땀이 공기에 닿아 몸이 떨렸다.하지만 권하윤은 맥없는 팔을 들어 이불을 끄집어 당기며 여전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더 크게 소리 지르지 그러세요? 그 정도로 질러서 다른 사람이 듣겠어요?”“너!”강수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체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 붉게 달아오른 권하윤의 얼굴을 싸늘하게 쏘아보더니 몸을 홱 돌리며 떠나갔다.권하윤은 그제야 이불을 다시 목 끝까지 끄집어 덮으며 긴장을 늦췄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이 다시 당겨졌다.하지만 이번에는 강수연이 아닌 집안 상용인들이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권하윤도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강수연을 가장 오래 모신 조씨 아주머니. 조씨 아주머니는 강수연의 말이라면 뭐든 듣는 사람이기에 예전부터 권하윤을 못마땅하게 여긴 데다가 강수연의 명령을 받은지라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저희가 청소해야 해서 협조해 주세요!”사용인들은 권하윤이 덮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빼앗아 갔다. 심지어 바닥에 깔린 카펫까지 남겨두지 않고 말이다.만약 평소 같았으면 아무렴 괜찮았겠지만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지금, 근육이 시큰거리고 뼈마디가 아픈 데다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것 같아 권하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때문에 아래 층으로 내려가 이불을 찾는 것과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 선택지 중에서 권하윤은 후자를 선택했다.강수연이 일부러 자기를 골탕 먹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 내려가 덮을 것을 찾는다 할지라도 찾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잠깐 고민하는 사이 머리가 더 무거워져 권하윤은 침대 시트를 몸에 둘렀다.점심때는 그나마 버틸만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서늘한 바람이 창문으로 불어 들어와 권하윤은 끝내 잠에서 깨어났다.그러고 보니 점심때 사용인들이 통풍한다는 이유로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게 생각났다.‘역시 부잣집 며느리는 할 게 아니라니까. 시어머니면 모를까.’잠깐 생각해 보니 강수연 위에 민상철이 있던 게 생각나 권하윤은
‘설마 도준 씨?’‘에이, 아닐 거야. 도준 씨면 베개로 내 입과 코를 막아 숨통을 끊어놔도 모자랄 판인데 뭐 하러 약까지 먹여주겠어.’권하윤은 스멀스멀 피어나는 희망을 스스로 짓밟아 버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민도준 외에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눈꺼풀을 들어 상대를 보려 했지만 너무나 무거운 눈꺼풀은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겨우 가늘게 틈을 만들어 냈지만 천장의 등불 때문에 앞이 어지러워 눈물이 고였다.더욱이 언제 다시 돌아온지 모를 이불 덕에 다시 따뜻해져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그 때문에 침대 머리맡에 앉은 남자도, 복도에서 젖은 이불을 쓰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조씨 아주머니와 다른 사용인들도 보지 못했다.-다음날.권하윤이 깨어났을 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발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어젯밤의 기억들이 흐릿한 조각으로 머릿속에 파고들었다.그러던 그때.“깨어났어요?”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쯤 뜨고 있던 눈이 휘둥그레졌다.“도…… 지훈 씨?”민지훈은 죽 한 그릇을 들고 싱긋 웃었다.“네, 맞아요 저예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 아니죠?”머쓱한 나머지 권하윤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러다가 아무 일 없는 듯 주위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혼자 왔어요? 어젯밤 그 사람도 지훈 씨예요?”민지훈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네.”“왜 그랬어요?”“돈을 받았으니 일을 하는 거죠.”“혹시 또 도준 씨 돈 받았어요?”“에이, 저 그렇게 욕심 많은 사람 아니에요.”민지훈은 권하윤이 죽을 먹으려 하지 않자 잠시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하윤 씨를 도와주기로 하고 돈을 받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 끝까지 책임져야죠.”장난기 섞인 말투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A/S가 좋아야 단골손님이 생길 거 아니에요. 뭐 서비스 기한 늘리는 건 다른 얘기지만.”민지훈의 말에 권하윤의 마음은 순간 차갑게 식어 억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저 샤워 좀 하고 싶은데……
요 며칠 여러 가지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진 덕에 권하윤은 USB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하지만 다시 조용해진 지금, 눈앞에 노트북까지 있으니 USB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조심스럽게 가방 안에서 USB를 꺼내든 권하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이 순간 마치 열어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라도 열어보는 듯 긴장감이 배로 되었다.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보지 말아야 하는 게 맞았다.공태준 같은 알 수 없는 사람의 말에 또 놀아나 민도준과 모순이 격화된 것도 모자라 관계가 완전히 깨져버린 전적이 있으니.공태준은 늘 이랬다. 아무런 준비도하고 있지 않을 때 간단한 행동 혹은 말 몇 마디로 권하윤을 마구 흔들어 당황하게 만들고 했다.성은우를 내세워 권하윤이 민도준에게 버림받게 했으니 이번에는 이 USB 안의 내용으로 권하윤이 민도준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려는 게 뻔했다.이성을 유지한다면 내용을 확인하지 않는 게 맞다.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언제나 이성을 유지한다면 세상에 걱정거리도 없을 거다.더욱이 민도준이 권하윤의 대타까지 받아들였다는 걸 돌이켜보면 이제 권하윤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린 게 틀림없다.‘뭐, 확인하든 안 하든 크게 변할 것도 없지 않나?’순간 욱하는 마음에 권하윤은 USB를 노트북에 끼워 넣고 내용을 확인했다.클릭해 보니 안에 총 3개의 폴더가 들어 있었다.[사진], [동영상], [생일]사진과 동영상은 뭔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생일이라니 조금 의아했다.생일이라는 폴더를 클릭해 보니 안에 또 5개 폴더가 나뉘어져 있었다. 심지어 모두 날자 별로 분류되어 있었다.가장 최근의 날짜를 클릭해 보니 안에는 영상 하나가 들어있었다.영상 초반에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카메라 앵글이 휙 돌더니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빨리 감기를 누르자 공은채가 케이크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장면이 보였고 공은채가 앉은 의자 등받이 위에 올려진 뼈마디가 선명한 손을 따라 위로 올라가
액정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하지만 권하윤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생각은 해 봤나?”‘민용재잖아.’이미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말투에 권하윤은 민용재가 여자를 불러 민도준의 시중을 들게 한 목적을 단번에 파악했다.권하윤을 자극하고 싶었던 거겠지.민용재와 같은 사람들 눈에는 진정한 사랑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권하윤이 민승현을 버리고 민도준에게 매달린 건 그저 더 높은 지위를 얻고 싶어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다.그러니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거라고 확신했을 테고.권하윤도 민용재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생각했어요.”“그래야지.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거 잊지 마.”권하윤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민용재는 곧바로 남쪽 별채와 매원 사이의 정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문 앞에 있는 은찬을 불러왔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네?”은찬은 낯빛이 여전히 창백한 권하윤이 걱정되는 듯 훑어보았다.그 눈빛에 권하윤은 한참을 설득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변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은찬은 그저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쌩 달려 나갔다.그리고 잠시 뒤, 은찬은 휠체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위에는 담요와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그걸 보니 권하윤은 순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작 감기 걸린 거로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은찬은 씩 웃으며 휠체어를 권하윤의 앞으로 밀었다.“그래도 안 돼요. 저 이미 하윤 누나 제대로 보살피라는 계약서에 지장도 찍었는걸요. 만약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말하면서 은찬은 손날로 목을 베는 동작을 하며 눈을 까뒤집었다.그 순간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 덕분인지 불편하던 마음도 어느새 편해졌다.권하윤은 민지훈이 자기를 아무리 걱정한다고 해도 이런 일로 은찬에게 벌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게 그저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