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린 공아름은 예쁜 눈을 부릅뜨며 주상현을 쏘아보았다.하지만 그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민도준이 계속 지켜보고 있어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그, 민 사장님께서 산 사냥감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낚시하러 왔습니다.”공아름은 속으로 일을 그르친 주상현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그를 한 번 노려본 뒤에야 민도준에게 눈길을 돌렸다.민도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독기 서린 눈빛은 이내 원망으로 변했다.“민도준 씨가 사격보다 낚시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요. 설마…….”공아름은 권하윤 쪽을 힐끗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각 그들과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권하윤과 민지훈은 민도준이 왔다는 걸 보지 못한 채 여전히 연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그때 공아름의 질투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여기에 도준 씨가 보고 싶은 풍경이 있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ㅈ죠?”“맞아요.”민도준은 한 치의 만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든 게 하찮다는 듯 흘겨보던 그의 눈빛이 끝내 공아름에게 떨어졌다.곧이어 그의 잇새 사이로 낮고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일부러 공아름 씨 찾아온 거예요.”“저를요?”언제 화를 냈냐는 듯 고아름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의 말을 다시 곱씹은 순간 말 못 할 기쁨이 마음속에 퍼졌다.하지만 가문의 고위 간부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그녀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며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부러움과 놀라움이 담긴 여직원들의 눈빛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저는 뭐 하러 찾아왔어요?”“아, 별일은 아니고. 지난번에 너무 인정사정없이 거절했던 것 같아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위로해 주러 온 거예요.”민도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자기한테 들이대다가 대차게 차였던 일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공아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어릴 때부터 이런 모욕을 당한 적
공아름은 이미 떠났지만 현장에 널리고 널린 게 공씨 가문 직원들이기에 만약 그들이 의심을 하고 공아름에게 보고라도 할 시엔 그녀는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역시나 직원들이 민도준 쪽으로 하나둘 다가오는 걸 보자 권하윤은 내색하지 않으며 민도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전 대충 다 배운 것 같으니 저쪽에서 따로 낚시하고 있을게요.”하지만 그녀가 고작 한 발짝 움직였을 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제수씨 이렇게 빨리 배웠어? 정말 타고났나 보네?”그가 일부러 장난치고 있다는 걸 보아낸 권하윤은 이를 악물었지만 일부러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과찬입니다. 그럼 전 이만…….”“제수씨가 이미 다 배웠다니 잘 됐네. 나 가르쳐 주는 게 어때?”살짝 올라간 끝 음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눈빛이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 떨어졌다.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누구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이가 좋다고만 여겼다.유독 주상현만 두 사람을 몇 번 더 보더니 생각에 잠긴 듯했다.권하윤이 곤란한 모습으로 민도준에게 낚싯대를 건네주던 그때 민지훈이 나섰다.“하윤 씨도 그냥 여기 있어요. 여기 이렇게 넓잖아요. 하윤 씨처럼 가녀린 사람이 공간을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한다고. 게다가 저와 도준 형도 여기 있는데 하윤 씨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걸 만약 승현이가 알아봐요, 우리가 하윤 씨 괴롭힌 줄 알면 어떡해요?”눈을 깜빡이며 암시를 하는 민지훈의 행동에 권하윤은 그제야 알아챘다.같은 집안사람인데 권하윤 혼자만 자리를 피하는 건 오히려 다른 사람 눈에 더 이상하게 비칠 뿐인 데다 지나치게 피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이게 다 민도준 이 남자 때문이야. 나를 놀려대는 바람에 이성적인 판단도 못 할 뻔했네.’그제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권하윤은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괴롭히다니요. 승현이가 아무리 저를 아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트집 잡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저 계속 여기에 남을게요.”민승현을 입에 담자 그녀에게 떨어졌던 이상한
민지훈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얼른 거절했다.“아니에요. 제가 할게요.”“지훈아, 제수씨가 하고 싶다는데 해보라고 해. 쪼잔하게 굴지 말고.”‘쪼잔?’그 말을 들은 순간 참을성 많은 민지훈마저 하마터면 표정을 숨기지 못 할뻔했다.하지만 이내 미소를 장착한 그는 권하윤에게 낚싯대를 건네며 하라는 손짓을 했다.권하윤의 실력은 민지훈에 비하면 코웃음이 날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눈은 즐거웠다.낚싯줄이 수면에 떨어져 잔물결을 일으킬 때마다 따라서 흔들거리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보자 민도준의 가슴은 저도모르게 간질거렸다.하지만 그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미를 찾으려던 그때 무릎 위에 중력이 가해졌다.“아!”애교 섞인 짧은 비명과 함께 여직원 하나가 그의 무릎 위에서 다급히 일어섰다.“죄송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만. 절대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그 여자는 아까 민도준에게 낚시를 권했던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적잖게 당황했는지 나른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몸을 마구 움직이며 민도준의 다리를 문질러댔다.“죄송합니다, 민 사장님.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겨우 몸을 일으킨 그녀는 말하는 동시에 민도준의 눈치를 살폈다.하지만 민도준은 고개를 움직이며 싸늘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이렇게 저급한 수작을 부린다고? 살아있는 사냥감은 이거로 할까 보다.’한편 모든 과정을 지켜본 권하윤은 배짱이 두둑한 여직원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침묵이 길어질수록 여직원의 마음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이 직원분 보면 볼수록 하윤 씨랑 닮았네.”그때 갑자기 침묵을 깨는 민지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그 말에 잠시 멈칫하던 민도준의 눈가에 장난기가 더해졌다.“그래? 어디 봐봐.”그는 여직원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권하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제수씨 이리 와봐. 진짜 비슷한지 비교해 보게.”‘비교는 개뿔!’권하윤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민도준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다가갔다.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떨
발효된 위스키는 짙은 알코올 냄새를 풍겼고 유리 벽에서 미끄러지며 흘러내리는 액체마저 매력적인 색채를 띠었다.그러던 그때, 술잔을 채운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몇 번 흔들던 민도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 술 도수가 꽤 높아 보이는데 취하면 어떡하죠?”“방은 이미 준비해 드렸습니다. 단독 별장으로 준비했으니 방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아하, 그럼 방안에 사람도 이미 준비해 뒀나요?”그 말을 들은 주상현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설마 방에 아름 아가씨가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농담이에요.”민도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상현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술부터 권하면 위 망가지는데.”“네네, 당연히 식사 후에 드셔야죠.”주상현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더 이상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 곁에도 위스키가 한 잔씩 놓여 있었지만 민도준 곁에 놓인 것보다는 많이 저렴한 거였다.그러던 그때, 주다현이 술을 살짝 맛보더니 혀를 내밀며 민도준의 어깨에 기댔다.“너무 매워요.”“매우면 적게 마셔.”기복이 없는 그의 말투는 그나마 조금 걱정이 묻어있어 보였다. 그 때문에 주다현의 심장은 더욱 콩닥콩닥 뛰었다.그녀는 민도준에게 음식을 짚어 주며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비위 맞추기가 어렵다는 소문만 무성하더니. 민 사장님도 품에 안겨 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못하는 건 보통 남자랑 똑같네.’그녀는 당장이라도 민도준 무릎에 앉을 기세로 딱 붙은 채로 그에게 음식을 짚어 주었다. 그 모습에 권하윤도 게 다리 하나를 집에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하지만 한창 열심히 먹고 있던 그때 갑자기 무언가 다리를 슬쩍 스쳤다.권하윤은 게 다리를 씹고 있던 동작을 멈칫하더니 무의식적으로 맞은 쪽에 앉은 민지훈을 바라봤다.그녀의 갑작스러운 눈길에 의아했지만 민지훈은 그녀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쨍그랑”하는 맑은소리가 들려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민도준
권하윤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특히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욕조에 앉아있는지라 그 두려움은 배가 됐다.하지만 그녀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며 세면대 위에 올려둔 옷을 낚아채려 하는 순간 욕실의 문손잡이가 끼이익 돌아갔다.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다급히 욕조로 숨겼다. 하지만 너무 급한 동작 때문에 물보라가 일며 욕조 옆으로 물이 흘러나왔다.욕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모습을 보게 된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젠 다이빙도 해?”그는 천천히 욕조 쪽으로 다가가더니 안을 힐끗 훑어봤다.“가려봤자 가려지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애써?”“콜록콜록…….”고개를 들던 권하윤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투명한 물방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리다 떨어지면서 작은 물보라를 잃었고 물기에 촉촉하게 젖은 얼굴에는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다.“왜 도준 씨가 여기 있어요?”“내가 아니면?”민도준은 허리를 숙여 물을 손으로 휙 쓸어 일렁이고 있는 수면 위에 물보라를 더했다.“누구인 줄 알았는데? 지훈이?”“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지훈 아주버님이 제 방에 뭐 하러 들어오겠어요?”뜬금없는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모르지.”그러자 민도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 안에 있는 권하윤의 발목을 잡아 확 잡아당겼다.“아!”그 힘에 권하윤은 중심을 잃고 뒤로 젖혀지면서 물에 다시 빠졌다.만약 욕조 변두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마침 수면위에 멈춰 선 그녀의 입술 안으로 맑은 액체가 자꾸만 흘러들려고 애썼다. 매혹적인 입술이 숨결을 찾으려고 뻐금거리는 모습에 민도준의 눈빛은 일순 어두워지더니 허리를 굽힌 채 그녀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권하윤은 끝내 더해져 오는 민도준의 힘을 이기지 못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욕조는 크지
한 번의 소동이 끝나자 욕실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권하윤은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민도준은 여전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등에 입을 맞춰댔다.“그만 해요, 저 좀 휴식하게 해줘요. 지금 저 죽이려는 거예요?”권하윤은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원망스러운 듯 자기 허리에 두른 민도준의 손을 마구 끌어냈다.그러자 곧바로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럴 리가. 아껴도 모자랄 판에 죽이다니.”“이게 아끼는 거예요? 공아름 씨가 민도준 씨한테 일부러 약까지 탔는데 제 방으로 들어오면 저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요?”마구 버둥대는 권하윤의 모습을 보자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쌩쌩하네?”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권하윤은 방금전까지 팔딱거리더니 이내 얌전해졌다.“전 다 죽게 생겼는데 어쩜 그런 생각만 하세요?”충분히 만족한 민도준은 인내심이 생겼는지 그녀의 투덜거림에도 피식 웃으며 말랑한 얼굴을 살짝 꼬집어 댔다.“약을 탄 게 공아름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아니면요? 공아름 씨가 아니면 누가 도준 씨한테 감히 약을 타겠어요? 저는 도준 씨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미칠 지경인데 약 타는 건 상상도 못 하거든요.”괴상야릇한 말투로 투덜대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재밌는 듯 피식 웃더니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하윤 씨는 약 탈 필요가 없어. 나 한 번 부르기만 하면…… 거든.”일부러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인 말에 계속 투덜대려던 권하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난 또 도준 씨가 보기에도 여러 가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다현 씨를 찾아갈 줄 알았죠.”권하윤의 손을 주물럭거리던 민도준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 점점 올라가 깍지를 꼈다.“또 심술이야?”“그럴 리가요. 도준 씨가 그 여자 안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그의 말에 한참을 꼬물대던 권하윤은 그의 어깨에 기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남자의 가벼운 대답에 권하윤은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했다. 하지만 그
반 시간 전.섹시한 잠옷을 입은 채 마음을 졸이며 민도준을 기다리던 주다현은 초인종이 울리기 바쁘게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그리고 기대처럼 문 앞에 나타난 민도준을 보는 순간 그녀는 기쁜 나머지 몸을 배배 꼬며 어찌할 줄 몰랐다.민도준은 그녀가 예전에 만났던 다른 부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돈과 권력은 물론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혹적인 얼굴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게다가 경험이 많은 그녀는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민도준이 그 방면에서 얼마나 강한지를 한 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심장이 콩닥거렸다.이윽고 방안을 관광하는 듯 둘러보는 민도준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기까지 했다.“민 사장님, 오, 오늘 밤은 여기에서 지낼 건가요?”민도준은 그제야 주다현을 발견한 듯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오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던데 이리 와 봐. 다리 치료해 줄 테니까.”그 말을 야릇한 농담으로 받아들인 주다현은 몸을 배배 꼬며 민도준에게 다가갔다.“민 사장님…… 아!”하지만 그의 옆에 다다랐을 때 머리가 유리에 세게 부딪히더니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그 모든 과정을 들은 권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설마 모든 책임을 다현 씨한테 전가할 생각이에요?”“이게 책임 전가에 속하나?”민도준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씩 웃었다.“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결과도 감당해야지.”“다현 씨도 아마 도준 씨가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그랬겠죠.”권하윤은 혀를 차더니 참지 못하고 주다현을 위해 한마디 했다.“하. 내가 부처님도 아니고 왜 다른 사람을 보호해야 하지?”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 모습은 마치 권하윤과 처음 만났을 그때처럼 위험천만하고 통제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본 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했다. 물론 민도준이 지금은 그녀에게 흥미를 느껴 보호해 주고는 있다지만 어느 날 흥미가 깨지면 그녀의 결말은 아마 주다현보다는 몇 배 더 비참할 거다.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늦은 밤.단독 별장으로 돌아온 민도준은 역시나 그곳에서 공아름과 마주쳤다.바쁜 일로 리조트를 떠났다던 그녀는 민도준에게 배정된 별장의 거실에 앉아 밤을 새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미 충분히 즐기고 온 그는 무척 상쾌했는지 눈에는 지금까지 본 날카로움 대신 나른함만 남아 있었다.“도준 씨!”그가 자기를 무시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자 공아름은 그의 앞으로 달려가 막아섰다. “왜 그랬어요?”마음속에 담아뒀던 수많은 말들 대신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원망이 담긴 한마디였다.‘왜 나한테 이렇게 대해요?’분명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 그를 너무 사랑해서 먼 경성까지 쫓아와 마음을 내보이는 걸 알면서 민도준은 그녀를 무시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다.심지어 약 때문에 괴로우면서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 그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계단을 밟으려고 발을 들어 올리던 찰나 공아름의 말을 들은 민도준은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왜냐고요? 이유야 많죠. 그런데 말하기 귀찮으니 직접 생각해요.”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준 씨…… 민도준!”당장이라도 자지러질 정도로 내지른 고함은 어두운 밤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도 민도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그녀는 미친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쓸어버리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켜져 있는 핸드폰 안에는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는데 민도준이 주다현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문틈 사이로 섹시한 잠옷을 입고 있는 주다현의 모습까지 언뜻 보였다.그리고 방문이 다시 열렸을 때 민도준은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몸에 걸치며 나왔다. 그 동작 때문에 슬쩍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에는 붉은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이 있는 게 보였다.사실 그녀는 민도준과 권하윤의 관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거였다.두 사람이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약 때문에 괴로울 때 민도준은 당연히 권하윤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