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원에서 희진은 너덜거리는 은지의 손목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사모님, 손목 탈골된 건가요?!”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 같아.”“저 지금 당장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희진이 나간 뒤, 은지는 힘겹게 외투를 벗으려고 했는데, 이때 누군가 외투를 잡아당겨 줘서 쉽게 벗을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 준호가 서 있었다.은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본 준호는 부끄러웠다.“정원사에게 물어봤더니 네가 꽃 정리해 준 거라고 하더라. 내가 너 오해했어.”“응.”은지가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고 준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너 손목 나갔네, 내가 맞춰줄게.”은지는 뒤로 물러나면서 거절했다.“괜찮아.”준호는 은지가 자신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부대에서 다른 분들 거 많이 해봤어. 너 안 그러면 회복하기 어려울 거야.”“고맙지만 괜찮아.”은지는 확실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준호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걱정 마, 나 실력 꽤 좋거든. 너 아프게 안 할게.”듣는 사람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말에, 문밖에 있던 의사와 희진은 깜짝 놀랐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들으셨죠?’‘들으셨어요?’‘와!’다행히 곧이어 방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봐, 이렇게 하니까 맞춰졌잖아. 손목 움직여 봐.”‘아, 손목 맞추는 거구나.’의사와 희진은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그러나 희진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 도련님께서 사모님 엄청나게 미워하지 않았나? 왜 오늘은 사모님이 다치신 걸 보고 이렇게 긴장하신 거지?’의사가 은지의 손목을 검사하고 안경을 올리면서 말했다.“비록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잘 회복이 안 되면 앞으로 습관성 탈골이 올 수 있어요.”준호가 의사의 말을 듣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렇게 심하다고? 병원 가서 엑스레이 좀 찍어보자!”은지는 준호를 한번 보더니 거절하지 않았다.희진이 따라가려고
복도에서 은지는 어떤 남자의 손에서 상자를 건네받았다.“감사합니다.”정장을 입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닙니다. 제가 약속드렸던 것인데요.”두 사람 다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남자가 말을 이었다.“순리롭나요?”“네.”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은지가 눈썹을 찌푸렸다.“예상 밖의 일이 있어서 조금 힘들긴 합니다.”“네?”남자가 묻기도 전에 밖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지!”곧이어 복도의 문이 열리더니 준호가 나타났다.준호는 은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준호는 말하다가 은지 옆에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태준 선생님?”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준호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 은지와 태준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태준 선생님께서 여긴 왜?”“검사받으러 왔다가 은지를 봐서요. 얘기 좀 하느라고.”태진의 해석에 문제는 없었지만, 준호는 의심하기 시작했다.‘왜 하필 오늘에 검사하지? 마침, 고은지를 만났다고?’‘고은지를 만났으면 밖에서 말하면 되지 왜 복도에서 말하지? 남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했나?’준호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다 얘기하셨나요?”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준호는 태준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고 은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준호의 뒤통수만 봐도 은지는 준호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 수 있었다.걷다 보니 준호는 은지를 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지가 멈춰 서 있었다.“왜? 태준 씨랑 더 얘기하고 싶어?”은지는 준호의 손을 뿌리쳤다.“그건 아닌데, 너 이렇게 잡아당기다가 내 이쪽 손목까지 탈골할까 봐.”...차에 타고나서 준호는 모든 행동에서 자신이 화가 났다고 티를 냈다.은지가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하는 것을 보고 준호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위해 안전벨트를 해주었다.안전벨트를 해주고 나서 준호는 씩씩거리며 운전석으로 갔다.그러나 은지는 준호를 상관하지 않고 엑스레이를 이리저
그 뒤로 준호는 차를 아주 빨리 몰았다. 그러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또 후회했다.너무 빨리 몰아서 은지랑 말 몇 마디 못 했기 때문이다.요즘 너무 바빠서 다른 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거기다가 전에 은지가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단독으로 안 만난 지 두 달이나 지났던 것이다.‘이것 때문에 은지가 태준 씨를 찾은 건가? 혼자 있는 걸 참지 못하는 여자네!’은지는 엑스레이를 봉투에 잘 담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차가 저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길 잃은 거야?”준호는 아무렇게 둘러댔다.“어머니 곧 생신이라 같이 가서 선물 좀 골라줘.”“응?”“선물 하나 사는데 뭐 어때?”“아니, 내 말은 네 새엄마 데리고 네 친엄마 생일 선물을 산다고?”“캑캑.”준호는 사레에 들려 은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은지가 준호랑 말을 안 해줘도 화나고 말을 해주면 더 화가 났다.쇼핑몰에서 준호는 은지를 데리고 액세서리를 파는 곳으로 갔다.“넌 어느 게 마음에 들어?”은지가 자세히 둘러보자, 준호가 말했다.“너 먼저 네가 좋아하는 걸 골라봐, 그러고 나서 내가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아볼게.”판매원이 안내를 해주었다.“고객님, 피부가 너무 하야시네요. 저희 제품 중에 블루 보석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있는데, 고객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블루 보석으로 된 팔찌가 은지의 손목에 채워졌다. 판매원이 말한 것처럼 은지의 피부가 하야므로 아주 아름다웠다.준호는 그 팔찌가 마음에 들었다.“두 개 주세요.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두 개요?”판매원이 웃으며 대답했다.“저희 디자인마다 하나씩밖에 없어요. 같이 착용하면 예쁜 거 많아요.”판매원이 은지에게 다른 팔찌를 끼워주면서 말했다.“이렇게 비싼 액세서리를 두 개씩 사시는 걸 보니 남편분께서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은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저 얘 새엄마에요.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오빠.”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씨발. 너 나 미행했어?”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나 무서워.”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
권하윤은 권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니다. 때문에 권씨 가문의 사상이 늘 이해되지 않았고 약혼남이 다른 여자와 뒹구는 걸 본 지금은 속이 메쓱거렸다. 민승현에게 살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졌다.어제 민도준과 충동적으로 관계를 가진 것도 사실 보호막을 하나라도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서였다.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민도준이 그나마 어제의 인연을 봐서 나서주기를 바라면서.그런데 보호막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알고 보니 구멍 난 우산이었을 줄이야.외투를 일부러 벗어두고 간 남자를 떠올리니 권하윤은 또다시 속이 뒤틀렸다.지난 반년 동안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로 지내오면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던 그녀였다. 상대에게 들킬까 두려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고 눈빛도 되도록이면 남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만약 어제 민도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평생 그렇게 가짜 신분으로 생활하려고 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나타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그는 권하윤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진짜 그녀를 밖으로 끄집어냈다.권하윤은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한평생 가짜로 살더라도 남한테 당하기만 할 수 없었다. 하필 민도준을 건드려서 일이 귀찮게 되긴 했지만.-민씨 저택.권하윤은 메이드들과 함께 가족 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그리고 마침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려고 할 때 손 하나가 쑥 나와 잔 밑은 받들었다.“오늘 와인 안 마실 거라서 보르도 컵 놓으면 혼날걸요.”고개를 들어보니 우아한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권하윤을 보고 있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와 행동이었다.“저는 원혜정이라고 해요. 형님이라고 불러요.”“아, 형님.”자기소개를 끝낸 원혜정은 메이드더러 위스키 잔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더니 말없이 권하윤을 도왔다.하지만 갑자기 어디선가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니 강민정이 민승현 어머지, 즉 그녀의 이모 강수연의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친하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는 듯 활짝 웃은 채 귓속말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