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눈물 몇 방울을 짜냈다.“아니요.”“정말로 잘못했습니다. 도련님께 잘 보이려는 제 생각이 분에 넘쳤어요.”“그래?”민도준은 마침내 멈추고 농락하는 말토로 물었다.“근데 방금 날 위해서 한 거라고 하지 않았어? 기쁘게 해준다고.”“날 속이는 거야?”권하윤은 중력에 의해 뒤로 젖혀져 언제든지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그의 손목을 잡고 안정감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감히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도준씨한테 사랑받고 싶었습니다.”“허.”그는 얇은 입술로 조롱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뭘 생각하고 있는지 훤히 다 보이니 쓸데없는 거 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알았어?”병아리가 쌀을 쪼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민도준은 그녀를 창밖에서 끌어 올렸다.두 발이 다시 지면으로 떨어지자, 권하윤은 마치 재생한 것처럼 한참을 헐떡이고 나서야 호흡이 평온해졌다.무의식적에 권하윤은 그를 그냥 가게 할 수 없다고 느꼈다.예전에 아주 작은 미움을 샀을 때도 거의 반쯤 죽을 정도로 괴롭혔는데 오늘 이 일로 얼마 동안이나 괴롭힐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예전의 경험으로 보면 오늘 그를 잘 달래지 않으면 고생길이 열리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이해득실을 따져본 후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가는 건가요?”민도준은 눈썹을 들썩이더니 그녀를 힐끗 보았다.“왜? 뭐가 더 남았어?”방금전의 포악한 기운이 좀 사그라든 걸 보고 권하윤은 대담해져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그럴 리가요...... 정말로 놀랬단 말이에요.”눈물은 아직도 고여있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말고 아련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못했다고 빌던 사람이 지금은 슬그머니 작업을 걸고 있다.오늘이 지나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운 것이 분명하다.민도준은 비웃었다.“참 대담도 하지.”“아닌데요...... 무서워 죽겠는데요.”마
권하윤은 민도준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늦었는데 우리 일찍 잘까요?”그녀의 말에도 민도준은 담배꽁초가 끝까지 타들어 갈 때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던 권하윤은 두 손을 침대에 받히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건드리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자기 아래에 있는 권하윤을 바라봤다.두려워하면서도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꿍꿍이를 꾸미는 듯한 그녀의 표정은 참으로 가관이었다.민도준은 일부러 상체를 숙여 권하윤을 누르더니 그녀가 몸을 지탱한 손에 힘이 빠져 바들바들 떨자 그제야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자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권하윤은 그의 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그럼 저 샤워하러 갈게요.”“그럴 필요 없어.”말과 동시 큰 손이 거의 침대에 닿을 듯한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안 씻어도 돼. 하윤 씨가 어떻든 난 다 좋으니까.”그의 숨결이 귀를 간지럽히자 권하윤은 고개를 돌리며 민도준의 입맞춤을 피했다.“저기, 그래도 저 씻을게요. 아까 땀을 흘렸거든요.”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고개를 다시 돌려놓았다.“민재혁 때문에 놀라서 그래?”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거리에 이르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낮은 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아까 전 일 때문에 본인이 민재혁 별장에 숨어들었던 일을 민도준이 다시 언급하는 게 조금 꺼려지는 건 사실이었다.말을 너무 많이 하면 또 민도준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되니까.권하윤의 생각을 꿰뚫고 있는 민도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구조 당할 때까지 버텼다니 운 좋네. 민재혁 손에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솔직히 마음대로 내뱉은 말이었다.“죽는다고? 너무 좋게 생각했네.”권하윤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점점 등 위를 타고 올라갔다.“그 자식은 하윤 씨를 괴롭히고 하윤 씨의 몸과 정신을 망가트린 다음 약점을 찾아
민도준이 자기를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우리 어디 가요?”“당연히 사람 죽이러 가지. 아직 캄캄할 때 하윤 씨를 고기밥으로 강물에 던지려고.”민도준이 무심코 던진 말에 권하윤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인내심이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따랐다.정원을 지날 때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몇 번 더 뒤돌아봤다.지금까지도 그녀는 민도준이 유골함 두 개를 모두 깨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대체 사람이 얼마나 뒤틀려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도준 오빠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라던 민시영의 말이 떠올랐다.‘그래, 부모님마저 이렇게 대하는데 나는 어떠할까? 만약 내가 계속 자기를 속인다는 걸 알면…….’“추워?”운전을 하던 민도준은 조수석에서 몸을 떨고 있는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고 그의 물음에 깜짝 놀란 권하윤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바꿨다.“우리 어디 가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는 병원 문 앞에 멈춰섰다.‘민도준 씨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 오다니. 이렇게 착한 사람이었나?’차에서 내린 권하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표정이 너무 이상했는지 민도준은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채 하지도 못하고 하윤 씨 뼈가 부러지는 건 원치 않거든.”“…….”당연하게도 그녀는 골절이 아니라 그저 조금 타박상이 있을 뿐이었다.“갈비뼈가 심하게 다친 건 아니지만 안정을 취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순간 의사의 눈에 싸늘한 빛이 언뜻 지나갔다.“아무리 그래도 인체가 강철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적당히 하세요. 젊다고는 해도 몸이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어요. 애인 소중히 대하세요.”의사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충고였지만 검사할 때 권하윤 몸에 난 야릇한 흔적을 이미 봐버린 뒤 이런 말을 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사람들에게 설교를 당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
권희연은 이런 곳에서 민도준을 만난 것에 매우 놀란 듯 그에게 어디 다친 곳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마침 그녀 뒤에 숨어 있는 여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만약 여자의 다리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민도준의 큰 키에 완전히 가려진 여자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권희연은 민도준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궁금했지만 숙녀로써 그런 것을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기에 그저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친구분이 계신 것 같으니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전 이만…….”“방해 안 돼요.”민도준은 오히려 자리를 피하려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어디 다쳤어요?”권희연은 민도준이 자신한테 보이는 관심에 기쁘기는커녕 상대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당황했다.하지만 놀란 건 민도준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권하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속으로 민도준을 수백 번도 욕했지만 발각되기라도 할까 봐 그의 등에 바싹 붙어 자기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그때 마침 잠시 멈칫하던 권희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관심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주의로 넘어졌는데 이제는 괜찮아요.”등 뒤의 옷이 권하윤의 작은 손에 꽉 잡혀 쭈그러들 대로 쭈그러 들자 민도준은 그제야 나지막하게 “아하”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대답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상대의 흥미가 깨진 듯하자 권희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도준의 등 뒤를 힐끗 보더니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권하윤은 민도준을 등 뒤에서 밀어댔다.“얼른 가요.”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손을 힘을 주며 밀어도 민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에 권희연에게 발각될까 봐 겁이 난 그녀는 민도준을 버려둔 채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잡혔지만 말이다.“하윤 씨 토끼야? 뭘 그렇게 빨리 도망쳐? 걱정하지 마. 보아하니 어젯밤 아주 고생한 것 같으니 바로 나오지는 않을 거야.”그의 말에도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듯 계속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더니 차에
분명 약을 바르는 손의 힘을 말한 거였지만 그의 눈빛과 말투 때문에 약간 야릇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권하윤은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얼버무리며 대답했다.“괜찮아요.”“별로 만족하지 않는 눈치인데?”느릿느릿 연고를 발라주던 민도준은 점점 몸을 아래로 숙이더니 뒤로 도망치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침대 곁으로 끌고 갔다.“만족하지 못하겠다면 다른 걸 시도해 보는 건 어때? 만족하는 게 하나 쯤은 있겠지.”그날 밤, 권하윤은 울면서 몇 번이나 만족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하지만 실제로 만족한 사람은 오직 민도준뿐이었다.그렇게 밤새도록 해댄 다음 날 권하윤의 낯빛은 어두울 대로 어두웠다.최수인은 비비크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권하윤의 다크서클을 보며 찻잔에 말린 편 인삼 몇 개를 넣었다.“자요, 신장에 좋아요.”그의 말에 권하윤은 아무 말도 없이 찻잔을 들었다.하지만 그녀의 동작 덕에 손목에 난 붉은 손가락 자국이 최수인의 눈에 들어왔다.“쯧, 민도준 그 자식은 침대에서 무슨 짐승도 아니고.”권하윤은 쓴 인삼차를 내려놓으며 입을 닦았다.“어제는 다른 사정이 있었어요.”한참 뒤,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난 최수인은 멍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꿈쩍도 하지 않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뭐라고요? 하윤 씨가 도준 부모님 유골함을 훔쳐다 줬다고요?”고개를 끄덕이는 권하윤을 보자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고도 아직 살아있었어요?”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권하윤의 모습에 최수인은 두 손을 모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단하네요.”민도준이 저지른 짓에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 최수인을 보자 권하윤은 순간 궁금해졌다.“그런데 도준 씨는 대체 왜 그런 거죠?”분명 그가 본인 입으로 부모님은 무척 인자한 사람들이라고 했으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그 말에 최수인은 몇 초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잠시 고민하고 나서야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도준이
“하윤 씨 지금 도준 오빠가 둘째 숙모와 숙부한테 왜 그렇게까지 불경스러운 짓을 벌이는지 궁금하죠?”민시영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 권하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왜냐하면 민시영이 이런 일을 꾸몄다는 건 그녀도 몇 년 전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민시영은 이번에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알려주었다.“사실 둘째 숙모와 숙부는 민씨 가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연구에만 관심이 있었거든요. 잘하면 지금의 통신 과학기술에 큰 변화를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분들이었죠.”물론 연구는 돈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적당히 이용만 잘하면 전통적인 다른 업계보다도 더욱 많은 수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분야다.“그런데 두 분이 프로젝트 연구 때문에 해외에서 실험을 하다가 그 일이 터졌어요.”여기까지 말한 민시영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그때 도준 오빠가 막았었는데 둘째 숙부가 거절했어요. 아마 평생 해오던 연구가 끝내 실생활에 응용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다리지 못한 거였겠죠.”권하윤은 그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민 사장님도 뭔가 대비했을 거 아니에요?”“했죠.”민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도준 오빠는 고작 19살이었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인제였어요. 심지어 다른 숙부들도 오빠한테 밀려날 만큼, 할아버지도 오빠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몇 번 대놓고 말했을 정도로. 만약 일반적인 암살이라면 오빠가 어떻게 했겠지만 하필이면 가장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는 해외에서 생각지도 못한 폭동이 일어났으니…….”“그 폭동 이후 도준 오빠는 약 3년간 잠적했어요. 식구들 모두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할 적도였거든요. 그런데 오빠가 다시 돌아왔을 때 민씨 가문은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 오빠 자리는 없었어요.”민시영은 한참을 말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전 도준 오빠가 그때부터 평범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5년도 안 돼서 경성의 암거래 시장을 통째로 먹어버릴 줄이야. 그건 아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부터
권하윤이 커피숍을 나설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검은 반점이 눈앞에 언뜻언뜻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권하윤의 뻑뻑한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니.’권하윤은 눈을 감은 채 햇빛 아래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공은채가 민도준 씨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소리잖아. 만약 이 모든 일이 사실이라면…….’권은채는 민도준의 약혼녀일 뿐만 아니라 그와 서로 운명의 실로 묶인 듯한 끈끈한 관계라는 뜻이었다.“권하윤 씨.”그때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케빈이었다.그는 차 옆에 서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제야 권하윤은 그가 민시영을 데리러 왔다는 걸 깨달았다.“시영 언니는 안에 있어요. 이제 곧 나올 거예요.”“네.”꿈쩍도 하지 않은 채 차 옆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 권하윤은 그의 어깨를 힐끗 살폈다.“상처는 이제 괜찮아요?”케빈은 그녀의 말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자기와 대화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권하윤은 눈치껏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했을 때 케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제가 빚진 건 언젠가 갚겠습니다.”그의 말이 조금 의외였지만 권하윤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네”라는 짤막한 대답만 남겼다.…….권하윤이 떠난 뒤 케빈은 뭔가 발견한 듯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계단에 서 있는 민시영과 마주쳤다.그녀는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화 끝났으면 나 차 문 좀 열어주지?”케빈은 아무 말도 없이 민시영을 위해 조수석 쪽 차 문을 열어준 뒤 민시영이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차 루프를 받치고 난 뒤 그녀가 차에 오르자 그제야 빙 돌아 운전자석에 앉았다.차가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민시영은 케빈이 왼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는 걸 발견했
민도준의 전화가 걸려 올 때 권하윤은 마침 커다란 가위를 들고 민도준의 개인 별장에 있는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물론 정원사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했지만 직접 하려고 하니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 약 1시간이 지나서야 마른 가지와 잡초를 모두 깨끗이 제거했다.그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 그녀는 약간 숨을 헐떡였다.“도준 씨?”전화 건너편에서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나쁜 일을 하길래 그렇게 헐떡거려?”그 말에 권하윤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지며 쪽걸상에 앉아 대답했다.“도준 씨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나쁜 일을 저질러요?”“그건 모르는 일이지. 내가 질려서 다른 놈하고 놀아났을지 누가 알아?”“도준 씨가 바로 제가 놀아난 놈이잖아요.”“음? 뭐라고?”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던 권하윤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뻔뻔하게 대답했다.“전 그럴 리 없다고요. 도준 씨가 저한테 질리면 모를까.”현재 시각 햇볕은 아까만큼 따갑지도 않았고 오히려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가 기분이 좋았다.이윽고 정원에 앉아있던 권하윤은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기지개를 켰다.“설마 취조하려고 전화 한 거예요?”“왜? 안 돼?”“안되긴요. 마음대로 취조하세요.”권하윤은 온 정신이 정원에 팔려 자기 목소리가 영혼이 없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오직 어떻게 하면 정원을 예쁘게 꾸밀 수 있을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그걸 바로 캐치한 민도준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어제는 내가 무서워하며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더니 하루가 지나니 바로 이렇게 돌변한다고? 빨리 전화를 끊을 생각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꼴이라니.’권하윤에게 애인이라는 자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민도준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별장에서 기다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갈 테니까.”“네?”그 한마디는 역시나 성공적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별장에 오려고요?”그녀의 말에 차 키를 잡던 민도준은 잠깐 멈칫했다.“뭐야? 이미 거기 있는 거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