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자는 척 조용하게 누워있다가 민승현이 다시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로써 그녀는 무사히 한고비를 넘겼다.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고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다.“다섯째 작은 사모님, 얼른 일어나세요.”마지못해 눈을 뜬 권하윤은 눈앞에 나타난 메이드에 어리둥절했다.일반적으로 메이드가 말을 전하러 올 때면 문밖에서 부르곤 하는데 방까지 들어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한참 동안 눈여겨보고 난 뒤에야 권하윤은 그녀가 지난번에 자기와 민도준이 저질러 놓은 사태를 수습해 준 민도준 측 사람이라는 게 떠올랐다.권하윤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왜요?”“본채 거실로 오라고 하십니다.”“본채 거실이요?”뜬금없는 요구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왜요? 누가 저 부르던가요?”메이드는 뒤를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말을 전하러 온 메이드 말로는 어르신께서 작은 사모님께 할 말이 있다며 불렀다고 합니다. 따져 물을 게 있다고. 그림에 관련된 거라고 했던 것 같아요.”‘그림…….’권하윤은 그제야 무슨 이유인지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알았어요, 준비 마치고 바로 갈게요.”권하윤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메이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분위기가 엄청 살벌하대요. 아주 심각한 일인 것 같은데 민 사장님께 알릴까요?”“그럴 필요 없어요.”권하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이 일은 얘기할 필요 없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이 일은 그녀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설령 진짜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민도준에게 도움을 청할 리는 없다.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위기를 해결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의심해 더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으니.권하윤이 이미 마음을 굳힌 걸 보자 메이드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그 시각 문밖으로 나온 메이드는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 권하윤이
“할아버님.”권하윤은 민성철을 향해 허리 숙이며 인사하더니 이내 강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어머님.”“무슨 낯짝으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불러? 난 너 같은 며느리 둔 적 없다.”“크흠.”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강수연은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올랐다.하지만 권하윤은 일부러 모르는 척 되물었다.“어머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씀해 주세요.”강수연은 권하윤이 본인의 체면까지 구겼으면서 여전히 모르는 척 하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이거 봐봐!”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긴 원기둥 나무통이 놓여있었다.그 옆에서 강민정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서 있었다.오랫동안 준비했는데 끝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마음씨 착하게” 통의 뚜껑을 열어 권하윤더러 그녀가 팔아버린 그림을 보게 했다.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권하윤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거 우리 집에 있는 한매도 아니에요? 왜 여기 있지?”“이게 어디서 시치미야?”강수연이 참지 못하고 권하윤을 삿대질하며 벌떡 일어났다.“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니? 어쩜 아버님이 승현한테 준 그림을 밖에 내다 팔 생각을 다 하니? 만약 민정이가 발견하고 거금을 들여 사들이지 않았으면 가문 망신은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래?”권하윤은 강수연의 말에 실소했다.“어머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림은 집에 잘 있는데요.”그녀가 여전히 강경하게 말하자 강민정이 끼어들더니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언니, 여기 다 가족뿐인데 거짓말 그만 해요. 이 그림은 제가 직접 구매한 거예요. 다른 사람 손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이 일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민정 씨가 직접 샀다고요?”권하윤은 피식 웃었다.“이 그림 시가만 적어도 200억인데 아무리 민씨 집안에서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큰돈 구하느 거 쉽지 않았을 텐
권하윤의 전화를 받을 때 최수인은 졸고 있었다. 때문에 전화를 받자마자 하품을 해댔다.“아하. 예…….”“최 사장님, 저 일이 좀 있는데 혹시 시간 되세요?”권하윤의 진지한 목소리에 최수인은 “예쁜 윤이”라는 호칭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크흠, 말씀하세요.”“제가 얼마 전 르네시떼에 한매도 족자를 복구하러 갔었는데 혹시 기억나나요?”“당연하죠. 혹시 복구한 후에 또 파손됐나요?”최수인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권하윤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멍하니 서 있는 강민정을 바라봤다.“아니요. 복구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사장님 말씀대로 통 안에 넣은 대로 꺼내지 않았어요.”“네, 맞아요. 경성 날씨가 건조하다 보니 자꾸 꺼내 놓으면 복구한 부분이 다시 갈라지기 쉬워요.”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특히 강민정은 사람들의 뜨거운 눈총에 당장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녀는 앞으로 쌩 달려가 권하윤의 핸드폰을 홱 빼앗아 들었다.“최 사장님! 그때 사장님이 누군가 한매도를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말을 바꿀 수 있어요?”“한매도요?”최수인은 차를 홀짝이더니 말을 이어갔다.“우리 여기 한매도가 한 폭뿐이 아니라서 어떤 걸 가리키는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저 요즘 한매도를 판 기억은 없고 축구도는 팔았던 기억은 있는데 혹시 언제 구매했어요?”강민정은 그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 그림을 르네시떼에서 직접 구매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없어 식은땀만 흘릴 분이었다.하지만 권하윤은 오히려 무덤덤하게 핸드폰을 빼앗아 왔다.“아니에요, 최 사장님.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것뿐이에요. 실례했어요.”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당황한 강민정을 힐끗 보더니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민정 씨, 혹시 누구한테 사기당한 거 아니에요?”“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게 말이 돼?”강민정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200억짜리 그림이
민지훈은 어릴 때부터 돈을 좋아해 돈 되는 물건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눈썰미를 키웠다. 그 눈썰미만큼은 밖에 있는 전문가들조차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때문에 좋은 물건만 생기면 민상철은 먼저 그에게 감정을 맡기곤 한다.그리고 현재, 할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민지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림을 들어 천천히 확인했다. 그가 감정하는 동안 실내는 적막이 흘렀다.재밌다는 듯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긴장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약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이리저리 훑어보던 민지훈이 끝내 그림을 내려놨다.“할아버지, 이 그림은 가품입니다.”“뭐라고요?”강민정이 맨 처음 펄쩍 뛰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이게 가품일 리가 없다고요!”너무 다급한 나머지 그녀는 민지훈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한 번만 더 봐봐요. 이게 어떻게 가품일 리 있어요?”하지만 그녀의 모습에 강수현은 쪽팔렸는지 크게 호통쳤다.“민정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 손 놔!”민지훈도 그녀의 손을 슬쩍 뿌리쳤다.“이 그림도 사실은 옛날에 그려진 모방작이에요. 그런데 그 연대나 가치가 진품보다는 많이 떨어져요. 만약 수정을 거치지 않고 아예 똑같이 모방했다면 그나마 2억 정도는 될 거예요.”말을 하는 도중에 그는 강민정을 힐끗 스쳐봤다.“그러니 진품이라고 속은 것도 어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죠.”“아니야…….”당황한 강민정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권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정 씨, 본인 꾀에 본인이 넘어갔네요. 제가 진짜로 집안 그림을 팔려고 한다 해도 먼저 승현이나 어머님께 말씀드려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굳이 직접 사들여 돈만 낭비해요?”무심코 던진 그녀의 말에 강민정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그녀가 이렇게 한 원인은 민씨 가문을 위한 게 아니다. 그저 권하윤을 밟아 본인이 민씨 집안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지.몇 마디 말로 강민정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의 눈에 웃음기가 더해졌다.‘내 앞
민상철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귀찮은 듯 강민정을 바라봤다.“강씨 집안 일은 강씨 집안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해.”“새언니에 관한 일이에요!”말을 마친 민상철은 이내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본인이 덫에 걸렸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 강민정이 갑자기 소리쳤다.“새언니가 민씨 집안 며느리면서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않고…….”“머리 아파 죽겠네.”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갑작스러운 그의 한 마디에 거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그는 강민정을 힐끗 바라보며 폭탄 같은 발언을 툭 던졌다.“어제 내 침대에 기어 올라오더니 이제는 제수씨를 모함하고 참 바빠 보이네?”“저…….”강민정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민도준이 사람들 앞에서 어제의 일을 대놓고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여자인 그녀의 명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처사에 그녀는 수치스러운 동시에 민도준이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녀는 감히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민도준이 어떤 사람인가? 아마 그녀가 100마디를 해도 민도준의 한마디보다 무게가 없을 것이다.만약 여기에서 민도준의 화를 돋우면 그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감당해야 할 거다.“…….”그녀의 묵인에 민승현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그는 평소 순진하고 여리기만 하던 사촌 여동생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강민정의 말에 걸음을 멈췄던 민상철은 민도준의 말에 그녀를 더욱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리고 수치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수연을 쏘아보더니 나지막하게 경고했다.“시간 있으면 승현과 하윤이나 신경 써. 같잖은 사람 집에 자꾸 끌어들이지 말고.”“네.”강수연은 하염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민도준, 서재에 잠깐 들어와.”민성철의 말에 민도준은 꿈적도 하지 않은 채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방금 전의 똘똘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느새 고분고분한 모습으
“그럼 어제는 왜 말 안 했는데?”“무서워서 그랬어.”민승현은 반신반의하는 듯 따져묻자 강민정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빠가 나 때문에 민 사장님과 대치할까 봐 오빠 다칠까 봐 그랬어. 그런데 오빠까지 어쩜 나 믿지 못해?”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기도 했고 서로 상대를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기에 민승현은 무의식적으로 강민정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부정했다. 때문에 사그라들지 않는 의심을 억지로 꾹꾹 눌렀다.“됐다. 그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자. 그런데 너 그 그림 나한테서 가져간 돈으로 산 거 맞지?”강민정은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훌쩍거리며 인정했다.“응.”“민정아! 내가 너 얼마나 믿는데 나를 속일 수가 있어?”민승현이 화를 내자 강민정은 더욱 심하게 흐느끼며 그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졌다.“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 그런데 다 오빠를 위해서였어. 오빠 곁에 남아있고 싶었다고.”“나를 위해서라고?”민승현은 분노에 찬 듯 손가락으로 그녀를 삿대질했다.“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뜯어냈어? 내가 너한테 그 돈 마련해 주느라고 우리 부모님이 권하윤한테 준 돈까지 받아왔다고! 너 그거 알기나 해?”권하윤의 이름을 들은 순간 강민정은 문득 머리 회로가 선명해지면서 전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지나치게 냉정하던 권하윤, 그리고 그녀를 위해 해명을 하던 최 사장 그리고 마침 그녀가 모은 돈으로 사들인 그림까지…….그 모든 게 연결되면서 갑자기 거대한 사기극에 본인이 휘말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강민정은 순간 심란해져 비명을 질렀다.“그년이야! 이게 다 그년 짓이야!”“뭐라고?”민승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그리고 잠시 뒤.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귀찮은 듯 말했다.“그건 다 네 추측일 뿐이잖아.”“오빠,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것 같아? 내가 르네시떼를 나서기 바쁘게 누군가 그림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분명 권하윤이야!”예전 같았으면 민승현도 그녀
아무 기척도 내지 않은 권하윤은 놀란 듯 몸을 바닥에 더욱 엎드린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하지만 경각심이 높은 케빈은 그녀가 숨은 곳으로 점점 다가왔다.“누구야?”나지막한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황량한 정원에서 유난히 음산하게 들려왔다.갑자기 느낀 불안감에 권하윤이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케빈은 허리춤에서 말없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햇빛에 싸늘한 빛을 반짝이는 날카로운 물체를 본 순간 권하윤은 앞으로 내디디려던 발을 다시 뒤로 뺐다.‘아무리 누군가 있다는 의심이 들어도 칼부림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니면 설마 무슨 들키지말하야 할 비밀이라도 있나?’위험을 깨달은 권하윤은 숨을 죽인 채 벽에 바싹 붙어 케빈이 정원 안으로 발을 들이지 말기를 기도했다.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케빈이 시선에서 사라진 것이다.그건 그가 이미 정원 문 앞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권하윤은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움츠린 채 숨었다.‘어떡하지? 이대로 계속 숨어야 하나? 아니면 저 사람이 부주의한 틈을 타 도망쳐야 하나?’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충 닫힌 정원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웠다.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그 그림자는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점차 가까워졌다.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권하윤은 발끝의 방향을 슬금슬금 돌리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하나, 둘…….’“누가 감히 내 낮잠을 방해해?”그때 정원에 갑자기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권하윤은 하마터면 바닥에 무릎 꿇고 주저앉을 뻔했지만 이내 자세를 잡으며 쪼그려 앉았다.나무에 시선이 가려진 그녀는 케빈이 등 뒤로 손을 숨기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민 사장님.”곧바로 예의를 갖춘 말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눈에 뵈는 것 없는 듯한 민도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왜? 시영이한테 버림받아서 나한테 와서 행패라도 부리나?”“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저 주위를 지나
허둥지둥 일어서는 권하윤과 달리 민도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구경꾼 모드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그의 그런 시선에 마음이 찔린 권하윤은 어색함을 없애려고 입을 열었다.“저 여기 있는 건 언제 알았어요?”민도준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떼어내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찔러댔다.“도망치긴 뭘 도망쳐? 여기 위험한 곳인 거 몰라서 그래? 여기는 하윤 씨처럼 앞뒤가 다른 여우 같은 사람만 잡아먹는 곳이라고.”그의 말에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권하윤은 그의 손을 잡으며 애교부리는 듯 흔들어 댔다.“도준 씨가 있잖아요.”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나 그렇게 믿다간 더 빨리 죽을 수 있어”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물었다.“참, 근데 왜 여기 있어요?”마당은 텅 비어 있어 사람 사는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의 손을 집은 채 안으로 들어가며 턱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여기 북쪽 별채야. 내가 자란 곳.”민씨 저택은 본채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남북 두 별채가 있고 매원, 난원, 죽원, 국원 네 별원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그런데 민도준의 가족이 여기에 살았다는 걸 보면 그의 가족 또한 가문의 중시를 받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한 곳을 보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민도준을 바라봤다.“혹시 어머님 아버님께서 곧 돌아오실 거라는 것 때문에 여기 온 거였어요?”숙부님 숙모님 대신 부른 친근한 호칭에 민도준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해졌다.그나마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먼지가 가득한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두 분 살아계셨으면 하윤 씨 좋아했을 텐데.”소파를 닦고 앉자고 말하려던 권하윤의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져 그대로 굳었다.그리고 괜히 부끄러운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무슨 그런 말을.”“하윤 씨야말로 무슨 생각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