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준호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곽도원은 은지를 불렀다.“준호를 잘 보살피라고 했더니 걔는 왜 또 퇴원한 거야?”은지는 오늘 긴팔 맨투맨에 긴 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마스크로 턱 쪽을 가리고 있었는데, 대답하려고 하자 밖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태까지 너무 투정만 부린 거 같아서 퇴원해서 아버지한테 사과하려고요.”준호가 당당하게 걸어들어오자, 다친 데 없이 말짱해 보였지만 사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갈비뼈가 아파졌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있는 은지를 보고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부대 쪽에는 말해 놨어요. 해원에 돌아와서 아버지 도우려고요.”이 말을 들은 곽도원은 깜짝 놀랐다.“너 내 곁에 남아서 일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너 절로 사업 하나 차리고 싶다며?”“맞아요. 요 몇 년간 해왔던 건 우리 집안의 사업을 더 잘 계승하기 위해 한 노력이에요. 제가 곽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집안을 위해 할 일은 해야죠.”처음에 준호가 해원을 떠나 혼자 일을 벌여보겠다고 했을 때, 곽도원은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소를 바꾸면 밑바탕이 없으니,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다시 시작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원에는 곽씨 집안이 대대로 닦아온 기초가 있기에, 이 기초에다가 조금만 더 보태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버리고 준호가 가겠다고 하니 고생을 찾아서 하는 셈인 것이다.그러나 후에 준호가 확실히 해냈고 신옥영의 지지까지 있었기에 곽도원은 잠시 참기로 했었다.그는 준호가 밖에서 몇 년은 더 있다가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정신을 차릴 줄은 몰랐다. 준호가 돌아온다는 소리를 들은 곽도원은 마음이 시원해지는 듯했다.곽도원은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준호는 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새엄마가 잘 설득해 줘서 그렇죠.”‘새엄마’라는 호칭을 들은 은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고 곽도원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이상해졌다.“왜 갑자기 이러는데?”준호는 은지를 보며 말했다.“아버지께서
곧이어 은지의 턱이 들려지고 준호가 위에서 아래로 은지를 바라보았다.“어때? 새엄마? 내가 모든 공로를 다 너한테 넘겨줘서 아버지한테 칭찬도 받고 좋아?”은지는 준호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호가 비꼴 대상을 잘못 찾았다. 이런 공격은 은지에게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았다.은지는 준호의 손을 피했다.“좋지, 네가 날 찾으러 안 오면 더 좋고.”준호는 냉담한 은지의 반응을 보고 그녀의 살점을 물어뜯고 싶었다. 준호는 의자의 손잡이를 꼭 잡고 은지를 가지 못하게 했다.“너 전에 온갖 수단을 써서 내 침대에 오르려고 하더니 지금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누구한테 보여주려고?”은지는 담담히 준호를 바라보았다.“체험 감이 너무 별로라 안 하고 싶어.”준호는 깜짝 놀랐다. 어느 남자가 들어도 화가 날 법한 말을 자존심이 강한 준호가 들으니 너무 화가 난 것이다. 준호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체험 감이 별로라고? 너 전에 힘들다고 했잖아!”“힘들다는 건 시간이 충분하다는 거지 기교가 좋다는 건 아니지.”준호의 표정이 일그러져 은지가 앉아 있는 의자를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준호는 너무 화가 나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은지는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들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물을 마셨다....저녁 식사를 할 때, 곽도원과 준호가 다 집에 없었기에 은지는 아주 여유로웠다.준호가 해원에 돌아오기로 했으니, 곽도원이 아들을 위해 늦게까지 술을 마실 것이 분명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곽도원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자, 준호는 곽도원을 부축해서 집으로 갔다.곽도원이 요즘 두통이 점점 심해져서 술을 마시니 침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은지 불러와.”집사는 대답하고 가서 은지를 부르려고 하는데 준호에게 손목이 잡혔다.“부르지 마. 가서 해장국 좀 끓여와.”집사는 그런 준호에게 말했다.“국장님께서 요즘 두통이 심하셔서 은지 씨가 마사지를 해줘야 주무세요.”‘마사지해야 잔다고?’준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고은지가 뭐
은지는 움직이지 않았다.준호는 은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너 때문에 이렇게 몸이 상했는데, 날 위해서 약도 안 바꿔줘? 고은지, 너 아무리 차가워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그러나 은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준호는 내밀었던 팔을 거둬들이고 은지가 오후에 앉았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 약 안 교체해 주면 안 갈 거야. 내일에 아버지가 나 못 찾아서 네 방까지 오면 아들이 새엄마랑 이러고 있는 걸 보고도 너랑 결혼할지 볼래?”준호가 은지랑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 것 같아 은지는 유치하다는 듯이 준호를 바라봤다.결국 은지는 준호의 약을 교체해 주었다.아직 젊기에 준호의 상처는 벌써 아물기 시작했다.준호가 평소에 부대에서 훈련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등 근육이 아주 발달했다. 은지는 신음을 애써 참고 있는 준호를 발견하고 비웃었다. 소독할 때 준호는 이를 악물었고 구릿빛 근육도 같이 움직였다.은지는 준호의 목과 등에 땀이 흥건한 것을 보았다. 불빛 아래에서 그 근육이 더 섹시해 보였다.은지는 처음처럼 준호에기 다가가 굳어있는 등에 입김을 불었다.따듯한 바람과 부드러운 손길에 준호는 참지 못하고 은지의 머리를 잡고 입맞춤했다.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하는 입맞춤에는 강렬함과 탐색이 동반되어 있었다.준호는 눈을 감지 않았고 은지도 마찬가지였다.은지가 낮에 했던 말이 떠오른 준호는 화가 난 듯 손으로 그녀의 눈을 막았다.“전에는 너 괴롭히려고 그런 거라서 실력을 못 보여준 거야! 못 믿겠으면 다시 봐봐!”준호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리고 말 못 할 감정 때문에 이 차가운 은지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따듯한 몸으로 은지의 차가운 몸을 따듯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이런 상황은 준호도 그렇고 은지도 적응이 안 되었다.은지는 준호가 예전처럼 대해 줬으면 했고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두 사람은 욕망의 바다에서 서로 탐색했다. 준호는 은지를 삼키고 싶었고 은지는 준호를 손에 넣고 싶었다.파도가 첨벙대는 바다에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오빠.”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씨발. 너 나 미행했어?”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나 무서워.”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
권하윤은 권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니다. 때문에 권씨 가문의 사상이 늘 이해되지 않았고 약혼남이 다른 여자와 뒹구는 걸 본 지금은 속이 메쓱거렸다. 민승현에게 살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졌다.어제 민도준과 충동적으로 관계를 가진 것도 사실 보호막을 하나라도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서였다.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민도준이 그나마 어제의 인연을 봐서 나서주기를 바라면서.그런데 보호막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알고 보니 구멍 난 우산이었을 줄이야.외투를 일부러 벗어두고 간 남자를 떠올리니 권하윤은 또다시 속이 뒤틀렸다.지난 반년 동안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로 지내오면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던 그녀였다. 상대에게 들킬까 두려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고 눈빛도 되도록이면 남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만약 어제 민도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평생 그렇게 가짜 신분으로 생활하려고 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나타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그는 권하윤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진짜 그녀를 밖으로 끄집어냈다.권하윤은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한평생 가짜로 살더라도 남한테 당하기만 할 수 없었다. 하필 민도준을 건드려서 일이 귀찮게 되긴 했지만.-민씨 저택.권하윤은 메이드들과 함께 가족 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그리고 마침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려고 할 때 손 하나가 쑥 나와 잔 밑은 받들었다.“오늘 와인 안 마실 거라서 보르도 컵 놓으면 혼날걸요.”고개를 들어보니 우아한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권하윤을 보고 있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와 행동이었다.“저는 원혜정이라고 해요. 형님이라고 불러요.”“아, 형님.”자기소개를 끝낸 원혜정은 메이드더러 위스키 잔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더니 말없이 권하윤을 도왔다.하지만 갑자기 어디선가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니 강민정이 민승현 어머지, 즉 그녀의 이모 강수연의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친하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는 듯 활짝 웃은 채 귓속말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