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도원이 이렇게 갑자기 아프게 되어 준호도 바빠졌다.병문안을 오는 사람도 있었고, 곽도원이 아프다는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다른 핑계를 대서 돌려보냈지만, 한 아저씨는 꼭 병실에 들어와서 보겠다고 해서 준호가 애를 먹었다.첫날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는데, 시건이 더 지나면 들킬 것이 뻔했다.준호가 밖의 일을 관리하니 곽도원을 보살피는 일은 자연스럽게 은지와 집사가 맡았다.은지는 침대 옆에 서서 호흡기를 쓴 곽도원을 바라보았다.집사는 그런 은지를 보지 못하고 불안해서 중얼거렸다.“도련님께서 잘 처리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 국장님께서 아무것도 얘기 안 하시고 쓰러지셔서 혹시 못 일어나시면 정말 큰 일인데!”은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곽도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 은지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비상구 계단에서 은지가 한참 서서 기다리자, 비상구의 문이 열렸다.태준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늦게 와서 죄송합니다.”태준은 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곽도원 씨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밖에서 쓰러지셨어요.”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더니 태준이 미소를 지었다.“운이 좋았네요.”“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병원에서는 잠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곽도원이 주기적으로 신체검사를 했을 때 문제가 없었다면서, 너무 갑작스럽다고 하더라고요. 샘플을 가져가서 제일 빨라도 3일 안에는 결과가 나올 거예요.”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언제 이쪽 일 마무리 할 건가요?”“오늘 저녁에요.”태준은 놀라지 않았다.“당신 답네요.”밤이 길면 꿈도 많이 꾼다.“계획대로 흘러가서 성공한다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겠네요.”은지는 태준에게 손을 내밀었다.“태준 씨, 감사합니다.”태준은 은지와 악수를 했다.“하윤 씨랑 약속한 건데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하윤의 얘
은지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준호가 불만을 토로했다.“어디 갔다 왔어!”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놓으며 말했다.“저녁밥 사러 갔다 왔어.”곽도원이 있는 병실은 최고급 병실이었기에 안에는 병실이 있고 밖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은지가 사 온 밥을 탁자에 놓자, 준호가 다가와서 탁자 앞에 앉아 밥을 먹으며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밥 사러 갔으면 간다고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왜 사람 걱정하게 하는데?”“아, 이 말 널 걱정했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보러온 사람들한테 붙잡힐까 봐, 아버지 상황 잘못 얘기할까 봐 그런 거야.”준호가 한참 말했는데, 은지가 대꾸하지 않았다.“왜 아무 말이 없어?”은지는 입속의 음식을 삼키고 대답했다.“곽씨 집안 다른 사람들 상황은 어떤데?”은지가 이 말을 꺼내자, 준호는 입맛이 떨어져 소파에 기대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뭐 어떻긴, 전에는 아버지가 누르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냄새를 맡고 우로 기어오르려고 하잖아? 혹시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곽씨 집안 세력이 완전히 바뀔 거 같아.”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친척들이 그 자리를 뺏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특히 곽도원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의 자리를 뺏기 위해 친척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곽씨 집안이 무너지는 것은 둘째 치고 아랫사람들이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다른 쪽으로 넘어가려고 한다면, 잘못 처리하면 곽씨 집안이 권력의 희생양이 된다.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깔아주는 것이 된다.곽도원이 자리에 있을 때, 준호는 계속 곽도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곽도원이 쓰러지자,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준호가 아무리 사업에 욕심이 있어도 25살인데, 이렇게 큰 부담을 주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불안한 듯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모든 게 다 너무 갑자기 일어났어.”
준호가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는 이미 문 앞에 나와 있었다.준호가 온 것을 보자, 집사는 준호를 끌고 들어갔다.“도련님, 얼른 저 따라오세요.”준호가 뿌리치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 난 거야? 아버지 아직 병원에 계시는데, 무슨 일이 생겨서 나보고 꼭 오라고 한 거야?”집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국장님의 병세에 관한 겁니다.”집사는 준호를 데리고 곽도원의 방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아현원으로 데리고 갔다.“왜 고은지가 사는 데로 날 데리고 왔어? 아버지 병에 관해 얘기한다면서?”“맞아요. 국장님의 병이 은지 씨와 연관이 있어요.”준호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은지가 아현원에서 몇 달을 살았는데, 물건이 아주 적어서 은지가 방에 있지 않을 때는 마치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았다.집사는 은지의 서랍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자를 꺼냈다.“국장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시고 의사 선생님도 병인을 아직 알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국장님 계속 아주 건강하셨어요. 그래서 전 누가 국장님을 일부러 저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국장님께서는 항상 경각심을 품고 계시는 분이시기에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집 안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우미들을 시켜서 집을 다 수색하자, 은지 씨 방에서 이 상자를 찾았고요.”준호는 집사가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바라보았다.‘이건, 공태준이 준 상자?’“안에 뭐 있는데?”집사가 상자를 열자, 안에는 향수가 들어 있었다.굳었던 몸이 풀리더니 준호는 그 향수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그냥 향수 아니야?”“향수 맞아요. 근데 희진의 말을 들어보니까, 은지 씨가 국장님을 만날 때만 이 향수를 꺼낸다고 하더라고요.”준호는 이상한 감을 느꼈지만 계속 반박했다.“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쓴 거 아니야? 향수 하나 가지고 아버지 쓰러지게 만들 수 있어?”집사는 준호가 계속 은지를 위해 반박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전에는 준호가 계속 은지한테 싸움을 걸었는데 지금은 에
준호가 이렇게 말하자, 집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 듯 묵묵히 준호를 바라보았다.“도련님, 국장님께서 오랫동안 가정에 소홀했지만, 도련님 아버지신데, 이렇게 이유도 모르고 가시게 할 겁니까?”“절 믿기 싫으시면 국과수에 맡겨서 검사해 보세요. 혹시 정말 제가 은지 씨를 오해한 거라면 절이라도 해서 사죄할게요. 근데 정말이라면 은지 씨라는 존재 자체가 시한폭탄이라고요!”집사가 간 뒤, 준호의 귀에 집사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준호의 눈앞에 은지를 처음 만났던 장면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던 준호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미워하면서 좋아하는 장면도 보였다.그리고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준호의 모든 신경이 다 은지한테 쏠렸지만, 사실 은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은지는 태준도, 곽도원도, 준호도 사랑하지 않아 보인다.‘고은지는 왜 우리 집에 왔을까? 도대체 뭘 하려고?’...오늘 밤에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비를 내뿜고 있었다.은지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나서 문을 잠가 버렸다.은지는 침대 쪽으로 걸어가 누워있는 곽도원을 내려다보았다.지금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은지는 드디어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은지는 자신의 가슴팍에 달고 있던 브로치의 망가진 부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이건 이성희가 망가뜨린 건데, 당신이 이성희한테 다리로 갚으라고 했지. 브로치는 망가졌고 이성희도 다리를 잃고.”은지는 브로치를 땅에 팽개쳤다.그녀는 하이힐로 브로치를 짓밟았다. 곽도원이 30여 년을 애지중지 보관해 온 브로치가 산산조각이 났다.은지의 목소리는 창밖의 바람 소리와 섞여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내가 지금 염옥란의 브로치를 산산조각 냈으니 날 토박 낼 건가?”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은지가 담담히 말했다.“밖에서 쓰러져서 운이 좋았지만, 이렇게 의식이 없으면 나랑 준호 사이의 일에 관해 얘기해 줄 수 없잖아. 원래 난 당신이 이 일을 알았으면 했는데.”은지는 심
은지가 향수를 곽도원의 코 아래쪽에 놓으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고은지! 문 열어!”은지는 눈썹을 찌푸렸다.‘또 얘야.’은지는 곽도원을 한번 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향수를 치웠다.은지는 복수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지의 인생이 곧 펼쳐질 예정이기 때문이다.은지는 문을 열고 물었다.“왜?”준호는 말하지 않고 은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은지는 준호의 상태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집 간다면서 왜 벌써 왔어?”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은지를 훑어보고 있었다.“왜 문 잠갔어?”“네가 갈 때 나보고 저녁에 사람들이 와서 곽도원 병세에 관해 물어볼 거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준호는 텅 비어 있는 병실을 둘러보며 말했다.“간병인 두 명 있었잖아. 다들 어디 간 거야?”“그분들보고 복도 쪽을 지키라고 했어.”은지가 당황하지 않고 도리 있게 대답하는 모습에 준호는 조금 시름을 놓았다.준호는 걸어 들어가면서 얘기했다.“오늘에는 내가 여기 지킬 테니까 넌 들어가서 쉬어.”준호가 냄새를 한번 맡더니 급히 은지의 손목을 쥐었다.손목이 휘적여지니 그 냄새가 더 강하게 났다.아까 병실에서 나갈 때 준호가 은지를 안았었다. 그때에는 분명히 은지의 몸에서 이런 향이 나지 않았다.속았다는 생각에 준호는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 몸에서 나는 냄새 뭐야?”‘냄새’라는 말을 들은 은지는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쪽 손을 준호의 어깨에 올려놓고 말했다.“아까 샤워하고 향수 좀 뿌렸어. 이 향 싫어?”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준호는 옛기억이 떠올랐다.‘처음, 이 냄새를 맡았을 때, 고은지가 밤에 내 방에 와서 약 발라주던 땐데? 만약 이 향으로 정말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날 나도 죽일 대상으로 생각했던 건가? 나도 죽이려고?’은지가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는 생각에 준호는 화가 치밀어 그녀의 머리를 꽉 잡았다.“고은지, 넌
준호는 은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준호는 이런 수단으로 준호의 의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은지가 미웠지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결국 준호는 은지의 머리를 잡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었다.준호는 은지의 허리를 꼭 안고 비틀었다.두 사람이 그렇게 붙어 있을 때, 호통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고개를 돌리자, 침대에 언제 깨어났는지 모르는 곽도원이 화가 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다른 일이었다면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준호는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었다.곽도원은 옷이 헝클어진 은지를 보고 또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준호를 보며 하늘과 땅이 맞붙는 것 같았다.아까 모습을 보면 전에 여러 번 이런 적이 있는 듯했다.곽도원은 자기 아들이 자신의 새 아내와 이런 사이가 됐을 줄 생각도 못 했다.곽도원은 자연스럽게 그 두 사람이 언제부터, 몇 번이나 자신을 속이고 이런 짓을 벌였을지에 대해 생각했다.전에 그저 넘겼던 사소한 부분들이 떠올랐다.준호가 곽도원과 은지의 신혼 첫날밤을 파괴한 것과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싫어했는지 등등 말이다.준호가 그랬던 것은 신옥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지를 위한 것이었다.반백 년을 살아오면서 곽도원은 처음 이렇게 모욕을 당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기 아들한테서 말이다.곽도원의 얼굴을 완전히 짓밟아 놓은 것이다.곽도원은 은지를 손가락질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널 죽여버릴 거야!”어디서 나온 힘인지 곽도원은 침대에 서서 옆에 걸려있던 외투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은지를 향해 겨누었다.준호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은지의 앞에 막아섰다.“제 탓이에요. 쏠려면 절 쏘세요!”준호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은지를 감싸자, 곽도원의 두 눈이 충혈되었다.“너!”“내가 너 안 죽이고 싶은 줄 알아? 네가 내 아들만 아니었어도 당장 죽이는 건데!”“저리 비켜!”준호는 여전히 은지의 앞에 서 있었다.“싫어요. 아버지 분명 은지 안 좋
이성희라는 이름이 갑자기 곽도원의 머리에 떠올랐다.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이성희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그저 이성희가 염옥란과 아주 닮았다는 것만 기억했다.그때 곽도원이 나이가 어렸기에 돈으로 사지 않고 옛 방식으로 이성희를 쫓아다녔다.곽도원은 이성희의 얼굴이 점차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공천하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염옥란을 쫓아다녔고 그녀도 이렇게 반응했을 것으로 생각했다.‘내가 선물을 주면 기뻐하고 날 집중해서 바라봐주고 사랑스럽게 봐주고.’이성희는 곽도원이 염옥란의 대체품으로 찾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정력을 써서 이성희를 쟁취했기 때문에 그녀는 곽도원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후에 이성희가 사실을 알게 되고 난장판을 벌여서 곽도원이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었다.그러나 오랜 시간 공들여서 만든 염옥란의 대체품이었기에 곽도원은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했다.그렇게 지내는 것이 좋았는데, 이성희가 염옥란한테서 온 편지를 몰래 없애버렸다.이 사실을 알고 곽도원이 공씨 집에 달려갔을 때, 염옥란이 이미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곽도원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이성희가 아직도 떼를 쓰고 있었고 자신이 끼던 브로치가 염옥란의 것인 줄 알고 땅에 던져버린 것이다.이성희가 염옥란이 이미 죽었으니까 아무리 그리워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죽었다고? 네가 그 편지만 안 숨겼어도 염옥란 죽지 않았을 거야.’곽도원이 이성희의 옷에 달고 있던 브로치의 망가진 부분을 보더니 아랫사람을 시켜 그녀의 다리를 끊어버리게 했다.그리고 다른 사람을 시켜 이성희의 얼굴에 흠집을 내게 한 후, 그녀를 농촌에 버렸다.곽도원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미움을 사면 좋은 생활은 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이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자, 곽도원은 깜짝 놀랐다.‘왜 이 기억이 떠오르지?’수많은 기억 중에서 곽도원은 또 파티에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를 떠올렸다.그 여자가 피아노
준호는 슬픔을 억누르고 말했다.“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건 잠지 비밀로 할게요.”“네.”의사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곽도원의 죽음은 곽씨 집안이 곧 하락 선을 긋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해성시의 주력이 바뀐다는 것을 설명한다.준호가 서명하고 곽도원의 위로 하얀 천이 씌워진 사이에 준호는 신옥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준호는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실래요?”준호의 말을 듣고 신옥영 쪽에서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30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이런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그래서 준호도 결심하고 신옥영에게 결정권을 주려고 물어봤다.한참이 지난 후, 신옥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장례식 할 때 가면 돼.]“알겠어요.”...곽도원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오늘 밤은 누구도 잠에 들 수 없다.준호는 곽도원의 편이었던 아저씨 몇분과 믿을만한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곽도원이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부하 직원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어떻게 이런 일이.”준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우리 아버지가 가장 믿던 직원으로서 아버지가 갖고 있던 것 중에 어떤 걸 없애야 할지 잘 알고 있겠죠? 아직 말이 안 새어나갔으니 우리 하나하나 처리합시다.”곽도원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누구나 들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일단 자리에 사람이 사라지면 그것들은 곽씨 집안을 망치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직원도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열쇠를 준호에게 건네주며 엄숙하게 말했다.“이건 국장님 사무실 금고의 열쇠입니다. 도련님께서 가서 처리해 주세요. 저는 밖에 일을 처리하겠습니다.”“네, 각자 맡은 걸 잘해 냅시다.”준호가 떠나기 전, 은지를 보고 두 직원에게 일렀다.“저 여자 잘 지켜, 병실 밖에 절대 나가게 하지 마.”준호가 새엄마를 가두어 놓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순순히 명령을 받들었다.“네!”사람들이 다 자신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