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손님들을 피해 뒤 정원으로 나갔다.신옥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은지 씨, 아마 다 들었을 텐데, 준호, 제 아이 아니에요.”“들었어요.”은지는 신옥영을 바라보았다. 신옥영은 거의 50살이 되는데, 자애로운 얼굴을 갖고 있어 보는 사람이 호감을 느끼게 했다.은지가 신옥영을 바라볼 때, 신옥영도 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은지 씨, 이 일 준호는 모르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곽도원이 사모님을 이렇게 대하는데, 복수하실 생각 없으셨어요?”“첫 몇 년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신옥영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나 후에 준호가 커가니까 그런 생각이 없어지더라고요.”준호의 얘기가 나오자, 신옥영의 표정이 더욱 인자해졌다.“은지 씨는 못 보아냈을텐데, 준호는 사실 말 잘 듣는 아이예요. 제가 유산해서 몸이 안 좋을 때, 준호가 네, 다섯 살이었어요. 겨울이면 몰래 제 방에 와서 침대를 따듯하게 만들어준 뒤에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었죠.”“후에 학교에 들어간 뒤, 저는 준호가 항상 최선만 다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근데 애가 성격이 도원 씨처럼 승부욕이 강해서 뭘 하던 가장 잘하고 싶어 했죠. 공부든 운동이든, 무슨 시합에만 나가면 꼭 상을 받아 왔어요.”“후에 알았어요. 준호는 제가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훌륭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떠올릴 때 염옥란이 아닌 절 떠올리게 하려고요.”신옥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준호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준호는 겉으로 보기에는 좀 강해 보여도 사실 되게 섬세하고 약한 아이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쉽게 상처를 주고 상처도 쉽게 받고요.”은지의 시선이 흔들렸다.“저한테 이런 말씀을 왜?”“은지 씨, 저 한평생을 바쳐서 준호를 키웠어요. 전 준호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으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요. 도원 씨랑 저처럼 이렇게 말
준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술 취한 할아버지가 은지를 터치하고 있었다.“은지 씨, 정말 미인이시네요. 도원이 정말 복 받았네.”준호는 이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는데, 일흔, 여든이 되는 나이에 이발도 거의 없어서 밥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이 예쁜 여자만 좋아했다.‘저 늙은 게.’은지는 바보처럼 피하지 않았다. 준호는 그런 은지를 보고 있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준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은지를 툭 쳤다.“할아버지, 저 준호인데, 저 기억하세요?”준호가 오자, 아까까지 주인공이었던 은지가 옆으로 밀려났다.은지는 아직 서류상으로 곽도원의 새 아내가 아니었기에 곽씨 집안의 계승자인 준호의 지위가 더욱 높았다.순식간에, 상에 있던 모든 사람이 준호를 칭찬했다. 다른 집들과 달리 곽씨 집안에는 자식이 준호 하나뿐이고, 이루어 낸 성과도 좋았기에, 다른 집 애들과 달랐다. 그래서 많은 집에서 자신의 딸을 준호랑 엮고 싶어 했다.한 사람이 말했다.“우리 딸이 도련님이랑 같은 중학교를 나왔더라고요. 정말 인연이죠.”다른 사람이 말했다.“도련님께서 전에 남한성에서 근무하셨죠? 제 딸이 남한성에 음식을 좋아해요.”또 다른 사람이 딸을 등판시켰다.“은지야, 너 집에서 계속 도련님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어렵게 온 기횐데, 얼른 와서 술 부어.”“은지?”준호는 눈썹을 찌푸렸다.김은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감격스러워했다.“네. 전 김은지라고 합니다.”준호는 은지가 자기랑 상관없는 일을 보는 듯한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아, 제 새엄마도 은지인데.”김은지는 준호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인 줄 알고 웃었다. 그러나 준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그래서 전 이 이름 싫어해요.”준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딱히 놀라워하지 않았다.곽도원과 신옥영이 이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새 아내를 맞아들인 것도 모자라, 새 아내가 준호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니, 준호가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한 일이다.손님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이, 또는 은
곽도원의 안방을 새로 꾸며 신혼부부의 방으로 만들었다. 저택에서 가장 큰 방으로서 가장 고급스러운 방이기도 했다.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모두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고 장식품으로 놓은 것들도 모두 가격대가 있는 골동품이었다. 이때 해가 서서히 저물면서 노을이 졌다.술에 취한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한다. 준호가 많이 지탱하고 있어도 은지는 힘들어했다.곽도원을 침대에 눕히고 나자, 준호는 마치 엄청난 고통을 견뎌온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지는 곽도원의 신발을 벗겨주려고 하는데, 준호가 그녀의 손을 쳐냈다.준호는 은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콧방귀를 꼈다.“너 이럴 필요 없어.”준호는 간단하고 확실하게 곽도원의 신발을 확 베껴서 땅에 팽개쳤다.이렇게 해도 곽도원은 여전히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다.곽도원은 지위가 높아 평소에 사업 때문에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았는데, 준호는 곽도원이 이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 본다.‘이 여자랑 결혼했다고 기뻐서?’준호는 곽도원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은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은지는 준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준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넌 나랑 할 말 없어?”은지가 되물었다.“뭘?”‘그러네, 무슨 말 하지?’준호는 방을 한번 훑어보더니 땅에 던져진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너 도와서 신발 벗겨줬잖아.”“응, 도련님 정말 효자네.”“너!”“도련님.”은지는 이불을 정리하며 준호를 바라보았다.“여기는 나랑 네 아버지 신혼 방이니까 그만 나가봐.”‘신혼 방’이라는 말을 듣자, 준호는 그제야 방안의 모든 물건이 신혼부부에게 맞춰서 놓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모든 물건이 다 준호에게 오늘은 곽도원과 은지의 신혼 첫날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곽도원이 일어나면 고은지랑...’준호는 화가 나 눈이 아팠다.그는 그 물건들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은지는 준호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빨간색 이불을 보았다.‘빨간색만 보면 화내는 걸 보니 소인가?’“너랑
곽도원이 뭐라고 하는지 듣기도 전에 준호는 무의식적으로 은지를 품에 안고 머리를 가슴팍에 품어 버렸다.은지는 이렇게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준호의 힘을 못 이겨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침대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지 마.”두 사람은 정지 화면처럼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곽도원이 또 한마디 했다.“옥영아.”곽도원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고통스러운 듯 신옥영을 부르고 있었다.곽도원이 꿈을 꾸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준호는 한시름 놓았다.‘근데 아버지 지금 우리 엄마 이름 부른 건가?’‘전에 아버지 꿈에서 염옥란만 불렀는데, 오늘은 왜 우리 엄마를 찾지?’은지는 준호의 팔을 툭툭 치며 놓아 달라고 했다.준호는 은지를 놓아주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곽도원은 눈썹을 찌푸리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다.“옥영아, 이게 우리 아이야, 돌려줄게.”준호는 이 말이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왜 돌려준다고 하지?’곽도원은 무슨 악몽을 꾸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괜찮아, 못 낳아도 괜찮아.”준호가 무슨 말인지 더 들어보려고 하는데, 손이 차가워져서 돌아보려고 하는데, 은지가 준호와 입을 맞추었다.은지가 오랜만에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준호의 주의력이 돌려지더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귓가에는 은지의 숨소리로 가득 차 곽도원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내가 그 아이 가져와서 너 줄게.”“옥영아, 날 탓하지 마.”한쪽에서는 두 사람이 둘만의 세상에 빠졌고 다른 쪽에서는 곽도원이 꿈에서 슬퍼하고 있었다.술 때문에 곽도원의 숨소리가 아주 컸지만 준호와 은지의 가쁜 숨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모든 일은 다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아주 강렬했다.해가 저물었는데, 준호는 계속해서 은지에게 뽀뽀하려고 했다.은지는 그런 준호를 피하고 등 돌아서 옷을 정리했다.“너 이젠 가야지.”차가운 은지의 얼굴을 보니 끓어올랐던 준호의 마음에 물이 끼얹어진 것 같았다.준호는 은지의 손목을
곽도원은 원래도 머리가 아팠는데, 준호의 이런 말투를 들으니,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준호야, 난 옥영이를 봐서 너랑 안 따지는 거야. 전처럼 그런 말 계속하면 나 진짜 안 봐줘!”준호는 대들고 싶었지만, 신옥영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을 떠올리고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제가 고은지 보고 가라고 했어요!”준호가 항상 은지를 싫어했기에 곽도원은 별생각 없이 몇 마디 꾸지람했다.“무슨 소리냐! 은지 너보다 나이 많아! 네가 왜 은지를 가라 마라야? 빨리 다시 불러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나고 준호가 밖으로 나갔다. 곽도원은 요새 머리가 자주 아파 욕할 힘도 없어 소파에 기대있었다....아현원에서 희진은 멀리서부터 씩씩거리며 오고 있는 준호를 보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 은지 방으로 뛰어갔다.“사모님! 도련님께서 또 오십니다!”희진은 저번 날 준호가 늦은 밤에 은지의 방에 들어간 것을 본 뒤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추측했었다. 그러나 희진은 준호가 은지를 내쫓기 위해 은지를 괴롭히는 줄로 알고 준호를 보면 항상 두려워했다.은지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고 희진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응, 너 먼저 나가 있어.”희진은 은지가 걱정됐다.“사모님, 도련님 되게 화나 보이시는데, 어디 가서 좀 숨으시죠.”말이 끝나자마자 준호가 방으로 들어왔다.은지가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준호는 더욱 화가 났다.“내가 너 도와서 아버지랑 얘기했는데, 넌 여기서 아침밥을 먹고 있어?”희진은 은지가 또 당할까 봐 손에 땀이 났다. 그러나 은지는 급해하지도 않고 천천히 그릇에 음식을 담고 준호에게 내밀었다.“너 주려고 남긴 거야.”은지가 6개 물만두 중 4개를 그릇에 담고 준호에게 내민 것을 보고 희진은 미덥지 않았다.‘도련님께서 물만두 4개 갖고 풀릴까?’그러나 물만두를 받은 준호는 화가 금세 사라진 듯 은지 옆에 와서 앉았다.“날 주려고 남겼어? 진작에 말하지.”희진은 잘 넘겼다고 생각하다가 탁자 위에 젓가락
“알았어. 나 옷 갈아입을 거니까 너 먼저 나가.”은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준호가 불만이 있는 듯 계속 앉아 있었다.“네가 옷 갈아입는데, 내가 왜 나가? 내가 너 뭐 못 본 거 있냐?”“도련님, 너 도련님이야, 지조 좀 지켜.”준호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말했다.“왜? 여기 사람도 없잖아.”말하자마자 준호는 옆에 있는 희진을 발견하고 눈치를 줬다. 희진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고 희진은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와, 이게 무슨 일이야?’은지는 준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준호는 마음에 안 들면 그녀를 하루 종일 놓고 안 놔준다. 그래서 은지는 준호를 쫓아내지 않고 옷장에서 빨간색 원피스를 꺼냈다.“결혼식도 다 끝났는데, 왜 입어!”은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빨간색으로 준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하얀색 원피스로 바꿨다.은지가 고른 것은 잠옷이었고 준호를 등쥐고 갈아입었다.은지는 마른 편이고 피부가 되게 하얬다. 흑발을 하고 있어 더 하얘 보였고 언젠가는 천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은지가 잠옷을 다 입자, 이때 뒤에서 준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은지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은지가 옷을 벗었을 때 뒤에서 준호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나이가 어려 이런 쪽에 욕망이 큰데,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이러니 그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준호의 반응에 은지는 반항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네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셔.”“기다리시라고 해!”“내가 계속 안 가면 찾아오실 수도 있어.”준호는 은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저 이렇게 은지를 보낼 수 없었다. 준호는 그런 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이렇게 담담해? 너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어?”은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준호의 입에 뽀뽀했다.“옷 갈아입을게.”이것보다 더 한 것도 많이 했지만, 단순한 입맞춤이 준호의 얼굴이 빨개지게 했다. 그러나 준호는 부끄러움을 인
곽도원이 신옥영이 사는 집에 도착하자,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이 층짜리 작은 집이었는데, 이웃과의 거리가 1미터도 되지 않았다. 집과 집이 거의 다 붙어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나마 좀 좋은 집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놓고 말하면 그저 보통 집이다.정원 앞은 철로 둘러막고 있었고 정원에는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았다. 정원에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도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신옥영이 현재 사는 환경을 보고 곽도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그녀가 곽씨 저택에서 30년을 살았고 저택에는 열 걸음에 도우미가 한 명씩 있어서 혼자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신상 백이나, 신옥영 피부에 맞게 만들어진 화장품이나, 그녀가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하던 사람들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곽도원은 신옥영이 저택에서 산 30년 동안 줄을 서서 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모른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그런데 집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집에서 살면 소음이 장난이 아닐 텐데 옥영이 어떻게 버티지?’곽도원은 신옥영이 잘 못 지낸다고 생각하고 노크를 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접시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햇살이 정말 좋네요. 밖에서 드시지요.”‘도우미인가? 아니야, 너무 젊어. 스물 다섯, 여섯 같은데? 옷도 너무 예쁘게 입었고.’신옥영은 치마에 카디건을 걸치고 걸어 나왔다.신옥영은 그 여자를 보고 인자하게 웃었다.“하나야, 밖에서 먹기엔 좀 추울 거 같아. 안에서 먹자.”장하나는 그릇을 놓고 신옥영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싫어요, 싫어요!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밖에서 못 먹게 해서 오늘 딱 한 번만 밖에서 먹을게요. 빨리 먹고 들어올게요!”신옥영이 하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주 자애로웠다. 신옥영은 하나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말했다.“그래, 그럼 바람 덜 부는 쪽에 앉아.”이때 나이가 오십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양념을 들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어 점잖아 보였다.하나가 이미 밖에 자
“너.”장원수는 하나가 들어가서 과일을 가질 때 신옥영을 보며 사과했다.“미안합니다, 사모님. 우리 하나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서 너무 예쁘게 키워 저렇게 장난기가 많아요. 자주 못 오게 막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하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신옥영은 고개를 저었다.“하나 너무 활발해서 좋아요. 많이 찾아와 주면 기쁠 거예요.”장원수는 한시름 놓았다.“천식 때문에 밖을 잘 못 나가서 사모님을 안 뒤로 되게 기뻐했어요. 아마 사모님을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신옥영은 비어있는 정원을 보며 말했다.“저한테 딸이 있다면 하나처럼 클 텐데.”장수원은 신옥영의 말속에 슬픔이 담긴 것을 알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아직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지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이별할 때, 장수원은 주머니 몇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하나한테서 들었는데, 사모님 손, 발이 자주 차시다고 해서 좋은 약재 들고 왔어요. 어떻게 끓여서 먹는지 다 써놨으니까 한번 해보세요.”하나는 장수원의 팔짱을 끼고 웃었다.“아줌마, 제 아버지 꽤 유명한 의사라서 효과 있을 거예요. 아빠가 며칠 동안 연구해서 만든 거고, 안 쓸 거예요.”“하나야.”장원수가 하나의 말을 잘랐다. 그는 조금 부끄러웠다.“일단 드셔보시고 별로면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두 사람이 떠난 뒤 신옥영이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문을 잡았다.고개를 들어보니 곽도원이 서 있었다.신옥영은 깜짝 놀라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준호한테 무슨 일이라도 났어요?”이때 노을이 지고 있어 곽도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곽도원은 신옥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우리 사이에 준호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어?”“그런 듯 해요.”신옥영의 말투는 아주 차가웠고 곽도원을 집 안으로 들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곽도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넌 나한테 들어가서 앉으라는 말도 안 하냐?”신옥영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그건 좀 어려울 거 같네요.”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