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곽도원이 알게 되면 은지는 첫 번째로 벌을 받게 된다.‘고은지를 내보내면 좋은 거 아닌가? 내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고은지를 쫓아내려고 온 거잖아.’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준호는 은지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준호는 이를 악물고 은지의 손목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당겼다.“맞아! 너 죽이려고 그래! 빨리 나와!”준호가 너무 세게 잡아당기자, 은지는 넘어질 듯이 끌려 나갔다.계속되는 연기에 곽도원도 화가 났다.“준호를 정원에 묶어 놔!”준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처벌을 많이 받았지만, 이렇게 반항한 적은 처음이었다.곽도원은 준호가 자신의 것까지 위협하려고 하자, 정말 화가 난 것이다. 그는 직접 가서 준호를 밀어냈다.한참 동안 애를 써서야 준호를 정원에 묶을 수 있었다. 준호는 강제로 묶인 말처럼 거세게 반항했다.곽도원은 이번에 엄청나게 힘을 써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채찍을 들고 준호를 때리기 시작했다.저번보다 더 빈번하게 더 세게 때렸다.준호는 이를 악물고 굴복하지 않았다. 그저 불이 켜진 방안을 바라볼 뿐이다.부자가 이렇게 붙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싸움을 말릴 신옥영도 곁에 있지 않았다.집사는 준호의 목에 선 핏줄을 보고 또 입가에 흘러나온 피를 보고, 참지 못하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도련님께서 잘못하신 걸 알았답니다!”곽도원이 멈추지 않자, 집사가 준호를 대신해서 빌었다.“도련님, 제발 잘못했다고 하세요!”준호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난 잘못한 게 없어!”곽도원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났다.“잘못한 게 없다고? 그럼, 네가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때릴 거야!”곽도원은 평소에 준호가 자신의 유일한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봐줬었는데, 오늘은 마음을 먹고 때릴 심산인 듯했다.집사는 곽도원에게도 빌어보고 준호에게도 빌어봤지만, 쓸모가 없음을 깨닫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은지에게 무릎을 꿇었다.“은지 씨,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맞다가는 도련님 죽겠어요!”...집사가 말한 것처럼 준호의 입가에 흘
곽도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준호가 은지에 대한 미움이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준호가 신옥영을 아끼는 마음을 생각하면 또 이해는 갔다.그리고 곽도원은 신옥영이 곽도원이 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하는 사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옥영이 준호를 위해, 곽씨 집안의 사모님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이런 생각이 든 곽도원은 머릿속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신옥영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혼을 꺼낸 일이 곽도원의 마음에 응어리로 남은 듯했다.크진 않지만, 존재감이 강한 응어리로 말이다.신옥영 때문에 이러는 것으로 생각하자, 곽도원의 화가 조금 사그라졌다.“결혼식 날짜를 뒤로 미뤘다. 그러니까 너도 맨날 미친 사람처럼 날 찾아와서 태클을 걸지 마. 먼저 몸 좀 사리고, 앞으로 우리 집안을 계승할 사람이 몸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결혼식을 미뤘다는 말을 들었지만, 준호의 얼굴색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결혼을 미뤘다고 해도 곽도원은 여전히 은지와 한 침대에서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준호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그날 준호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본 광경은 말 안 해도 다 알 수 있었다.준호는 화를 참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퇴원 안 해도 돼요. 근데 고은지 보고 와서 무릎 꿇고 날 간호해 주라고 하세요.”곽도원은 화가 났다.“작작 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붕대 속의 상처 난 피부가 눈앞에 나타나자, 곽도원은 손에 든 컵을 땅에 내팽개쳐 버렸다.“가서 고은지 불러와.”...집에 있던 은지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별 반응이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알겠어요.”그러나 한 도우미가 은지를 대신해서 걱정했다.“도련님과 국장님께서 저렇게 싸우시는데, 사모님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국장님한테 애원해서 가지 마시죠.”은지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들더니 그 도우미에게 말했다.“못 들었어? 국장님께서 나보고 오라고 하
은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준호가 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은지는 곽도원의 눈치를 살피고 준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준호는 은지의 말에서 그녀가 자신을 돌봐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준호는 은지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곽도원이 준호를 때릴 때, 은지는 차가운 눈으로 옆에서 방관했고 준호가 다쳤을 때, 그녀는 또다시 피하려 했다.‘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여자가 있을 수 있지? 독사도 얘보다 착하겠다!’말 못 할 화가 준호를 감쌌다.“거절하면 아버지한테 네가 내 침대에도 올라왔었다고 이를 거야!”은지는 이 세상에 이렇게 사람을 협박하는 방식도 존재한다는 것에 깜짝 놀란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이렇게 잠시 대치한 사이에 곽도원은 통화를 마쳤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은지는 침대 옆에 서서 준호를 위해 물을 떠주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곽도원은 마음이 좀 놓였다.“할 일이 있어서 준호 좀 부탁할게.”은지는 준호를 무시하고 곽도원을 배웅하러 문 쪽으로 갔다. 문 앞에서 곽도원은 우울해 있는 은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준호 성격이 좀 그래서 네가 아주 힘들지? 그래도 넌 내 미래의 아낸데 이런 집안의 일들은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 너희 둘 사이의 일로 날 신경 쓰이게 만들지 마. 알았어?”그 말을 들은 은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기사가 와서 재촉하자, 곽도원은 할 수 없이 병원을 떠났다.곽도원 같은 남자는 사업, 권력이 가정보다 중요한 사람이다.만약 곽도원에게 준호를 제외하고 시름 놓을 수 있는 후계자가 한 명 더 있다면 준호한테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은지가 병실 문을 열자마자 아픈 몸으로 침대 위에서 아등바등하는 준호를 보았다.땅에 떨어진 물건으로 보아 준호는 먼저 문 쪽에 가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다시 돌아와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을 은지는 바로 보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준호가 현재의 몸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오빠.”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씨발. 너 나 미행했어?”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나 무서워.”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
권하윤은 권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니다. 때문에 권씨 가문의 사상이 늘 이해되지 않았고 약혼남이 다른 여자와 뒹구는 걸 본 지금은 속이 메쓱거렸다. 민승현에게 살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졌다.어제 민도준과 충동적으로 관계를 가진 것도 사실 보호막을 하나라도 만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서였다.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민도준이 그나마 어제의 인연을 봐서 나서주기를 바라면서.그런데 보호막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알고 보니 구멍 난 우산이었을 줄이야.외투를 일부러 벗어두고 간 남자를 떠올리니 권하윤은 또다시 속이 뒤틀렸다.지난 반년 동안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로 지내오면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던 그녀였다. 상대에게 들킬까 두려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고 눈빛도 되도록이면 남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만약 어제 민도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평생 그렇게 가짜 신분으로 생활하려고 했었다.그런데 민도준이 나타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그는 권하윤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진짜 그녀를 밖으로 끄집어냈다.권하윤은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한평생 가짜로 살더라도 남한테 당하기만 할 수 없었다. 하필 민도준을 건드려서 일이 귀찮게 되긴 했지만.-민씨 저택.권하윤은 메이드들과 함께 가족 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그리고 마침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려고 할 때 손 하나가 쑥 나와 잔 밑은 받들었다.“오늘 와인 안 마실 거라서 보르도 컵 놓으면 혼날걸요.”고개를 들어보니 우아한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권하윤을 보고 있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와 행동이었다.“저는 원혜정이라고 해요. 형님이라고 불러요.”“아, 형님.”자기소개를 끝낸 원혜정은 메이드더러 위스키 잔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더니 말없이 권하윤을 도왔다.하지만 갑자기 어디선가 느껴지는 미묘한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니 강민정이 민승현 어머지, 즉 그녀의 이모 강수연의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친하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는 듯 활짝 웃은 채 귓속말을 하는