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안 죽으면 안 돼요?”민도준이 장난치는 건지 진심인지 확실하지 않아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녀의 깜찍한 물음에 민도준은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왠지 모르게 서늘하고 섬뜩했다.“안돼. 아주 연기판 제대로 짰던데 그에 걸맞은 결말이 없으면 아쉽지 않겠어?”그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솔직히 민도준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벌써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연기라니요? 저 도준 씨한테 진심이에요. 이건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증명할 수 있다고요.”“하.”조롱 섞인 짤막한 웃음이 민도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고르기 싫으면 내가 대신 선택해 줄게. 기계톱이 괜찮을 거 같은데.”‘기계톱?’그 세 글자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고속으로 회전하는 톱니바퀴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너무 아플 거 같은데.”목을 한껏 움츠린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이런 상황에도 흥정한다 이거지?’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그는 이내 핸들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그러면 내가 직접 머리부터 잘라줄게. 아픈 거 못 느끼게.”물론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지만 권하윤은 그의 말에 농담이 섞여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저 겁주지 마요. 저 겁 많단 말이에요.”“걱정하지 마. 머리가 없으면 무서운 것도 못 느껴.”이윽고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도 부려봤지만 민도준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했다.“…….”하지만 그녀가 머리를 쥐어짜 내며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차체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아!”짤막한 비명이 목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기 바쁘게 검은색 차 한 대가 가드레일을 스치며 차를 향해 돌진했다.백미러로 확인해 보니 차 네다섯 때가 나란히 뒤에서 그들 차를 둘러쌌다.‘이거 설마…… 공아름 씨
권하윤은 순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하지만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힘껏 눌렀다.다음 순간 총알이 후방에서 비스듬히 날아들면서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를 관통했다.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그제야 뒤에 바싹 따라붙은 검은 차량을 발견했다.“도준 씨…….”“시끄럽게 굴지 마. 정신 분산되니까.”눈을 가늘게 뜬 채 경고하는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총성이 들린 뒤로 연달아 두 번째, 세 번째 총성이 들려왔다.권하윤이 절망에 빠져있을 그때,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꼭 쥔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하윤 언니! 제 목소리 들려요?”“들려요. 말해요.”권하윤은 다급히 핸즈프리 모드를 누르면서 대답했다.“위치추적 결과 500미터 정도 지나면 오른쪽에 낡은 도로가 나올 거예요.”그 시각, 차속은 거의 200에 치달았기에 500미터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칠 수도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곧바로 핸들을 틀어 수풀이 우거진 비포장도로로 빠졌다.순간 낮은 지면에 떨진 차량은 심하게 흔들렸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있던 권하윤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그들 뒤를 추격하던 차량은 민도준이 갑자기 방향을 틀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들이 한참 달리고 나서야 다시 추격하기 시작했다.비포장도로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울퉁불퉁할 뿐만 아니라 주위에 수풀이 자라나 시야를 막고 있었다.다행히 진소혜가 계속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기에 그나마 전진할 수 있었다.황혼 무렵의 석양은 마치 피바다가 된 것처럼 하늘을 뒤덮었고 서늘한 바람과 지평선 너머로 점차 떨어지는 태양이 차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겨우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차 한 대가 수풀 속에서 빠져나와 그들 차량으로 돌진했다.민도준이 핸들을 꺾으며 방향을 틀었지만 상대 차량은 그들과 부딪히려는 게 목적이 아닌 듯했다.눈 깜짝할 사이 조수석에
“이왕 아름이한테 약속했으니 죽으면 그만둬도 되지만 안 죽었다면 계속해.”“네.”비서는 남자의 안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경성에서 돌아온 애들 말로는 민 사장님이 권하윤이라는 여자한테 각별히 마음 쓰더랍니다. 만약 그 여자를 죽이면 민 사장님의 원한을 사지 않을까요?”“마음을 쓴다고? 민 사장한테 마음이 있기는 한가?”“그래도 직접 구하러 나타난 걸 보면 각별한 사이가 아닐까요?”“그건 민 사장이 설계한 판이야. 나랑 손잡은 척하면서 민씨 집안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수단. 그저 권하윤이라는 여자를 이용해 내가 자기한테 빚지게 만들려는 거였어. 그런데 각별한 사이는 무슨.”그의 말에 비서는 혀를 찼다.“그렇다면 권하윤 씨도 그저 이용만 당한 거군요. 참 불쌍하네요.”“그 여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민도준 옆에 붙어 있다는 건 분명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그 옆에 붙어있는 걸 봐서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네,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가주님 말씀을 듣다 보니 그 권하윤이라는 여자가 궁금해 나네요. 제가 따로 조사할까요?”궁금…….그가 한평생 궁금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이윽고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 곧 죽을 사람한테 쓸데없는 정력 낭비하지 마.”“네, 가주님.”-끝없는 어둠 속에서 권하윤은 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의 그녀는 아무 걱정 없는 영락 없는 소녀였고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제멋대로지만 귀여운 여동생도 함께 있었다.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그녀는 배우라는 바이올린 대신 춤을 좋아했다.하지만 아버지한테 말씀드리지 못해 오빠의 도움으로 남몰래 춤 학원에 다니곤 했었고 가끔 공연복이 옷장에서 삐져나올 때면 언제나 오빠가 그녀 대신 감춰주곤 했다.그리고 처음 공연하던 날,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공연을 앞두고 신발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마침 신발을 들고 나타난 아버지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신발을
권하윤의 물음에 민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하윤 씨, 제가 이번에 도준 오빠한테 완전히 놀아났어요.”민도준과 공씨 가문 가주 간의 두서없는 대화를 떠올리자 권하윤은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무슨 뜻이에요?”민시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공아름이 돌아가자마자 도준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었거든요. 그리고 저한테 계약서 하나 내밀면서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사인하게 하면 동림 부지를 민씨 가문에 넘기겠다고 했어요.”그 말에 권하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어떤 계약서였나요?”“상세한 건 말하기 곤란하지만 민씨 집안 사람들이 거의 도준 오빠를 위해 공짜로 일하는 거나 다름없는 계약이었어요.”민시영은 난처한 듯 말을 이었다.“저도 그 계약서를 보고 나서야 오빠가 처음부터 공씨 가문과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저 공씨 가문을 내세워 할아버지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 자기 입맛대로 하려 했었던 거였어요.”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민시영은 당연히 목숨을 바쳐서라도 민도준을 위해 일해야 했을 테니까.며칠을 바삐 움직이며 민도준과 함께 고도의 연기를 펼친 끗에 민상철은 겨우 동의했다.민시영의 눈 밑에 난 검푸른 다크써클만 보더라도 그녀가 요즘 밤낮으로 얼마나 바삐 보내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 어찌어찌해서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남에게 끌려다니는 생활을 하는 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민시영은 지난 며칠을 회상하더니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하윤 씨, 미안해요. 제가 판을 잘못 보는 바람에 하윤 씨 고생만 시켰네요.”자초지종을 들은 권하윤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그러니까…… 민도준 씨는 시영 언니의 야망을 처음부터 꿰뚫고 있었고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그런데도 그는 마치 총을 들고 있는 사냥꾼처럼 사냥감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걸 유유자적 지켜보다가 결국에는 이긴 사냥감을 자기의 개로 삼아 부려 먹고 있
“그게…….”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이 끼어들었다.“그래, 뭐. 벙어리도 벙어리만의 좋은 점이 있지, 거짓말을 안 하잖아. 안 그래?”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민도준의 야유를 듣자 권하윤도 순간 울컥했다.‘아무리 그래도 내가 대신 총도 막아줬는데. 공로로 쳐주지 않더라도 고생한 값은 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 보러 안 온 것도 모자라 모욕까지 한다고?’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그래요. 이제부터 저 말 못해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사람이 기회를 잡자마자 다시 꼬리를 치켜자 민도준의 눈가에 순간 의미 모를 웃음이 걸렸다.그는 이내 그녀 곁에 앉아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돌렸다.“벙어리라면서 어떻게 말하지?”턱이 으스러질 듯 전해지는 고통에 권하윤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래, 벙어리라고 했지? 그러면 혀도 필요 없겠네? 그냥 떼어서 나 주는 게 어때?”그제야 권하윤은 파르르 떨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환자한테 겁이나 주고…….”“그러네.”민도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끝내 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 손은 멈추지 않고 목덜미를 스치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손끝이 지나친 단추 사이로 보이는 흰 붕대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환자복 단추 두 개를 풀어헤쳤다.이에 놀란 권하윤은 곧바로 가슴을 감쌌다.“뭐 하는 거예요?”겁탈이라도 당할까 봐 잔뜩 겁먹은 듯한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연히 상처가 어떤지 확인하려는 거지. 무슨 생각 한 거야?”“아.”자기가 너무 호들갑 떨었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약간 머쓱한 듯 손을 내렸다.하지만 그녀가 자기의 행동을 한창 반성하고 있을 때 민도준이 느긋하게 한마디 보탰다.“상처를 다 보고 나서 다른 거 하고 싶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아니요. 전 며칠이라도 더 살고 싶어요.”물론 민도준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권하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말할
물론 살코기 한 점 얻어먹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제물로 바쳤다지만 권하윤이 민도준과 민시영 중에서 민시영을 선택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이렇게 명백하게 배신을 했으니 그녀가 민도준 대신 총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미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를 거다.그 사실을 알고 있는 권하윤은 간신히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제 말 좀 들어봐요.”“응.”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듣고 있어.”하지만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그 손은 방향을 바꾸어 그녀의 가는 목을 움켜쥐었다.그에 반해 당사자는 오히려 남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지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미리 충고하는데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난 나한테 배신 때린 놈한테 인내심이 없거든.”마지막 말 한마디에 권하윤은 하려던 거짓말을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이윽고 민도준이 공씨 가문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일들을 벌일 필요도 없었을 거라는 후회가 치밀어올랐다.하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민시영이 아니었다면 문태훈과 거래했었던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거짓은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진실은 말하면 안 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권하윤은 한참의 고민 끝에 반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이윽고 그녀는 민시영한테 관계를 들킨 일부터 민도준의 일시적인 흥미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민시영을 도와주는 대가로 빚을 지게 만들려고 했다는 걸 털어놓았다.심지어 그가 자기에게 흥미를 잃어도 앞으로 민시영의 도움으로 민씨 가문에서 버티려고 했다는 목적까지.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민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미안해요. 제가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저 용서 해주면 안 돼요?”물론 이 정도 변명은 똑똑하고 현명한 민시영마저 속여넘길 정도였지만 민도준과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너무나도 많은 걸 느낀 터라 권하윤은 여전히 불안했다.하지만 그는 믿는다 믿지 않는다는
“음?”민도준의 눈꼬리에는 약간의 흥미가 번졌다.“그러니까 정말로 나를 위해 죽으려 했다는 거야?”권하윤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만약 그녀가 맞다고 대답하면 민도준은 아마 지금 당장 다시 시연해 보라고 할 거고,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살 가능성조차 없을 테니까.민도준은 그녀에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 듯 두 팔로 침대를 짚은 채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그래?”“그게, 저, 저는 도준 씨한테 진심이에요. 도준 씨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권하윤은 그의 눈을 피하며 직접적인 대답마저 피했다.그런 그녀를 민도준은 몇 초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이윽고 “그래”라는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권하윤은 그의 동작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채 그를 바라봤다. 뒤로 젖힌 머리 때문에 훤히 드러난 가는 목덜미가 약간의 가련한 기색을 띠었다.하지만 그녀를 내려보던 민도준은 지금껏 보여왔던 장난기 섞인 눈빛을 거둔 채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권하윤은 갑자기 당황했다. 마치 그가 이렇게 떠나가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한 느낌마저 들었다.이윽고 그가 문을 열려고 할 때 불안함이 극에 달한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러세웠다.“도준 씨…….”문손잡이를 돌리던 손이 멈칫하기도 잠시 곧바로 미련 없이 문을 열었다.“잠깐만요.”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권하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잠깐만요.”복도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도 민도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긴 다리를 내디뎠다. 하지만 미련 없이 떠나던 발걸음도 권하윤의 비명에 우뚝 멈춰 섰다.너무 급하게 나온 나머지 신발도 신지 않은 권하윤은 맨발로 대리석 바닥을 밟고 있었다. 심지어 널찍한 환자복 때문에 더욱 가냘프게 보이는 것도 모자라 상처가 벌어졌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허리를 굽힌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권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시선이 반 바퀴 빙 돌아 천장으로 향했다.“도준 씨? 왜…… 왜 갑자기…….”그녀는 믿기지 않는 득 고개를 든 채 민도준을 빤히 바라봤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무시한 채 병실에서 나오는 간병인에게 말했다.“의사 좀 불러 줘요.”“네.”이윽고 권하윤을 고스란히 침대에 내려놓더니 움직이려 하는 그녀를 누르면서 한 번 째려봤다.“죽고 싶어?”그의 한마디에 권하윤 입을 꾹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의사가 들어왔고 간병인이 그녀의 옷을 벗기는 순간 권하윤은 그제야 옷이 피에 흥건히 젖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조금 전 너무 급하게 달려 상처가 벌어진 듯했다.권하윤은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설마 이걸 보고 돌아왔나?’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흘러들었다. 홀가분해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무거웠고 시원하면서 짜릿했다.여의사는 붕대를 풀기 전 민도준을 힐끗 살피더니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할 수 없이 동작을 이어갔다.다행히 당처가 덧난 건 아니라서 의사는 권하윤의 상처를 간단히 소독하고는 새 붕대로 상처를 싸맸다. 격렬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의사는 떠나갔고 눈치 있는 간병인도 약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병실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모든 의료진이 빠져나가자 병실 안 공기는 또다시 조용해졌다.무거운 공기에 당황한 권하윤은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도준을 몰래 곁눈질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하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뭐라도 말해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순간 민도준이 담배를 눌러 끄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이에 침대에 앉아 있던 권하윤은 다시 잔뜩 얼어붙은 채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였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은 담배 냄새가 잔뜩 묻은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자기의 눈을 피하느라 애쓰는 권하윤의 표정에 피식 웃었다.“불쌍한 척하는 연기에도 넘어가 줬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면 어쩌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